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한 스승들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가르침 속에서, 데외람! 글렌 라마 편|슬기로운 수행 생활

존귀한 스승들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가르침 속에서, 데외람!
글렌 라마 편

함영 작가

램프 공양 올리는 글렌 라마

철새의 귀향 같은 다람살라에서의 수행 생활
그때의 일을,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철새가 귀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어머니의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영국에 머물고 있을 때, 달라이 라마라는 분이 인도 다람살라에 서구인들을 위한 학교를 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것이 그를 귀향의 길로 이끌었다.

캐나다 시골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에게 그 일은 그다지 놀라울 만한 건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선시나 『법구경』 같은 불서는 물론 도교와 수피, 힌두교에 대한 책들을 소장하고 있을 만큼 영적인 분이었다. 한편 성장기 때 어머니의 서가에서 본 아인슈타인의 기사는 당시 과학과 수학을 좋아한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인슈타인이 쓴 기사 중에 “본인의 사상과 조화롭게 같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는 불교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을 계기로 불교의 시를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그는 2대와 7대 달라이 라마가 쓴 시들을 특히 좋아해서 자신의 법문에 자주 인용하곤 한다.

글렌 라마, 그에겐 서른 분의 스승들이 있다. 그중 달라이 라마는 각별한 스승이 아닐 수 없다. 1972년에 달라이 라마가 설립한 서구인을 위한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다람살라로 갔을 때 당시 그곳의 환경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만 해도 서양에선 티베트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믿을 만한 번역서도 별로 없었다. 달라이 라마도 노벨평화상을 받은 후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당시엔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달라이 라마께서 서구인 학생들을 가르칠 라마 두 분을 정하셔서 어떤 프로그램으로 할지, 무엇을 가르칠지 직접 정하셨어요. 당신의 스승님들에겐 서구인들에게 잘해주라는 당부를 하셨고, 매년 봄엔 한 달간 매일 6시간씩 직접 지도해주셨죠. 겨울에도 2주에서 한 달간 저희를 가르치셨어요. 달라이 라마를 뵈러 갈 때면 늘 작지만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났죠. 처음 뵈러 갈 땐 25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에게 어떤 질문을 할지 각자 열심히 적고 있었죠. 그때 달라이 라마께서 걸어 나오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 인상 깊었어요. 경전에 부처님은 사자와 같이 걷는다고 나와 있는데 진짜 그렇게 걸으셨죠. 그리고 단이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셔서 “질문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모두가 그 에너지에 압도당해 질문들을 다 까먹고 한 명도 질문하지 못했죠.(웃음) 달라이 라마께서 막 웃으시더니 순간 작은 체구를 늘리시는데 2m 반은 족히 되시는 듯했어요.”

1973년에 있었던 ‘칼라차크라(Kalachakra)’에서의 경험 또한 잊을 수 없다. 그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3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는데, 달라이 라마의 3주 과정의 법문이 끝나면 3일간 가피를 받는 일정이 있었다.

“그때 저는 달라이 라마께서 굉장히 피곤하실 거라 생각했고 이미 여러 번 뵌 지라 행사가 끝나갈 때 사원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제 앞에 150명 정도가 줄 서 있었는데도 저를 보시고 크게 미소 지어주셨죠. 그때 그분 얼굴이 몸에서 분리되어 제 앞으로 쑥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분은 사람들과 그런 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죠. 제 차례가 되어 그분 앞에 섰을 때 “옛 친구여, 네가 오니 너무나 좋구나”라고 귀에 대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느낌은 마치 제가 그날 온 유일한 사람인 양 그의 관심을 온전히 받는 것 같았죠. 그런데 그곳에 온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일일이 다 그런 느낌을 주셨을 겁니다.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난 사람들도 그가 자신을 베프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니까요. 그런 광경을 저는 수도 없이 목격했죠.”

