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서 보는 욕망
박범석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욕망의 개념을 광범위하게 적용한다면 모든 생명은 그 자체가 욕망 덩어리이다. 생명이 탄생한 순간 그 생명은 자기보존과 안전을 위한 무한한 자기 충족과 확장의 길로 들어선다. 생명유지의 욕구와 동기는 결국 생명의 자기 존속을 위한 욕망의 전개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실존적인 문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모든 욕구는 결국 욕망인가? 욕망을 버리는 것은 곧 생명을 버리라는 것인가? 욕망이 사라진다고 그 자체로 성숙하거나 발전한 상태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울증이나 무기력증 환자에게서 사라진 욕망도 가치로울 수 있는가?
세계관이 다르고 그 세계를 구성하고 설명하는 언어체계가 다른 이상, 비슷한 개념이나 동일한 용어로 번역되었다 해서 동일시하는 것은 전형적인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로 간주된다. 욕망의 의미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른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고 나아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추상적인 욕망의 개념을 논의하는 것에 의구심이 들 수 있다. 그럼에도 욕망은 개념적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학, 심리, 종교, 사회, 문화에 내재하는 주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철학에서 논의되는 욕망 담론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개념적 한계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욕망의 양면성
인간의 ‘자기보존’으로서의 생명유지 욕망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갖는다. 욕망의 양면적 양상은 홉스(Thomas Hobbes)와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사유 대비에서 잘 나타난다. 근대 여명기의 홉스는 국가의 통제에 의해서만 자기보존과 합리적인 이익 추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홉스에게서 자기보존 욕구는 이기적인 권력 추구의 욕망으로서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기보존 욕구를 침해하는 전쟁 상태로 귀결된다. 홉스와는 달리 스피노자의 자기보존 욕구는 그 자체가 생성적, 창조적인 욕망으로서 자기긍정의 힘이며 인간 존엄의 기반으로 보장되는 능동적인 역능(potentia)이 된다.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욕망이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해방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사유하는 가장 큰 차이를 형성한다.
욕망의 긍정적인 사유 양상이 사회운동으로 전환되는 시점은 유럽과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든 1968년의 대규모 변혁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 서구 사유의 분기점으로 알려진 68혁명의 목표는 ‘욕망의 자유와 창조적인 삶의 생성’으로 알려진다. 20세기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욕망이 자유롭게 생성되고 창조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국가주의적 통제와 조절을 통해 대중의 욕망을 인종, 민족,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이었음을 대중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한 운동이었다. 68혁명은 욕망이 더 이상 국가와 사회의 통제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인권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이 시기 대표적인 철학자 푸코(Paul-Michel Foucault)는 욕망의 억압이 문명의 시발점이라는 프로이트의 억압 가설을 비판한다. 그는 성의 과학화가 이루어지는 근대의 형성 과정에서 권력은 욕망을 맹목적으로 통제하지 않고 성에 질서와 규칙을 부여하며 통제를 내재화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적 욕망의 통제는 보편적인 인간 윤리가 아니라 계급적인 권리 행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왕과 귀족과 같이 권력을 가진 지배 계층일수록 성적 욕망의 행사와 발산이 오히려 미덕이 되고 서민과 노예 계층에게 성적인 욕망은 억압과 금기 윤리의 미덕으로 작동한다. 푸코의 이러한 접근은 그동안 성적 욕망에 대한 금욕과 통제 일변도의 억압 담론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언어화와 생산성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언어와 욕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일찍이 통찰한 바 있다. 그에게서 언어는 사회적 압력이 검열을 통해 행사되는 곳이며 억압된 욕망이 사회적 규범을 피해 드러나는 곳이다. 억압된 욕망이 표현된 언어는 표면적으로는 명시적 의미와 잠재된 의미로 분열되며, 정신분석에서는 잠재된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억압된 욕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언어학적 방법으로 정교화한 라캉(Jacques Lacan)은 욕망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욕구(need)와 요구(demand), 욕망(desire)을 구분한다. 욕구가 유기체의 생물학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요구는 이것을 언어로 표현해 전달하는 것을 뜻한다.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혹은 언어적) 요구는 불일치할 수밖에 없는데, 언어적 한계로 인해 모든 욕구가 완전히 요구로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온전하게 욕구를 표현하지 못하므로 욕구와 요구 사이에는 필연적인 틈이 존재하고, 이러한 결여에 의해 욕망이 발생한다. 따라서 욕구는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이 존재하지만 욕망에는 특정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남아 있는 결여에 의한 것이며 채워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불가능한 갈망을 의미한다. 욕망하는 주체는 무의식적 주체이며 언어적 질서로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결여를 메우기 위해 항상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나선다. 주체가 실제로 무엇을 잃어버리거나 결핍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언어적 경험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주체는 스스로 무엇을 잃어버린 것으로 착각을 한다.
