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에서|이호신 화가의 생태 그림 순례

눈길에서

그림/글 이호신 화가

겨울밤의 대숲길, 179×536cm, 한지에 수묵, 2023년

눈, 그 흰 여백의 길을 걸어보라
지구촌에 내린 첫눈은 언제였을까?

그 태초를 떠올리면 하늘과 땅의 만남이 새삼스레 거룩해진다. 까마득한 그날 광야의 어둠 속 달빛 아래 초인이 눈길을 걸어오는 꿈을 꾸어도 본다. 그 눈을 맞았을 새떼들의 나래 짓과 환희의 세상을.

내 삶에도 첫눈 같은 일이 있었다면 아주 어릴 적 흰 도화지를 마주한 한 소년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후 어느 눈 내린 날 시절 인연에 감읍하며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당신을 만난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텅 빈 내 영혼의 백지 위로 걸어온 당신
그날, 그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첫눈 내린 대지 위로 순결한 세상을 향해
그 숫눈길로 걸어오신 당신.
- 졸시 「숫눈길로 오신 당신」 2014

설송(부여 수산리 반송), 181×88cm, 한지에 수묵과 채색, 2022년

이청준의 소설 『눈길』은 고향에 온 아들 배웅을 위해 눈 쌓인 산을 함께 넘은 후 설산을 홀로 넘어가야 했던 모정의 사연이다. 하여 독자들도 눈길을 오르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그리게 한다. 한겨울 시린 가슴이 되어.

지난날 바랑 메고 눈길을 헤매다 만난 설송(雪松)과 설중매(雪中梅)는 눈 위에서 화첩을 펴게 했다. 한편 산사에서 눈을 맞으며 일주문 주련을 읽는 순간은 어제와 오늘이 바람 같기만 했으니.

“천 겁이 지난대도 옛일일 수가 없고 만세가 흘러도 언제나 지금일세(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나름 어제의 눈과 오늘의 눈은 분명 다르면서도 고금(古今)의 항구성을 일깨워주는 것으로서.

설경은 잠시나마 세상의 번잡을 잊게 해주는 풍광이다. 강퍅해진 심상을 녹여주며 자신의 속 뜰을 돌아보게도 한다. 그 흰 여백의 길을 걸어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파에도 뜨거워지는 추사(김정희)의 문장을 음미해볼 일이다.

“꽃 찾아 목숨 아끼지 않고 눈이 좋아 항시 얼어 지낸다네(尋花不惜命, 愛雪常忍凍)”. “꽃(진리)을 찾아서는 목숨을 아끼지 말고, 눈을 사랑하거든 얼어 죽기를 각오해라”라는 의미이다.


이호신|화가. 자연생태와 문화유산을 생활산수로 그리고 있다. 개인전 26회를 개최했고, 여러 화문집을 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