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불교의 업사상
안성두
전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붓다는 업을 재생을 위한 결정적인 요소로 여기지 않았다
업(karman)이란 행위를 의미하며, 업의 교설은 이런 윤리적 행위가 인과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업설은 불교를 포함해 인도사상의 근거가 되는 이론이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점이 많다.
최초의 베다 문헌인 『리그베다』에서 생명의 순환이나 재생 과정이 초보적인 방식으로 설해져 있지만, 그것이 행위와 관련되어 설해진 것은 제의 문헌에서였다. 거기서 규칙에 맞게 준수된 제의적 행위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원하는 결과를 불러온다고 하는 관념이 나타났고, 이는 제의 행위(=원인)와 원하는 천상에서의 재생이라는 결과 사이의 인과적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미래의 재생이 단순한 제의 행위가 아닌 윤리적 행위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는 관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초기 우파니샤드에서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베다 전통과 독립해서 등장했던 사문(沙門) 전통에서였다. 특히 사문 전통에 속하는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아지비카(Ājīvika) 전통에서 업은 강한 윤리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들은 베다의 의례적인 동물 살생 대신에 불살생(ahiṃsā)을 강조했고, 또 강한 고행주의적 경향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학자들은 인도사상에서의 이러한 변화를 “재생 모델의 윤리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록 불교가 자이나교나 아지비카와 업이나 재생에 대해 비슷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업의 경우를 예를 들면 자이나교에 있어서 윤회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업이다. 그들은 업이란 미세한 물질적인 요소로서 순수한 영혼에 달라붙어 그것을 오염시키고 부자유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업의 제거를 일차적인 종교적 수행의 목표로 삼았다. 업은 행위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음에 의해 더 이상의 업이 축적되는 것을 피하거나 또는 고행을 통해 축적된 과거의 업을 소멸시키는 길을 가르쳤다.
반면 붓다는 업이 재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재생을 위한 결정적인 요소라고 여기지 않았다. 만일 업이 고통스러운 윤회전생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서 물질적인 것이라면, 사실상 윤회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시이래의 윤회에서 우리가 쌓은 업은 양적으로 무량하기에 이를 제거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붓다는 이런 유형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업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다.
하나는 업을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고, 오히려 심적 요소가 업의 형성에서 주된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불교는 업을 3종으로 나누어, 심적 행위로서의 의업(意業)이 가장 중요하고, 물질적인 속성을 가진 신체 행위(身業)와 언어 행위(口業)는 의업에서 나왔다고 해석한다. 업이 심적 의도에서 나온 행위, 즉 사업(思業)이라면, 우리가 어떤 이를 죽이겠다는 심적 의도를 가진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살생의 업을 범한 것이 된다. 이는 후대에까지 지속되고 강조된 불교 윤리의 특징으로서 동기주의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업이 윤회 생존의 일차적인 원인이 아니라 이차적인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사성제의 교법이 붓다의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경』에서 설해졌고 여기서 고통의 원인이 갈애라고 규정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런 관점은 처음부터 붓다의 이해였다고 보인다. 갈애란 모든 형태의 윤회 존재를 갈망하는 부정적인 심리적 요소로서 이것이 바로 윤회의 일차적 원인이다. 따라서 갈애든 아니면 탐·진·치든 간에, 번뇌는 심리적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의 제거는 마음의 훈련에 의해서도 온전히 가능할 것이다. 이후의 가르침에서 업도 윤회의 원인에 포함되고 있지만, 그 효력은 번뇌에 의해 촉발된 윤회 존재 내에서 그 구체적인 존재 양상을 규정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후대 세친(Vasubandhu, 약 4세기)의 표현에 따르면 “업은 세간의 다양함을 낳지만, 그 업들은 번뇌의 힘에 의해 적집되며, 번뇌가 없다면 윤회 존재의 산출은 가능하지 않다.”
업의 작용 기제에 대한 이해 방식에 따라 불교학파들 간의 이론적 차이 나타나
이와 같은 업에 대한 두 가지 이해는 불교의 업설을 특징지어주는 것으로 후대 아비달마 전통에서 계속해서 발전되었으며, 특히 행위의 인과성에 대한 고찰은 연기설의 맥락에서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이때 가장 커다란 논란을 야기했던 것이 무아설의 맥락에서 어떻게 업의 지속성을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무아설이 반본질주의로서 불변하는 행위자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행위자로서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무아설의 맥락에서 어떻게 업의 지속성이 가능한가의 문제 제기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여기서 깊이 들어갈 여지는 없지만, 불교학파는 이를 세간도와 출세간도의 구별에 의해 해결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해 무아의 경험은 궁극적인 열반의 증득을 위해서이며, 반면 업의 이론은 세간도의 맥락에서 윤회 존재의 양태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것이다. 이때 업의 양태나 종류, 발현 방식 등은 여러 불교 전통에서 커다란 차이 없이 설해졌다고 보이지만, 가장 큰 이론적 난점은 업이 어떻게 미래에 그 효력을 전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문제였다.
