스리랑카 불교
담마끼띠 스님
마하위하라 사찰 주지, 다문화불교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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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인 스리랑카 중북부의 폴론나루와에 있는 불상 |
열여덟 차례에 달하는 왕국의 멸망 속에서도 굳건하게 불교 지켜온 스리랑카
스리랑카는 인도와 가까운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섬나라다.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는 『디빠왕사(Dīpavaṃsa, 島史)』, 『마하왕사(Mahāvaṃsa, 大史)』, 『쭐라왕사(Cūḷavaṃsa, 小史)』와 같은 스리랑카의 연대기를 통해서 방대하고 다양하게 다루어져왔다. 열여덟 차례에 달하는 왕국의 멸망을 거친 스리랑카는 오랜 기간 몸살을 앓았으나, 오늘날 부처님의 말씀을 전 세계에 전할 정도로 불교를 굳건하게 지켜왔다는 데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불교 정신을 잃지 않았고 그 정신을 수호하는 불씨가 계속 타올랐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가 비구들과 함께 스리랑카에 건너오며 불교 전래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가 비구들과 함께 스리랑카에 건너온 때였다. 당시 국왕 데와냥피야 띳사는 마힌다 장로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했으며, 수도 아누라다뿌라에 마하위하라를 세워 상좌부 불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어 마힌다 장로의 여동생 ‘상가밋따’는 비구니 교단을 창설했고,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가지를 모셔와 마하메가와나 공원에 심었다. 이 보리수는 오늘날까지 살아 있으며, 스리랑카 불교 신앙의 상징이다. 또한 기원후 4세기에 비구니 ‘데와사라’가 중국으로 넘어가서 중국 최초의 정식 비구니 승단 수계를 성립시켰다.
기원전 1세기 4차 결집에서 붓다의 가르침 문자화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팔리어 삼장 체계 확립
경전 전승 초기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암송(bhānaka) 전통에 의해 보존되었으며, 이는 붓다가 열반한 후 수 세기 동안 구전으로 이어졌다. 각 경과 율은 특정 계열의 승려 집단이 전담해 암송했고, 이 전통은 3차 결집까지 지속되었다. 스리랑카에 이 가르침은 기원전 3세기에 16개의 암송 전통으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기후 재난과 전쟁, 기근 등의 위협 속에서 구전만으로는 경전을 보전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기원전 1세기, 알루위하라에서 제4차 결집이 이루어지고 붓다의 가르침이 처음으로 문자화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패엽경이며, 이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팔리어 삼장 체계가 확립되었다.
5세기 무렵, 주석서 전하며 불교 교학 정점, 그 중심에 주석서의 발전 있어
불교가 확산되는 가운데 스리랑카에는 마하위하라, 아바야기리, 제따와나의 세 교단이 형성되었다. 마하위하라는 마힌다 계열의 전통을 고수하며 정통 상좌부 불교의 노선을 유지했으나, 아바야기리는 인도 불교의 다양한 종파와 사상을 수용하며 진보적 성향을 띠었다. 이러한 교단 간 경쟁은 사상과 수행법의 다양화를 이끌어냈지만, 정치적 후원을 둘러싼 갈등과 분열을 불러오기도 했다. 특히 아바야기리가 대승불교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마하위하라와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일시적으로 마하위하라가 파괴되기도 했다. 5세기 무렵, 불교 교학이 정점에 이르렀고, 그 중심에는 주석서의 발전이 있었다. 주석서는 경전 해석을 도와주는 필수 문헌으로, 마힌다 계열로부터 싱할라어 주석서들이 전해졌으며, 5세기경 붓다고사에 의해 팔리어로 재정비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싱할라어 주석서가 소실되었고, 이는 학문적 손실로 평가된다. 그러나 주석 전통의 확립은 불교 교학의 심화와 대중화에 기여했다. 이후 담마빨라, 붓다땃따 등 여러 논사가 부주석서를 집필하며 불교 철학을 풍성하게 했다. 또한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에서 상좌부 불교를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에 전파하게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교단 간의 갈등 속에서도
보살 사상 유행하며 관세음보살 등의 조형물 제작
기원전 1세기 무렵, 스리랑카는 전쟁과 기근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수많은 비구와 재가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인도로 피신했다. 이 시기 아바야기리 교단은 인도의 법희부 계열 사상과 대승불교의 웨툴라와다 전통을 받아들였으며, 특히 ‘상가미뜨라’ 승려는 대승을 체계적으로 전파하고 마하위하라를 개종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교단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고, 정치적 후원을 배경으로 사찰 파괴 및 종파 간 탄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 스리랑카에는 보살 사상이 유행하며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등의 조형물이 제작되었고, 아우카나 대불처럼 상좌부와 대승이 융합된 예술 작품도 등장했다.
