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사람의 길은 무엇인가 | 생태 위기의 문명과 불교사회인의 길

말 못하는 중생의 눈빛으로 전하는
오늘의 정의

김규칠
언론인


존재의 대상화와 그 결과
인간은 초기에는 생물을 고등과 하등의 관념으로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귀천이나 주종 등 분류와 차별의 구분도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씨족이 커지고 부족화를 거치며 종족주의 단계에서 급속하게 구분과 차별의식의 내면화와 사회화를 보이며 변화했다.

나와 남, 안과 밖, 주체와 객체 등으로 구분하는 의식과 행위를 ‘존재의 대상화’라고 할 수 있다. 대상화는 대상의 수단화 도구화로 이어진다. 대지를 황폐화하고 동물을 노예화하는 것은 대상화의 결과이다. 인간성 상실과 생명 경시도 존재의 대상화 수단화가 몰고 온 것이다. 『금강경』은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지적하며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四相)을 여의라”라고 되풀이하고 있다. 나와 상대, 남과 다중에 대한 분별의식을 벗어나고, 일체 얻을 것 없고 이룰 아무것도 없는 보살의 길을 가라고 했다. 참된 공덕과 복은 상을 여의는 길임을 일러주고 있다. 상을 여의는 것은 상이 상 아님을 깨닫는다는 것과 같다. 이는 불교의 핵심을 바로 일러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핵심 사상을 신화 시대 이전의 야생의 사고 내지 신화의 저변에 있는 무의식적 사고와 연결해 불교를 야생의 사고가 고등종교로서 재탄생한 것이라고 보는 인류학자도 있다.

사유의 수양 필요
그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분별을 넘어 분별하지 않은 경지’가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고 무지몽매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전래되어온 관습과 윤리 도덕이 요구하는 사리분별의 능력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넘어서거나 대자연과의 관계나 사회관계, 국가와 지구적 차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분별이 있다는 것’과 ‘분별을 넘어서 모든 분별상을 벗어난 경지’가 어떻게 다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사유의 수양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금강경』의 말씀이 등장하게 된 것이리라. 사실 『금강경』 말씀은 너무 시대를 앞선 면이 있었다. 그래서 수보리도 걱정이 되어서 ‘말씀을 듣고 알아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물었다.