글렌 라마의 야외 의식 및 기도

위엄 있는 삶과 죽음을 보여준 스승의 가르침
달라이 라마를 만날 때면 일어나는 작은 기적과 감동은 비단 그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달라이 라마가 유럽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20년 동안 달라이 라마를 뵙지 못한 그의 친구가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친분 있는 관계가 아니었는데도 달라이 라마께서 인파 속의 그 친구를 알아보시고 “너 어디 있었어? 너 못 본 지 20년은 된다”고 하셨죠. 그리고는 군중에서 그 친구를 끄집어내 옆에 있게 했는데 건물 안으로도 데리고 들어가 같이 앉아계셨어요. 신자들은 난리가 났었죠. 대통령과 유럽 의회 사람들과 줄줄이 미팅이 있는데, 20분 동안 그렇게 앉아계셨으니까요. 그 친구는 불자도 아니고 행사의 주요 인물도 아닌 평범한 사업가였거든요. 근데 당시 그는 은퇴 후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그 일을 겪은 후 완전히 치유되었죠. 달라이 라마의 가장 놀라운 능력과 기적은 모든 사람을 그 사람 입장에서 보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해주신다는 거예요. 그분에겐 사람들을 정말 감동시키고 감복시킬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으세요.”

초행이었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고향 같은 그곳, 다람살라에서 그가 만난 스승들과 가르침은 존귀하고 따뜻했으며 아름다웠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해 달라이 라마의 두 스승이자 그에겐 뿌리 스승이기도 한 깝제 링 도르제창과 티장 도르제창 또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세 분의 깨달음은 얼마나 명확하냐 하면, 제주도에 가서 제주도의 귤을 손에 들고 이것이 귤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까요.(웃음) 그분들을 뵈면 어떤 질문이든 하지 못할 질문이 없었고, 또 어떤 걸 질문해도 그분들께서 당장 답하지 못할 것이 없으셨죠. 그리고 세 분 모두 어느 누가 오더라도 당신이 가장 아끼는 외아들이라도 되는 양 상대를 고귀하게 대해주셨어요.”

이러한 스승들 외에 그에게 정말 강력한 경험과 인상을 남긴 린포체가 있다. 달라이 라마가 ‘인간 국보’로 정하고 대중 강연을 공식적으로 하지 못하게 할 만큼 심장이 약한 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티베트어를 가르쳐주셨던 그 린포체는 그에게 이 같은 수행을 하게 했다. 거리에서 누군가 만났을 때 말 걸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 않기! 그리고 그 사람이 웃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기!

“매주 스승님을 뵈러 갈 때면 제가 거리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떤 대화와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 얘길 나눴어요. 그것이 그분을 만나 제가 5년 동안 주로 했던 수행이었죠. 매년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가면 ‘올해는 대중 강연을 하실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지시면 좋겠다’는 얘길 드렸는데, 어느 해엔 껄껄 웃으시더니 ‘올해는 내가 법문할게’ 하시며 달력을 꺼내 날짜를 표시하셨죠. 그날 스승님께선 약속대로 법문을 하셨는데, 30분쯤 지나 심장을 움켜쥐셨고 얼굴이 빨개지셨죠. 제가 괜찮으신지 물으니 ‘나 지금 심장마비를 겪고 있어’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릴랙스한 태도로 계속 법문을 이어가셨어요. 심장발작이 지속되고 있었는데도 스승님은 제가 법문을 중단시킬 때까지 법문하셨고, 사람들이 떠나고서야 제 팔에 기대어 방으로 들어가셨죠. 그리고 명상을 시작하시며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하셨어요. 당시 달라이 라마의 숙소가 근처에 있었는데, 린포체 님 계신 쪽에 빛이 있으니 점검하고 오라는 달라이 라마의 지시에 가봤더니 호흡도 심장박동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 명상 자세로 앉아계셨습니다.”

생과 사의 중간 상태에서 스승은 그와 같이 3일 동안 앉아 있었는데, 몸에서 점차 빛이 나고 밝고 반투명해지면서 꽃향기가 돌았다. 그 기간 동안 제자들은 스승과의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함께할 수 있었다.

