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에서 하늘이 가장 높고 깊은 곳, 서울 봉은사 명상길|치유의 숲, 사찰림을 가다

서울 강남에서
하늘이 가장 높고 깊은 곳
서울 봉은사 명상길

글/사진 은적 작가

‘봉은사 명상길’의 남서쪽 들머리. 정갈하게 깔린 다양한 모양의 박석이 걸음을 춤추게 한다.
봉은사 북쪽, 수도산 능선 남쪽 숲길. 두 사람이 엇갈려 걸어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다듬은 길이다.
화면 왼쪽 능선 부분에 경기고등학교 건물이 있다.

도심 절집의 자비심, 보살심이 느껴지는 ‘봉은사 명상길’
1552년(조선 명종 7) 8월, 봉은사 앞 벌판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승과(僧科)에 응시하기 위해 수천 명이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958년(고려 광종 9) 과거제와 함께 시행되었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 폐지된 승과가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 광경이 실로 장엄했던 모양입니다. 하나의 지명으로 역사에 새겨질 정도였으니까요. 그 이름이 바로 ‘승과평(僧科坪)’입니다. 그 벌판은 지금 빌딩 숲으로 바뀌었습니다. 현재 코엑스와 무역센터가 들어선 자리는 본디 봉은사의 앞뜰이었습니다.

‘숲길’을 걷고자 봉은사를 찾았습니다. 봉은사를 잘 모르거나 한두 번 갔어도 절 마당만 둘러본 사람들이라면 괴이쩍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잿빛 도시 서울 강남 한복판의 절에, 그것도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숲’을 찾아갔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겠지요.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개발과 성장의 압력으로 섬처럼 고립된, 강남불패 신화를 써온 무도하고 무지한 세월의 슬픈 초상 같았습니다.

1970년대 초반 군사정권의 강압으로 잃어버린 봉은사 땅은 10만 평(33만 578㎥)에 이릅니다. 그곳에 코엑스, 백화점, 호텔, 한국전력(현재 현대자동차그룹 글로벌비즈니스센터 공사 중)이 들어섰습니다. 만약 봉은사 앞 승과평 벌판이 그대로 있었다면 강남이라는 도시의 가치는 지금과 견주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2만 평 남짓 남은 봉은사 도량은 애틋합니다. 이마저도 없었다면 강남의 화려는 높이 남루했을 것입니다.

봉은사 동쪽의 명상길과 조릿대

봉은사 숲길은 ‘봉은사 명상길’로 명명된, 1.2km의 산책로입니다. 2021년 강남구청과 협약으로, 이미 있던 산책길을 다듬은 것입니다. 봉은사 대중들이 이전부터 사찰 숲을 가꾸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봉은사 명상길은 도로와 면한 부분을 제외하고 ‘ㄷ’자 모양으로 도량의 둘레를 감싼 숲 사이로 이어집니다.

봉은사 남서쪽 모퉁이를 들머리 삼아 명상길을 걸었습니다. 얕은 돌계단을 오르자 소나무숲 사이로 모양이 제각각인 박석이 걸음을 춤추게 합니다. 소나무 길이 살짝 경사를 높이며 대나무 숲길로 이어집니다. 해장죽(海藏竹)입니다. 댓잎 서걱대는 소리를 파도 소리로 듣습니다. 그 소리에 귀를 씻고 나면 절 마당이 열리고 곧장 오르면 왕대가 늘어선 길이 수도산의 능선으로 이끕니다. 천연림으로 이루어진 참나무 숲 사이로 편안한 오르막입니다. 자연석으로 만든 돌계단 옆 부분은 납작한 돌을 덧붙여 계단의 높이를 낮추어놓았습니다. 노인들이나 어린이들을 위한 섬세한 배려입니다. 절집의 자비심, 보살의 마음입니다. 능선 부분은 경기고등학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학교여서 다행입니다. 돌계단 옆으로는 맥문동이 숨죽인 푸르름으로 겨울을 껴안고 있습니다. 내리막과 함께 시야가 열리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삼성동 일대의 빌딩이 걸립니다. 내리막길은 다시 대나무 숲으로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오죽입니다. 오죽을 지나자 사철나무 생울타리 너머로 전각의 지붕이 첩첩이 물결 집니다.

수도산 능선 아래의 명상길 쉼터

세상을 숨 쉬게 하는 곳
절 마당으로 들어 대웅전에서 참배하고 다시 숲길을 돌았습니다.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 또한 적막강산이라는 것을. 자동차 소리는 거의 의식되지 않습니다. 그저 먼 바다를 건너온 바람 소리마냥 웅웅거릴 뿐이었습니다.

봉은사는 결코 빌딩에 갇힌 절이 아니었습니다. 강남에서 하늘이 가장 높고 깊은 곳이었습니다. 빌딩 사이에 고립된 섬 같은 별천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으로 열린, 정녕 세상을 숨 쉬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아침에 내린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마당을 밟으며 웃었습니다. 봄에 씨앗을 뿌리면 금방 싹이 돋을 것 같은 땅. 봉은사 스님네들의 미련한 고집, 아니 유머 감각이겠지요.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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