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은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다 | 불교, A에서 Z까지

열반,
불교의 궁극적 목표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종교마다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가 있다
모든 종교에는 궁극의 목표가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교리상으로 차이는 있지만 교리에 충실하고 율법을 따르고 신의 말씀을 따를 때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고 이 과정을 통과하면 죽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천국에 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형태를 통해 신이 인간의 죄를 판단하고 거기에 합격한 자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죽어서 천국에 이르러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본질적 목표이다. 천국의 개념은 자칫하면 이생에서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도 해 극단적인 경우에는 순교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기도 한다. 자살 폭탄 테러와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세계 종교의 하나로서 큰 축을 이루고 있는 힌두교의 경우에는 어떠할까? 우선 카마(Kama)와 아르타(Artha)의 개념을 통해 현실 세계를 인정한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적 본성을 인정하면서 현실 세계를 긍정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궁극적인 행복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 혹은 도덕률의 준수를 의미하는 다르마(Dharma)를 통해 개인의 쾌락(kama)이나 사회적 성공(artha)이라는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모든 이의 행복을 추구할 때에 영원한 해탈인 목샤(Moksa)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정서적인 충동을 의미하는 카마와 소유 본능인 아르타는 삶의 일시적 목표는 될 수 있지만 영원한 괴로움으로부터의 극복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힌두교의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르마의 준수와 종교적 수양을 통해 인간의 세속적 관심과 정신적 자유가 조화를 이루어 영원한 해탈을 의미하는 목샤에 도달하는 것이 힌두교도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목표이다. 이것이 바로 힌두교도의 캐치프레이즈인 ‘참된 나인 아트만이 우주의 진리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힌두교는 나의 마음의 움직임조차도 신의 작용으로 보며 브라흐만의 신격화와 그에 따른 부수적인 무수한 신들의 등장으로 인해 오히려 신에 얽매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또한 참된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아트만에 집착한 나머지 진리와 합일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아트만이 오히려 지켜야만 하는 아트만이 되어버림으로써 영원히 참된 진리에는 이르기 어려운 모순에 빠졌던 것이다.

동양권의 도교나 유교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의 생각은 인간이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대자연과 더불어 막힘없는 삶을 사는 것이었을 텐데 이후에는 민간신앙 및 신선 사상과 결부되어 불로장생이라는 이루지 못할 꿈만을 쫓는 종교가 되었다. 유교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를 완성해 군자가 되고 남에게 덕행을 미치도록 하는 것으로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향한 실천에 중점을 두고 있어 매우 현실적인 듯하지만 오히려 인간 자체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본성에 대한 이해가 미흡해 이제는 철이 지난 단순한 사회 규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굳이 종교적 범주에도 넣기 어려울 것 같다.

괴로움을 벗어난 열반의 경지가 불교의 목표이자 이상
그렇다면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불교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즉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이 바로 그것이다. 삼법인에서 말하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이 곧 이것으로서 불교의 궁극의 목표이며 최후의 이상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깨닫지 못한 무명중생의 생사윤회의 상태가 일체개고라면 생사를 초월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성자의 상태가 열반적정이다. 사성제 가운데의 멸성제로서 갈애를 멸해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괴로움을 멸한 경지를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해탈이라고도 하며 괴로움을 멸한 안온한 경지가 열반이다.

불교의 시작도 생로병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고타마 싯다르타의 초인적인 노력에 의해 괴로움의 이치와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이 발견된 것이다. 붓다께서는 그것을 고집멸도의 사성제로 표현했으니 괴로움의 실상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이 멸해진 안온한 상태, 그리고 그 안온함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팔정도를 제시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신을 섬기거나 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전개되고 있고 지금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것이다. 불교에서 목표로 하고 있는 해탈과 열반은 죽어서 얻게 되는 하늘나라의 영생이 아니다. 지금 당장의 나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를 따지는 지극히 실존적이고 현생적인 것이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괴로움의 해결에 신의 작용은 없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나의 괴로움의 해결에 신을 개입시키는 것은 마치 얼굴도 모르는 미인을 사모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도 이런 미망에 사로잡혀 괴로움의 근본적인 모습과 그 해결책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길을 더듬고 있다. 괴로움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해야 하는 어려움보다는 신이라는 허상을 설정해 거기에 매달리고 맹목적 추종을 하다 보면 우선은 일시적인 행복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괴로움에 대한 근원적 해소는 되지 못한다.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도 이러한 신 중심의 종교를 보고 비판한 것이다.

열반, 무명과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체득하고 실천하면 누구나 도달
여기에 반해 불교는 철저하게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괴로움의 실상을 파악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은 불교가 탄생한 이래 2,5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원시적인 시각에서 설정된 신의 관념이 과학과 이성의 발달로 숱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다른 종교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진리라는 것은 시대가 변한다고 변하는 것도 아니며 지역이 달라졌다고 바뀌어서도 안 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변함없는 것이라야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진리라고 당당하게 자부할 수 있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괴로움의 해탈과 그 방법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괴로움은 갈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갈애는 무명을 포함한 일체의 번뇌를 대표한다. 갈애로 인해서 좋은 것과 싫은 것의 분별이 생기고, 좋은 것은 가지지 못해 괴롭고 싫은 것은 제거하지 못해서 화를 낸다. 우리가 싫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욕심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나의 즐거움을 방해하고 나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니까 싫어지고 화가 난다. 그래서 괴로움이 발생한다. 말하자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헛된 욕심을 내고 그 욕심을 이루지 못하니까 화를 내고 거기에 따른 괴로움의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열반적정은 무명과 갈애로 인해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이러한 모든 속박을 떨쳐버리고 심신이 안온한 이상적인 상태를 말한다.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무애자재의 경지가 열반이다. 그것은 번뇌의 근본인 무명을 제거하고 지혜를 밝힘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깨친다는 것도 지혜를 밝혀 무명의 번뇌를 멸하고 무애자재의 경지를 얻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깨친다는 것은 곧 열반적정을 얻는다는 말과 같다.

열반[Nirvāna]이라는 말은 활활 타오르던 탐진치의 불꽃이 수행에 의해 잠잠하게 꺼진 상태를 말한다. 경전에서는 열반을 한마디로 정의해 ‘탐욕이 멸하고 진에가 멸하고 우치가 멸한 것,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탐진치 삼독의 번뇌가 완전히 멸한 것이 열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은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서 아무것도 없는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멸해서 마음이 적정안온의 이상적인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와 무아의 이치를 철저히 체득하고 팔정도를 통해 일상을 이끌어 나아갈 때에 얻어지는 경지로서 누구나 경험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완벽한 해탈은 이루지 못할지라도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면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맛볼 수 있는 것이 불교의 열반이다. 팔정도의 바른 실천을 통해 자기의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볼 수 있을 때에 누구든지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 불교의 열반이다. 그래서 불교는 ‘무조건 믿어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스스로 체득하고 보고 나서 믿으라’고 말한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총지종 교육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으로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담마빠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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