사실 이는 불교 전통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업설을 받아들인 모든 인도사상 일반이 직면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유신론적으로 이를 설명하려고 했던 요가학파는 업과 그 과보의 전달을 자재신의 권한으로 돌렸지만, 역설적으로 자재신의 역할이 단지 중생들의 업을 판별하고 그 과보를 정하는 데 있다면, 이는 사실상 신이란 업의 법칙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기에 구태여 전제할 필요도 없는 잉여적인 존재일 것이다. 나아가 불교 전통에서 그러한 절대적인 신의 존재는 인정되지 않기에 업이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는 길은 중생들의 마음을 빼고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업의 작용 기제에 대한 이해 방식에 따라 불교학파들 간의 이론적 차이가 나타나며, 유식학파의 고유한 설명도 역시 이를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달려 있다. 아래에서는 조금 전문적이긴 하지만 유식학파의 고유한 12지 연기 해석을 통해 독자적인 업설의 내용을 살펴보자.
유식학파의 12지 해석은 이세일중의 인과설
12지(支) 연기에 대한 유식학파의 해석은 유부의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설이 아니라 이세일중(二世一重)의 인과설로서 보통 알라야식 연기로 알려져 있다. 12지는 주지하다시피 (1)무명 (2)행 (3)식 (4)명색 (5)6입 (6)촉 (7)수 (8)애 (9)취 (10)유 (11)생 (12)노사이다. 유부의 삼세양중이란 12지를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삼세에 배정하고, 여기에 속한 12지가 이중 인과의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조금 자세히 설명해보면, (1)과 (2)는 과거 생에 속한 원인이며, (3)~(7)은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현재 생에서 받은 과거 업의 결과이고, (8)~(10)은 현재 생에서 원인적인 요소이며, 마지막 (11)과 (12)는 그 현재 생의 원인에 의해 초래될 미래세의 결과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윤회의 원인은 번뇌와 업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에 12지 연기의 구도에서도 (1)과 (8), (9)는 번뇌이고, (2)와 (10)은 업을 나타내며, 나머지는 결과로서의 생을 나타낸다. 이렇게 본다면 전체로서의 유부의 12지 연기의 해석은 삼세의 윤회 과정 속에서 개체 존재가 ‘번뇌→업→생’의 방식으로 끝없이 반복해서 순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유식학파의 12지 해석은 이세일중의 인과설이다. 유식학파도 유부의 아비달마 용어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윤회의 원인이 번뇌와 업이며, 재생의 여러 측면들이 그 결과라는 데에는 일치하고 있다. 차이는 그것들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에 있다. 『성유식론』의 설명에 따르면 (1)무명과 (2)행의 두 지(支)는 뒤따르는 (3)~(7)까지의 다섯 지를 인기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능인지(能引支)이고, (3)~(7)의 다섯 지는 그것들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소인지(所引支)라 불린다. 반면 (8)~(10)의 세 지는 재생을 산출하는 작용을 하기에 능생지(能生支)이고 마지막 두 지는 그것들에 의해 산출된 것이기 때문에 소생지(所生支)이다. 여기서 (1)~(10)까지는 현재세에 포함되어 있고, 마지막 두 지만이 미래세에 포함되어 있기에 2세의 인과만을 설하고 있다.
이 설명은 ‘능인(能引)’이라는 전문 술어를 포함하기 때문에 이 개념을 알지 못한다면 유식학파의 관점이 대체 무엇인지가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능인’이란 종자를 이끈다는 의미이다. 즉 무명과 행의 두 지가 식 가운데 종자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명색~수를 이끌어내며, 그리고 그 종자는 (8)~(10)의 세 지를 원인으로 해서 내세에 재생할 때 현실태로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3)의 식지에 초점이 모이며, 식은 유부에서처럼 더 이상 과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일체의 종자로서 원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알라야식을 가리킨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 전체 과정에서 업의 역할은 먼저 (2)행으로서 알라야식 속에 저장된 종자를 인기하는 작용을 하며, 다음으로 (10)유로서 미래의 과보의 산출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이러한 설명은 어떻게 업의 작용이 번뇌에 의해 영향을 받아 재생 과정에 종자의 형태로서 관여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일체의 종자를 가진 식으로서의 알라야식은 한편으로는 개체의 신체적 요소와 융합함으로써 그것을 자기화하는 작용을 하며, 또 다른 편으로는 정신적인 집착의 의미에서 표층적인 자아를 넘어 심층적인 근저에 있는 근본 의식으로 기능한다. 그러한 심층적인 마음이 업의 종자라는 과거의 업의 잠재력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유식학의 업설의 특징이 있을 것이다.
안성두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불교철학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독일 함부르크대 인도학연구소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금강대 및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역서로 『불교의 무의식』, 『보성론』, 『보살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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