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디어에 나타난
구업의 문제
김동률
서강대학교 기술경영대학원 교수
영화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구업의 문제
한국 영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잔혹한 영화다. 이유도 모른 채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남자는 자신이 갇힌 이유를 추적하는데, 그 실마리는 ‘왜 하필 15년인가’에 있었다. 감금당할 당시 어린아이였던 자신의 딸이 성인 여성이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 딸을 알아보지 못한 남자는 자신의 딸과 연인 관계가 되는, 마치 오이디푸스(남녀의 관계로 보면 엘렉트라가 정확하겠지만)와 같은 비극을 스스로 실현하게 된다. 남자의 이름 오대수는 오이디푸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남자가 이런 참혹한 복수를 당한 이유는 그의 가벼운 혓바닥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 생각 없이 떠든 후배의 비밀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의 누이를 자살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딸에게만큼은 이 끔찍한 인과응보를 말하지 말아달라고 빌며 자신의 혀를 자른다. 신화 속 오이디푸스가 천형과도 같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눈을 찌르듯이. 영화 <올드보이>는 입으로 저지른 죄악, 즉 구업(口業)의 문제를 소름 끼치도록 처절하게 파고든 작품이다.
‘몸을 깍는 도구이며, 몸을 멸하는 칼날’,
인간의 업 중 가장 중한 구업(口業)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의 번역어로 행위를 의미한다. 선한 행위(善業)에는 낙과(樂果)가 따르고, 악한 행위(惡業)에는 고과(苦果)가 따른다는 사상이다. 업은 몸과 입,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삼업(三業)이라고 한다. 첫째는 몸으로 짓는 죄, 신업(身業)이다. 구타와 살생, 도적질 또는 음행을 통해 쌓인다. 둘째는 입으로 짓는 죄, 구업(口業)이다. 거짓말, 비단같이 꾸미는 말, 이간질, 악담으로 쌓인다. 셋째는 마음으로 짓는 죄, 의업(意業)이다. 남의 것을 탐하거나 악한 생각을 품음으로써 쌓인다.
알려진 대로 셋 중 특히 구업을 두고 ‘몸을 깎는 도구이며, 몸을 멸하는 칼날’이라고 해 인간의 업 중 가장 중하게 여겼다. 『법구경』에 의하면 입은 재앙의 문(門)이기 때문이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라는 진언(불교의 주문)은 친숙하다. 어릴 때 요술이라도 부리고 싶으면 곧잘 소리 내며 놀았다. 이 진언은 『천수경』의 첫머리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인데, 글자 그대로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참된 말’이라는 뜻이다. 불교 신자가 경전을 독송할 때 제일 먼저 정구업진언을 읊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더럽혀진 언행을 참회하고 참된 언행을 다짐하는 절차인 것이다.
말 한마디에 나락으로 떨어진 유튜버와 그 폐해
요즘 젊은 세대, 이른바 MZ세대를 중심으로 유행어처럼 쓰이는 ‘나락’에서도 구업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나락 또한 불교에서 유래한 단어로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인 나라카(Naraka)다. 사전적 의미는 ‘죄업을 짓고 매우 심한 괴로움의 세계에 난 중생이나 그런 중생의 세계’를 뜻한다. 인터넷에서는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러 민심이 이탈한 상태를 표현할 때 쓰인다. ‘나락 갔다’, ‘나락 보내버리자’, ‘나락행 급행열차를 탔다’라는 식이다. 물의를 일으키고 나락 딱지가 붙은 이에겐 생지옥이 기다린다. 네티즌의 집요한 표적이 되는 순간 과거 잘못까지 소환되며 탈탈 털리기 마련이다. 유명인들의 나락행은 많은 부분 경솔한 언행에서 비롯된다. 이를 풍자한 웹 예능 프로그램이 대형 유튜버 피식대학의 <나락퀴즈쇼>다.