욕망에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는 스피노자-푸코-라캉의 계보는 현대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이 여전히 욕망을 억압이나 결여에서 온 것으로 본다고 비판하면서 ‘욕망의 생산성’에 주목한다. 그는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한계와 푸코의 내재화된 권력 담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탈인격적인 ‘욕망하는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가 다른 것과 결합해 새롭게 창조되고 변화하듯이 인간의 욕망하는 신체는 유기체적인 획일적 기관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창조적인 기계로 은유된다. 예를 들어 입은 먹는 것만을 주관하는 기존의 유기체적 기관이 아니라, 먹고 말하고 키스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하고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하는 생산하는 기계로서 작동한다.
의미론적 전환
앞서 논의에서 보이듯이 현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욕망을 갖는다는 전제가 가능한지 의문을 갖게 된다. 미디어를 잠식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욕망은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활동이기보다는 소비를 자극하는 획일적 방식으로 세뇌되고 있다. “성적 욕망을 채우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 “사회적 지위를 갖고 싶다”와 같은 욕망은 시대에 따라 은밀하게 전개되었으나 자본주의에 와서는 노골적으로 정당화되고 부추겨진다. 우리는 소비가 멈추는 순간 붕괴되는, 소비 그 자체가 미덕인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욕망을 장려하는 세속적인 시대 분위기와 욕망을 억제하는 성스러운 종교 교리는 갈등의 모순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문제의 답을 주는 것이 해결(solution)이라면, 문제 그 자체가 의미가 없으므로 답을 찾는 것이 무의미함을 자각하는 것이 해소(dissolution)가 된다. 해소는 문제 자체의 문제 의식과 문제의 형성 기반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욕망을 채우는 것이 문제의 해결 방식이라면 욕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문제의 해소가 일어난다. 욕망 그 자체가 특정할 수 없는 추상적인 관념이라면 모든 이에게 적용될 만한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 현대의 욕망이 주체적인 선택이나 근원적인 내면의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2차적인 피상적 모방이라는 점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좋은 차를 타고 싶고 명품백을 갖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욕망은 내면의 근원적인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자기 욕망이라고 착각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허상으로 볼 수 있다.
종교 언어의 신비주의에 흔히 활용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말은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언어의 한계는 이분법적인 양극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생활 세계의 복잡성에서 드러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침묵의 방법을 택할 수 있지만 방편적으로 양극 논리를 해소하는 모순 통합의 언어로 설명될 수도 있다. 전부는 전무(全無)다는 말이 더 현실적으로 수용되는 경우를 우리는 경험한다. ‘만인의 연인’은 연인이 없다는 의미일 수 있고, ‘모든 이의 친구’는 어느 누구의 친구도 아니라는 역설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욕망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욕망의 의미가 된다는 역설로 전환될 수 있다. 욕망에 아무 의미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가치로운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한다면 욕망의 긍정/부정의 선택이 아니라 욕망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의 생산적 고민이 시작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박범석|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박사. 동국대학교·서울대학교 강사, 도쿄대 인문학 연구원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대한불교진흥원 제6회 원효학술상을 수상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초월과 보편의 경계에서』(공저)가, 논문으로는 「욕망의 관점에서 본 불교의 교육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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