붓다의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역사 속의 사태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먼 과거인 고대를 잠시 접어두고 중세에서 현대까지 주객 분별 관념이 변화해온 과정을 보자. 중세의 암흑기와 전제정 시대에는 세계 속의 인간의 주체 의식, 국가 속의 국민의 주권 내지 주인 의식이 없었다. 절대자로부터 독립한 자율적 인간의 자각에 이르지 못하고, 기본적 인권과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의식도 성숙되지 못하던 상황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비로소 신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주체적 인간 존재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국가사회에서 권력자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필요성을 인식한 분별력도 확립되어왔다. 말하자면 신과 신의 대리자 중심 지배하의 합리성 없는 주객 분리 이전의 차원에서 합리성을 따지는 근대적 의미의 주객 분리와 주체적 사리분별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차원으로의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동식물을 분별이나 차별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권고하며 격려할 수 있는 단계
그러나 지금의 현대적 상황은 근대적 상황과도 많이 달라졌다. 과연 근대적인 의미에서 개별적인 주체와 주체의 분리와 갈등과 대립이 현대적 상황에서도 바람직한 것인가, 검토와 성찰을 필요로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종전처럼 지배하고 통치하는 특수층, 권력층이 따로 있고, 보통 국민은 규제와 처분 대상자로 수동적 위치에서 기껏 호소나 항의나 할 뿐인, 그런 모양새로 계속 천년만년 살아갈 것인가? 돌이켜 간추려 보면 전근대는 높고 강력한 주체가 다른 모든 걸 포섭하고 장악하거나 주체와 주체가 서로 밀착해 무분별의 ‘뭉침’의 시대였다. 근대로 들어와서는 주체와 주체가 개별화와 각개 독립의 길로 나아가다가 갈라지고 떨어져 갈등과 마찰을 빚었다. 그리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는 내면과 외면 모두가 분리와 단절을 경험하고 오직 이해타산으로만 결합하다가 나중에는 갈등과 싸움판으로 변해가는 양상이 비일비재하다. 인문학자들은 전근대적 단계의 합리성을 모르는 영성의 시기에 서로 붙어 있던 주체들이 합리성을 알고 따지며 자꾸만 내심 서로 떨어져가는 주체(평등한 개인)로의 근대적 변화를 거쳐 이제는 갈피 잡기 힘든 상황으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면 무지몽매한 무분별로 돌아가지 않고 현대적 상황을 극복하며 합리성을 넘는 영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갈등하던 각개 작전의 주체가 서로 화합할 수 있는 단계로 변화 발전할 수 있을까? 과거 암흑기의 무분별도 해답이 아니며, 근대적 분별도 해답이 아니란 걸 알아차려가고는 있다. 변화와 발전이 가능한 방향을 모색하기를 희망하지만, 『금강경』의 사상을 여의라는 가르침이 그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불보살처럼 다른 사람을, 다른 모든 중생을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위한다는 의식 없이’ 돕고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당장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가능할 것이다. 우선 다른 건 몰라도 주변의 식물과 가축이나 동물에 대해서 분별이나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권고하며 격려할 수 있는 단계는 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진 사람의 길
과거 전제군주가 토지를 비롯해 나라 안의 모든 것은 자기 물건이고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현재 사람들이 동물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전제군주보다 더 혹독하게 함부로 다루고 있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자비한 사람들이 상업적 선별 기준에 따라 가축들을 생산 공장의 불량 제품처럼, 아니 폐기물처럼 처리하는 작업들을 자행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불교인들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붓다께서는 이미 2,500년도 더 전에 어진 사람의 길이 무언가를 일러주셨다. 아무리 많은 보배를 가지고 치장을 하고 신분과 계급이 높아 정신적 물질적으로 잘산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무리 경제와 군사 등 부국강병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교적으로 보면 큰 공덕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과 생명, 그 실존 사이의 관계는 함께 있어도 각자 있음들 끼리의 관계일 뿐이지, 진정한 만남과 소통은 없기 때문이다. 있음은 그저 각개 작전 각자도생의 있음일 뿐이다. 정신적으로는 홀로 따로 떨어져 있음이다. 마음으로부터 서로 오고 가는 응답이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삶에는 고독과 불안, 외로움과 공허가 늘 따라다녔다.

여기에서 제일 먼저 제기되는 물음이 중생의 세상에서는 ‘진리와 올바름으로 날을 세운 정의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과 용서가 함께하는 정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있을 수 있다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거나 ‘하나의 질서로 뭉치고 동일한 체계로 통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넘어서 포용과 배려의 지혜를 발휘해 조화와 융합으로 나아가는 길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이 『금강경』의 말씀이었다. 그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면, 말 못하는 짐승과 연약한 존재에 대해 원래 지니고 있던 어진 마음, 역사적 의미로는 새로운 종교적 영성을 회복해, 인간과 다른 대상물이나 도구로 구분하는 상대화를 넘어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았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동물에 대해서만이라도 근대적 차원이었던 상호성의 원리를 넘어서 인간의 일방적 책임성을 자각해 순수증여의 마음, 즉 불교적 의미의 무주상 보시의 마음으로 그들의 생리대로 삶의 터전을 회복하고 보장해줄 수 있다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보인다. 다시 말하면 최소한 말 못하는 동물과의 관계에서만이라도 자비, 즉 사랑이 인도하는 정의의 과제가 진리와 올바름으로 날을 세운 정의의 문제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추상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따스함이 깃든 구체적 만남과 응답이 함께할 것이다. 이럴 때는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짐승도 응답할 것이다. 무심한 듯한 표정, 그들의 스치는 듯 지나치는 알 수 없는 눈빛에 무주상의 붓다가 함께하고 있다. 붓다와 그들은 무주상이기에 우리 인간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 모든 중생의 마음과 함께하는 붓다의 마음도 있다고 믿는다.

김규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동 대학 신문대학원을 졸업하고, 비엔나대학과 와세다대학에서 연수를 마쳤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18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BBS불교방송』 사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가 필요하다』, 『활생문명으로 가는 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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