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업(業)
- 누구도 화와 복을 주지는 않는다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인간은 불평등하다. 왜? 신의 창조 때문에? DNA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제각각이다. 우선 태어나는 배경부터도 차이가 크다. 흔히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것만 봐도 엄청난 불평등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유복한 집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하고 순탄한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버림받거나 어려운 집에 태어나 어둠의 길을 걷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빼어난 용모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데 비해 어떤 사람은 보잘것없고 추한 용모로 태어나 평생 기를 못 펴고 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뛰어난 두뇌와 재능을 타고 태어나 그것으로 평생을 편안하게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장애인이나 기형아로 태어나 평생을 불우하게 보내기도 한다. 인류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불평등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러한 불평등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 어리석은 대다수의 인류는 이러한 불평등을 자기가 믿는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거나 순전히 우연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런 불평등이 아무 원인 없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모든 것은 자기들의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나는 것도 다 자기들의 신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종교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의 불평등을 설명하지 못한다. 누구는 멀쩡하게 태어나는데 누구는 신체적 불완전을 감수해야 하는가? 유일신이나 창조주를 믿는 사람들은 선천성 기형아나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를 보고 하는 말이 기껏해야 신의 은총과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대해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 잔인한 짓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불평등을 우연이나 조물주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태어나면서부터의 불평등을 조물주나 우연에 돌려버린다면 굳이 착하게 살 필요도 없고 도덕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현대 과학자들은 태생에 대한 이러한 불평등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들은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해 이러한 불평등을 화학 물리적 원인, 유전 및 환경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DNA라는 것이 인간의 모든 형질을 결정하는 주원인이라고 본다. 즉 유전자에 의해 인간의 미추가 결정되고 성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유전자의 조작에 의해 인간의 모든 형질과 특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과학자들의 입장이다. 실제로 유전학자들은 유전자 조작에 의해 동물을 복제해내기도 하고 다른 형태의 동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람도 유전자에 의해 부모의 특질을 물려받는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이 닮기도 하고 형제간에도 비슷한 점이 많다. 가끔 좀 다르게 생긴 자식이 태어나기도 하지만 친가나 외가 쪽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그런 형질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었던 경우가 더러 있다. 그렇지만 일란성 쌍둥이라도 어릴 적 헤어져 완전히 다른 삶을 살다가 다시 만나는 경우도 있고 완전히 성격이 다르기도 한다.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DNA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화학적 물리적 현상이 부분적으로 인간의 태생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개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차이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을 수 있을까? 유전자에 의해 가족이 신체적으로 비슷하고, 같은 환경 아래에서 양육되어도 다른 성격에 다른 삶을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같은 형제라도 누구는 선량하고 누구는 포악한 경우가 있다. 유전만으로는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차이점보다 약간의 유사점을 더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는 인간의 일부, 즉 신체적 기초만을 설명해줄 수 있다. 그러나 더 복잡하고 미묘한 정신적, 지적, 도덕적 차이와 관련해 우리는 더 많은 원인을 찾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유전 이론만으로는 훌륭한 가문에서 흉악한 범죄자가 나오기도 하고 미천한 가계에서 성인이 나오는 등의 설명을 하기에는 미흡하다. 어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예능에 소질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현저한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선량한 부모 밑에서 온순한 아이가 있는 반면 어떤 아이는 형제를 괴롭히는 난폭한 아이로 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를 오직 유전자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다.
운명의 향방에는 업의 작용이 있다…
업은 인과의 법칙을 드러내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명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면 업(業)에 따른 인과와 윤회 전생(轉生)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적 관점으로는 이러한 차별상은 유전, 환경 등 겉으로 드러난 요인뿐만 아니라 운명의 향방에는 업의 작용이 있다고 본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같은 형제라도 각기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이 물려받은 과거의 행동과 현재의 행동의 결과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것이 불교의 업에 대한 기본 개념이다. 그러나 업이라고 하면 뭔가 칙칙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것은 업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것으로 업이야말로 인과의 법칙을 드러내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명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업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카르마(karma)라고 하고, 팔리어로는 캄마(Kamma)라고 하는데 의지를 가진 행위를 말한다.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지 작용을 업이라고 한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그것이 업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이 업이다. 한마디로 업은 자기의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지은 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나쁜 업에는 괴로움을 당하는 나쁜 결과가 따라오고 좋은 업에는 즐거움이 따라온다. 이것을 선인선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지은 업은 자기가 반드시 그 결과를 받아야 한다. 이것을 자작자수(自作自受),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책임이 있다. 우리의 과거의 업이 우리의 태생의 기본을 형성하지만 매 순간 지어가는 업의 작용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괴로운 것으로도 행복한 것으로도 만들어갈 수 있다. 『담마파다』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이 업을 짓는 주체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괴로움도 만들고 즐거움도 만들어간다. 즉 우리는 우리가 지어놓은 업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운명을 만들어간다. 조물주나 신이 내 운명을 결정해주는 것이 아닌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의 운명을 결정한다. 업이라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개척해 나아갈 수 있고 성불을 향해서도 나아갈 수 있다.
