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단행본이다|숲과 인간의 생존 프로젝트

자연은 단행본이다

남효창
(사)숲연구소 이사장


지구의 어느 편에 살든 현대인의 생활은 모두가 비슷해졌다. 스마트폰과 SNS, 획일적인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점에서도 그렇고, 자연을 인위로 전환해 생산하고 소비하는 농작물도 그렇다. 택배 기사를 만나는 것도 과학은 드론으로 간단히 해결해버린다.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과학문명의 맹신자들만 이 시대를 풍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술 문명을 열성적으로 맹신하는 신도가 아니라면,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독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전 지구의 인류를 한곳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과학기술은 어떠한 종교도 어떠한 이념도 무참하게 짓밟고 거침없이 나아간다. 더 이상 국가도 민족도 큰 의미가 없다. 포켓몬은 언어도 국경도 다 걷어치우고 인류의 불운한 방향성만 제시하는 듯하다. 과학의 발전 방향과 인간의 욕구가 서로 접점을 찾은 것일까. 호기심에 가득 찬 인류의 본성이 과학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 - 획일성, 초고속성, 편리성, 합리성 - 이 맞는지 나는 묻고 있다.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시대 변화에 대항할 생각은 없다. 요구되어지는 변화들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기에. 다만 스스로 내 두 눈으로 사물을 보는 법과 스스로 자신의 마음으로 사물을 느끼는 법과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살펴보는 유전자는 점점 퇴화되어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소외감 때문이다. 매일매일 주어지는 내 시간의 일부만이라도 떼어내어 나 자신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다. 그것은 하루의 아주 조금만이라도 탈합리성, 탈획일성, 탈편리성이다. 스스로 보고,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마저 포기한다면, 이 삶이 로봇과 무엇이 다른가.