쇼는 지옥을 연상케 하는 붉은 배경의 세트장에서 “당신도 언젠가 나락에 간다”라는 무겁고도 엄숙한 멘트로 시작한다. 주로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유명인이 퀴즈쇼 출연자로 나서는데 문제는 질문의 선택지에 있다. 무엇을 고르든 사회적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문항이다. 예를 들어 ‘다음 중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운동을 고르시오’라는 문제에 ‘1번 3.1운동, 2번 흑인민권운동, 3번 노동자인권운동, 4번 여성운동’을 제시하는 식이다. 또는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라고 한 뒤 친일파나 독재자로만 구성된 선택지를 준다. 출연자가 답을 못하고 곤혹스러워하는 모습, 혹은 얼떨결에 답을 고르고 수세에 몰리는 모습이 웃음 포인트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대중이 유명인을 나락으로 보내버리는 세태, 문제적 발언으로 대중의 공격을 받고 지위나 직업이 박탈되는 현상인 ‘캔슬 컬처(cancel culture)’에 대한 풍자다.
그런데 최근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피식대학의 멤버들이 말실수를 저질러 도리어 나락에 빠진 것이다. 이들은 지난 5월 경북 영양군을 방문한 영상을 올렸는데 낙후된 시설을 보며 비아냥거리거나 특산품을 사 먹으며 “할매 맛”이라고 하는 등 지역 비하 발언을 일삼았다. “위에서 볼 땐 강이 예뻤는데 밑에 내려와서 보니까 똥물”, “여기 중국 아니냐?” 등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지역 소멸 위기를 겪는 시기에 해당 지역 주민과 소상공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막말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논란 이후 장문의 사과문을 올리며 수습에 나섰지만 결국 두 달 동안 모든 콘텐츠 업로드가 중단되었다. 순식간에 수십만 구독자가 빠져나가는 등 여전히 누리꾼들의 비난 속에 있다. ‘혀 아래 도끼’라고 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언행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법이다.
구독자 290만 명에 달하는 피식대학은 지난해 백상예술대상 작품상(TV 예능 부문) 수상자다. 미디어의 주역이 공중파 TV에서 유튜브라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이들의 성공과 추락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뉴미디어의 명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누구나 자유롭게 콘텐츠를 만들어 올릴 수 있게 되면서 금기를 부수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탄생하는 한편,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 허위 정보 또한 범람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통적인 매체들은 기자들의 자질을 검증하고 기사를 취사 선택하는 상당한 수준의 장치를 거친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보도에 적합한 표준어를 사용하고 상대적으로 정제된 영상 콘텐츠를 제공한다. 사전 심의도 거친다. 그러나 유튜브 콘텐츠들은 이러한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업로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인 미디어 등 소수에 의해 만들어지는 콘텐츠가 많아 자체 감시 기능도 무력하다. 여기에 조회 수 장사를 위해 자극만을 쫓다 보니 자극의 수위, 언어의 수위도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아무 말 대잔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 표현마저도 거침없이 쏟아진다. 특히 양극화된 진영 정치와 맞물린 유튜브 저널리즘의 폐해가 크다.
한국인의 유튜브 사랑은 대단하다. 한국의 유튜브 월간 사용자 수는 4,500만 명을 넘어섰다. 1인당 월평균 사용 시간이 43시간으로 종주국인 미국(24시간)을 크게 앞선다. 유튜브 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발표(2023년)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53%가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접하고 있다. 이는 1년 전 같은 조사에 비해 9%포인트 증가한 수치이며, 46개 조사 대상국 평균인 30%를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유튜브는 어느새 한국의 정치적 담론을 좌우하는 핵심 매체로 덩치를 키웠다. 정치인이나 정부 인사가 직접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견해를 밝힐 만큼 영향력이 커졌다. 불행한 건 이 엄청난 영향력이 정치의 양극화와 증오 정치를 심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를 무럭무럭 키워내는 숙주 역할도 하고 있다.
마법 같은 알고리즘으로 같은 편만 끌어들이는 유튜브 저널리즘. 확증 편향에 빠진 구독자들을 위해 맞춤형 콘텐츠들이 만들어진다. 여기엔 팩트 체크도 언론의 균형도 없다. 내 편의 구미에 맞는 증오와 혐오의 말들이 난무할수록 환호를 받는다. 환호가 곧 조회 수로 반영되며 그만큼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다 보니 점점 더 편향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향해 질주한다. 칼날 같은 말들이 여과 없이 쏟아진다. 거짓말, 이간질, 악담…. 입으로 짓는 죄, 구업의 정의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이 엄청난 구업을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스럽다. “화살은 심장을 관통하지만, 말은 영혼을 관통한다”고 했다. 스페인 격언이다.
김동률|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 대학교(Univ. of South Carolina)에서 매체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YTN』, 『KTV』 등에서 시사 프로그램 앵커로 활약했으며 현재는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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