업은 과학적 원리이면서 도덕적 인과의 법칙이다. 업이라는 것이 없고 그 과보가 없다면 세상은 너무 엉터리로 굴러갈 것이다. 우리가 윤회를 거듭하는 것은 업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업과 윤회는 모두 불교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업과 윤회의 개념은 붓다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인도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었다. 그 당시 인도 전통의 업에 대한 개념은 숙명적인 것이며 계급 제도에 사람들을 얽어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인도에서는 네가 업을 잘못 지어 하천한 계급에 속하게 되었으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하는 일에만 전념해 너의 업보를 씻어야 한다고 가스라이팅을 해왔다. 지금도 인도 사람들은 업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계급 제도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얽매여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숙명론이다. 그러나 업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완전하게 만든 것은 붓다였다. 불교는 업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해탈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깨달음에 의해 업의 굴레를 벗어버린 부처와 아라한은 업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어둡고 칙칙하며 숙명적인 업에 대한 개념을 불교에서는 밝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업의 개념으로 바꾸어놓았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로 형성되는 업과
자연과학적, 물리적 업의 형성 등에 대해서는 구분
따라서 불교에서는 인간이 업이라는 굴레에 묶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을 경계한다. 예를 들어 지진이나 태풍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죽게 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이 지은 업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업의 작용에 대해 인간의 의지로 형성되는 업과 자연과학적, 물리적 업의 형성 등에 대해서는 구분을 하고 있다. 물론 자연재해가 나는 곳에 가 있었던 자기의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행위라는 업력에 의해 전적으로 자연재해를 당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오죽하면 ‘업력 불가사의’라고 해 완전히 깨달은 붓다만이 그 업력의 모습을 바로 본다고 했겠는가!
만약 현재의 삶이 우리의 과거의 행동에 의해 완전히 조건화되거나 완전히 통제된다면, 업은 확실히 운명론이나 사전 결정론과 같게 되어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유의지는 터무니없는 것이 될 것이며 삶은 프로그램화된 기계적 조작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고 미래를 지배하는 전능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든, 아니면 우리의 자유로운 행동과 관계없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고 삶의 과정을 통제하는 거부할 수 없는 과거의 업에 의해 창조되었든 이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두 힘의 궁극적인 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창조주를 믿는 종교나 힌두교의 업은 숙명론, 혹은 결정론이 되어버린다. 업을 잘못 이해하면 숙명론이나 결정론이 되어버려 인간의 의지나 행위가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신의 예정대로 살아야 한다든지 과거의 업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숙명론이나 태어난 연월일시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주나 명리 등의 결정론을 불교는 배척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적인 틀은 과거의 생각이나 행위에 의한 업력에 좌우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업력에 개입하는 물리적, 자연적 요소들도 일부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재해 등에 의해 피해를 입는 경우 그것을 반드시 업력만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업을 형성하는 것은 대부분이 우리의 생각과 행위에 의한 것이므로 항상 선업을 축적해 악업의 형성을 막고 미래의 불행을 방지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다. 좋은 업은 즐거운 과를 낳고 나쁜 업은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선인낙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라는 업의 성질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과 미래를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업에 대한 바른 인식을 배제하고서는 불교를 말할 길이 없다. 업과 윤회는 태생적 불평등을 설명하는 합리적 이론이면서 불교에서 강조하는 필수적인 믿음이며 도덕적 기반이다.
• 이번 호를 끝으로 <불교란 무엇인가 | 불교, A에서 Z까지> 연재를 마칩니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총지종 교육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으로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담마빠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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