지난봄, 나는 옥수수 몇 알을 땅을 파고 묻었다. 몇 주가 지나자 땅을 뚫고 작은 잎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마치 죽순을 축소해놓은 모양이다. 태양빛을 향해 강렬한 삶의 의지를 내보였다. 물론 내가 관찰할 수 없는 범위이지만, 잎을 내기 전 이미 땅속에서는 삶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연약한 뿌리들이 땅속 단단한 돌들을 헤쳐가며 세상과의 만남을 끈질기게 두드렸던 것이다. 그 연약한 뿌리가 마침내 물을 찾고 자신의 신체적 균형을 찾은 다음,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이 잎은 하늘을 향해 쏜살같이 자라 올라왔다. 빛은 무관심하게 땅으로 떨어지지만, 옥수수는 그 빛을 자신의 에너지원으로 삼는다. 나는 매일같이 병아리가 닭으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듯 옥수수가 자라는 광경을 지켜본다. 잎과 마디 사이로 가는 줄기가 올라오더니 새로운 잎 한 장을 내밀고, 줄기가 또 자라 이제는 반대편에 또 한 장의 잎을 내밀 때쯤, 처음 나왔던 잎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시들어 떨어졌다. 옥수수가 점점 높이 자라면서, 뚜렷한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잎을 한 장씩 내놓은 그 자리엔 대나무 마디처럼 마디가 생겼다. 마디마다 한 장의 긴 잎들이 생긴다. 계속해서 새로운 마디가 자라고 새로운 잎이 돋는다. 그 잎들은 서로 반대편 방향에서 자란다. 그러니까 위를 향한 긴 갈 지(之) 자 모양의 잎이 연속으로 나오게 된다. 높이 생장이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여길 때, 옥수수는 자신의 줄기를 굵게 만들기 시작했다. 키와 굵기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판단이라도 한 것일까? 옥수수의 가장 위쪽 꼭짓점에서 잎도 아니고 줄기도 아닌, 꼬리 같은 긴 무엇인가 여러 가닥으로 자라 올라왔다. 다 자란 길이가 대략 15~20cm였다. 자세히 보니, 좁쌀보다도 작은 무수히 많은 연둣빛의 열매 같은 것이 깨알같이 붙어 자라고 있었다. 수꽃이었다. 옥수수에 대략 10개의 마디가 생겼을 때, 마디에서 자라 나온 잎은 더 길게 자랐고, 몇 날이 지나고 나서, 위에서 4번째, 5번째 마디와 잎 사이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마치 가는 실 같은 것이 여러 개가 자라기 시작했다. 실 같은 것은 길게 자라면서 붉은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부풀어 오른 잎과 마디 사이에서 작은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실 같은 모양이 암술이었다. 간혹 6번째 마디와 잎 사이에서도 자라기도 하지만, 대부분 4번째와 5번째 마디에서 옥수수가 열린다. 옥수수는 암술이 수술 아래에서 바람이 불거나 무엇인가의 물체에 부딪히면 소위 풍매화로 수분이 이뤄지고 대부분이 자기 꽃가루를 받는 자가수분으로 자식을 만드는 식물이다. 바람을 이용해서 수분이 이뤄지는 식물의 특징은 코를 자극할 만한 향기도 없거니와 벚꽃 같은 화사한 꽃 색깔도 없다. 자가수분으로 생산되는 식물의 자식은 유전자적으로 거의 모두 모양과 형질을 비슷하게 갖고 태어난다. 옥수수가 이에 속한다. 모두 유전 형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유전자를 변형시키기가 다른 식물의 유전자보다 손쉽다. GMO의 대표적인 식물이 옥수수 아닌가. 일반적으로 식물의 열매가 다 익으면 각자 분리되어 땅에 떨어지거나 멀리 이동하지만, 옥수수는 인위적으로 분리하지 않으면 스스로 옥수수자루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 옥수수란 식물의 특징 중 하나이다. 스스로 분리되지 않고 자루에 붙어 있다는 의미는 한 알 한 알이 스스로 발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옥수수가 자신의 자식을 번식시키는 전략이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규명된 것이 없다. 옥수수 스스로 자식의 번식을 위해 다른 식물처럼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인간이 자신의 자식을 위탁 양육해준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일까? 자연 상태에서는 우리가 식용하는 옥수수란 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옥수수는 기원전 약 5,000년경에 야생에서 자라는 테오신테(teocinte)라는 볏과 식물이었는데, 그 야생 옥수수 테오신테는 옥수수자루에 평균 55개의 알이 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식용하는 옥수수 알은 대략 500~600개 로 많아졌다. 인류에게 주요한 3대 곡물 중의 하나인 까닭에 사람들은 옥수수에 관심을 보이며 개량해온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옥수수는 마디가 있고, 줄기 속이 비어 있다는 점이 볏과 식물의 특징이다. 그런 까닭에 대나무도 볏과 식물에 속한다. 전체 식물계로 볼 때, 벼와 옥수수와 대나무는 먼 남남들이 아니다. 아무튼 우리가 옥수수 두 자루를 먹는다는 것은 옥수수가 일생 동안 생산한 모든 것을 먹는 셈이다. 한 그루의 옥수수는 옥수수 두 자루를 생산한다. 만일 두 자루의 옥수수 중, 한 톨의 옥수수 씨앗을 남겨 땅에다 심으면, 여름에 나는 또다시 두 자루의 옥수수를 얻게 된다.

옥수수란 생물이 변화하는 과정을 관찰하고, 느끼고 그리고 서로 교감하면서 마음속에 생기 넘치는 옥수수의 파릇한 새잎 같은 감성이 돋아나는 것은 빠른 변화를 요구하는 이 시대의 흐름과는 전혀 맞지 않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이 감성을 놓치고 싶지 않다.

(사진 왼쪽부터)
1. 옥수수 암꽃. 옥수수 한 자루를 먹는다는 것은 500~600개의 옥수수 자식을 먹는 것이다.
2. 옥수수 수꽃. 바람에 흔들리면 밀알같이 매달려 있는 수꽃자루에서 꽃가루가 날려 아래쪽으로나 옆쪽으로 낙하한다. 운이 좋은 꽃가루는 암술머리에 떨어지게 된다.
3. 위에서부터 다섯 번째 잎과 줄기 사이에 자신의 귀한 자식을 양육한다.