열강의 식민 통치로 위기 맞으며 19세기 초까지 재가자 중심으로 명맥만 유지
10세기 이후, 승가 내부의 타락이 심화되었다. 승려들이 결혼하거나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수행력은 떨어졌고, 대중의 신뢰도 하락했다. 이에 12세기 빠라끄라마바후 1세가 교단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까쌋빠’ 대장로와 함께 승가를 정화하고, 마하위하라 중심의 단일 정통 교단 체계를 확립했다. 부패한 교단은 폐쇄되었고, 숲 수행 전통(아란야와시)과 마을 수행 전통(가마와시)이 함께 재건되었다. 이로써 스리랑카 불교는 다시 정통성을 회복했으며, 동남아시아 불교 국가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그러나 이후 서양 열강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스리랑카 불교는 다시 한번 큰 위기를 맞이한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에 의한 지배 속에서 불교는 철저히 탄압받았고, 교육은 금지되었으며, 승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18세기 말 스리랑카 내 비구는 자취를 감추었고, 19세기 초까지 불교는 재가자 중심의 명맥만 간신히 유지되었다. 그나마 미얀마와 태국의 지원으로 시암니까야, 아마라뿌라니까야, 라만냐니까야 등 세 교단이 재건되며 부흥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1873년 불교와 기독교 간 공개 토론이 불교 민족운동에 불 지펴…
헨리 스틸 올코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불교 부흥과 세계 전파에 헌신
1873년에는 빠나두라에서 불교와 기독교 간의 공개 토론이 벌어졌다. 승려 ‘구나난다’와 기독교 목사 데이비드 드 실바가 대결한 이 논쟁은 불교 측의 논리적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식민지 지배하의 불교 민족운동에 불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 이 논쟁은 영국 신문에 보도되며 세계에 알려졌고, 이후 ‘헨리 스틸 올코트’가 스리랑카를 방문해 불교 부흥에 힘을 보탰다. 그는 불교기 제작, 학교 설립, 종교 자유 확립 등으로 불교계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고, YMBA 운동과 일요학교 제도도 도입했다. 이를 계기로 불교가 처음으로 서양과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세기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세계 불교 부흥의 중심 인물로, 마하보디협회를 설립해 인도 성지 복원 운동을 펼쳤다. 그는 유럽과 미국, 아시아 각국을 다니며 불교를 강의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세계에 알렸다. 불교 사찰을 각국에 세우고, 25번을 다시 태어나 포교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붓다자얀띠 역경(譯經) 사업, 불교 현대화와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
한편 21세기 ‘아리야라트나’는 간디 사상을 바탕으로 사르워다야 운동을 펼치며, 불교적 사회개혁과 명상 운동을 세계적으로 전개했다. 그는 무상, 무아, 자비를 실천적 가치로 삼아 사회봉사와 공동체 정신을 확산시키며 불교를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했다. 1956년, 부처님 탄생 2500주년을 기념해 스리랑카 정부는 ‘붓다자얀띠’ 국가 사업을 실시했다. 팔리어 삼장을 싱할라어로 완역하고, 불교대백과사전을 편찬하며 불교 교육을 체계화했다. 담마스쿨 제도 도입으로 대중의 교육 참여가 확대되었고, 명상 센터의 부흥으로 수행 문화도 강화되었다. 붓다자얀띠 역경 사업은 34년간 이어졌으며, 불자들의 경전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450년 동안 식민지였기 때문에 팔리어와 불교 공부를 할 수 없었으며 이후 승려들과 대중들의 주도로 독립운동을 했으나 여전히 교육이나 수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승려들은 일반 신도에게 팔리어 경전을 가르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붓다자얀띠 행사를 계기로 이와 같은 상황을 고민하던 승려들이 붓다자얀띠 역경(譯經) 사업을 시도하게 되었다. 번역 과정에서 해석상의 갈등이 있었으나, 불교 현대화와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로젝트였다. 이것이 오늘날 불자가 70% 이상 유지되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불교에서는 비구니 승단을 재설립하고, 경전을 재해석하는 등 미래 불교를 위해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스리랑카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2300년 동안 식민지 지배와 많은 어려움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오늘날까지 불교가 이어져오는 것은 승려들과 불자들의 신심과 노력이 지극한 마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 세계인에게 진정한 붓다의 말씀을 전하는 커다란 역할을 스리랑카 불교가 했으며, 그들의 뜨거운 불심은 앞으로 불교가 만연한 배금주의에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타성에 젖어 안주하지 않고 굳건하게 미래를 향해 뻗어가게 할 것이다.
담마끼띠 스님|스리랑카 켈라니아대학교 산스크리트어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불교대학원대 석사,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마하위하라 사찰 이사장(주지)이며 다문화불교연합회 회장, 평택 미군부대 법사, 능인대학원대 특임교수, 동국대·유원대 강사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초기 불교와 대승불교의 공사상에 관한 연구」, 「스리랑카에서의 삼장 보존과 현대화 과정」, 「The Buddhist Religious Practices of Sri Lanka”, World Father(loka pitṛu) and the Christian Gospels’ Universal Father」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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