“나중에 스승님의 시자에게 전해 듣길, 스승님께선 이미 법문하기 두 달 반 전에 그 날짜를 선택하셨고, 법문 전날 시자를 불러 내가 간 후 어떤 식으로 공부하고 수행할지에 대해 제자들에게 글을 남기겠다며 유서를 쓰셨다고 했죠. 그분은 제게 굉장히 강력한 가르침이 되셨어요. 어떻게 위엄 있는 삶을 살고 위엄 있게 떠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죠. 제자들에게 무척 엄하고 공정하신 동시에 유머와 장난기 넘치셨고 제겐 너무 친절하셨던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모든 제자를 당신이 꼭 깨닫게 해주겠다고 하셨는데, 죽음의 순간에도 그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한국 사찰에서의 법문 모습

데외람! 수행도, 삶도 즐거움의 길에서
50여 년 전 철새가 귀향하듯 다람살라로 간 청년은 이제 티베트 불교의 라마로서 자신의 스승들이 그러했듯 그 가르침을 아낌없이 전하고 있다. 법문과 수행을 지도하는 것 외에, 그가 수행한 지 6년 정도 된 시점에 한 라마의 제안으로 시작한 티베트 불서를 번역하는 일은 그 일환으로써 지금까지도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다. 그러기에 그는 일 년 중 약 8개월간은 여러 나라를 돌며 법문과 수행을 지도하고, 4개월간은 한곳에 체류해 주로 번역하며 국적도 연령도 다양한 제자들과 메일과 화상 채팅, 줌 법회 등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

“탄트라에는 ‘데외람(Dewa lam)’이라는 전통이 있어요. ‘즐거움의 길’이라는 뜻이죠. 우리에게 중요한 건 데외람! 수행과 삶을 즐기고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티베트에는 평화와 행복을 뜻하는 ‘쉬데(shidae)’라는 말이 있는데, 몸과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다는 의미예요. 그것이 불교와 명상의 제일가는 궁극적 혜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처음 다람살라에 갔을 때 명상을 지도하는 스승께서 ‘너희가 명상하는 좌복만 봐도 거기서부터 벌써 희열과 즐거움이 일어나야 된다’고 하셨죠. 그 방법으로 명상을 끝낼 때는 그 경험이 즐겁고 만족스러울 때 끝내라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래야 명상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다음 시간에 좌복만 봐도 즐거울 수 있다는 거였죠. 불교에선 ‘무아’라는 말을 쓰는데, 우리가 명상을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차원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무아를 알게 됩니다. 에고에서 벗어나 진짜 실상인 자기가 누구인지, 명상은 그걸 알게 하죠.”

그렇다면 데외람의 전통에 입각해 누구든 쉽고 즐겁게, 효율적으로 명상할 수 있는 비법 같은 건 없을까. 그는 일단 호흡에서 그 즐거움과 평온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호흡은 그 자체로 흘러가는 강물과 같아요. 모든 것을 비추는 아주 맑은 물과 같죠. 우리에게 어떤 생각이나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이 어디서부터 일어났는지를 이 호흡을 통해 인지할 수 있어요. 감정도 마찬가지죠. 감정이 어디서 일어나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관찰하는 거예요. 호흡이 그것을 명료하게 비춰주고 인지할 수 있게 하죠. 한편 탄트라에선 숨을 들이쉴 때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길상함을 들이쉰다고 생각하고, 내쉴 때는 자기 안의 우울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내보낸다고 생각하며 호흡을 합니다. 이것은 생활에서 굉장히 유용한데, 가령 누군가에게 화가 났거나 어떤 질병에 걸렸을 때도 이 같은 방법을 활용해 호흡할 수 있어요.”

여기에서 한층 더 발전된 대승에서의 특별한 호흡법도 있다. 가령 부모님이 아프다면 그 고통을 자신이 들이쉰다고 생각하며 숨을 들이쉬고, 즐겁고 밝은 에너지를 그분에게 보낸다는 생각으로 숨을 내쉬는 것이다. 이러한 명상을 통해서도 우리는 무아라는 실상을 알게 되고 ‘쉬데’를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도, 삶도 데외람! 즐거움의 길로 나갈 수 있다.


함영|1998년부터 글을 지어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고, 『빅이슈 코리아』에서 편집장을 지냈으며, 글짓기와 기획 및 출판 등으로 곰탕을 끓여 꽃을 꽂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밥맛이 극락이구나』, 『인연으로 밥을 짓다』, 『곰탕에 꽃 한 송이』, 『노란 문 공양간이 열리면』, 『스승들이 납시어 어른스크림을 사드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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