몇 해 전 참나무 둥치에 토종벌을 키웠다. 일벌들이 어떻게 자기 자식을 양육하고, 탄수화물과 꽃가루를 어떻게 찾아와 꿀로 가공해내는지에 대한 감상적인 관찰을 하고 싶어서였다. 꿀벌이 만들어놓은 꿀을 사람들은 기꺼이 소비하지만 일벌이 어떻게 꿀을 생산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꿀이 진짜냐 가짜냐에 대한 관심만큼 높지 않다. 아니,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실제로 꿀벌의 사생활은 우리 인류의 삶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꿀벌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존적 삶에 무관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순한 계산법으로는 꿀벌은 우리에게 꿀과 밀납만 제공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채소나 과일의 40% 이상을 꿀벌이 제공하며, 육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 안에 멸망할 것이란 아인슈타인의 말은 전혀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가 양봉하던 꿀벌을 다 잃어버리고 빈 참나무통들만 남았다. 정확한 영문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 아무튼 전 지구적으로 꿀벌의 개체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보도나 연구 자료를 쉽게 접하며 산다.

참싸리꽃을 찾아와 꿀 재료를 수집하는 꿀벌. 이미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노련한 벌이다.
사진 제공│숲연구소 박성숙 교수

일벌의 일생은 약 4주가 전부다. 하지만 그 4주간의 삶을 40년보다 더 긴 듯이 살아간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지.

일벌로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 안을 청소하는 파출부 역할이다. 파출부 역할을 완수하면 꿀과 꽃가루를 날라오는 일벌들로부터 그것을 인수해 요리하는 요리사로 직업을 바꾼다. 그리고는 애벌레들에게 먹이를 공급해주고 애벌레들을 돌보는 보모로 승진한다. 이때쯤이면 일벌은 일생의 절반을 산 셈이다. 그다음 직업으로는 애벌레들이 알에서부터 성충으로 자랄 수 있는 요람을 짓는 건축가 역할을 7일 정도 하게 된다. 건축가로서의 기술이 능숙하게 될 때쯤이면, 군 입대 통지서를 받는다. 병정으로서의 역할을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하게 되면, 비로소 집을 나와 꽃을 찾아갈 수 있는 놀라운 춤 기술을 연마한다. 팔자 춤에서부터 몸을 부르르 떠는 기술까지 능숙한 춤꾼이 되면, 마침내 꽃을 찾아 탄수화물과 꽃가루를 수집해 오게 된다. 4주간의 일벌의 일생이 끝나면, 예전에 육각형의 집 속에 자신이 양육한 애벌레들이 자신과 꼭 같은 일생을 살아준다. 개체수가 줄어든다고 판단한 여왕벌은 혼인 비행을 나서고, 수벌들이 함께 창공을 날아 오른다. 여왕벌은 그중 수벌 10여 마리의 정자를 받아 골고루 섞어 다양한 성품의 일벌들을 만들어낸다. 벌들의 놀랍고 신비로운 생활을 통해 만들어지는 꿀. 그것은 자신들의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꿀을 생산하지 않는 벌들은 최소한 인간에게 만큼은 존재 가치가 없다. 실수로 인간에게 벌침이라도 한 대 놓는 날이면 가차 없이 해충이란 목록에 올려놓는다. 불명예스럽게 살아야 하는 지금의 야생 멧돼지처럼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뼛속 삶까지 점령해버린 ‘합리성’만을 따지는 과학기술은 꿀벌의 일생과 옥수수의 존재 의미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인간에게 경제적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것은 재배되고 사육되고 때로는 유전자를 비틀어 기필코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경제성은 경제적이지도 않거니와 합리적이지도 않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만 선별해 대량으로 재배하고 사육한다는 의미는 다른 생물들이 살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뜻이다. 이는 종의 단순화와 종들이 살아가는 서식지의 단순화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막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경제적 기회비용을 따진다면 계산서는 손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시급히 고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자연을 오로지 자연과학적 시각만으로만 바라보는 삶의 태도와 방식이다. 자연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분리할 수 없는 단행본이다.

아이들이 일정한 나이를 먹기 전까지는 아무리 봐도 태양이 돌고 있는 것이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동설로 이해하는 아이들의 감성을 자연과학은 무참하게 짓밟아버린다. 때가 되면 저절로 지동설을 이해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옥수수 밭의 농부가 잡초를 뽑는다. 잡초를 뽑는 그 노동의 의미를 자연과학은 계산하지 않는다.

남효창|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산림생태학을 전공했다. 동 대학 산림환경정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석사(1994년)와 박사(1998년)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임업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을 지냈고, 현재는 (사)숲연구소를 설립해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이 땅에 숲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환경부환경교육 자문위원, 세계생명문화포럼 추진위원, 생태체험교육 전문지『애벌레』 발행인, 한국휴양학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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