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위기 속 불교사회인의 길

자연의 윤회적 차원을 넘는
불교인의 자각

김규칠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약육강식과 자연사의 먹이사슬을 바라보는 싯다르타의 고뇌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 이전 수천 년 전부터 정주화(定住化)와 국가화, 농업혁명이 일어나 곳곳이 난개발과 대규모 수리 관개 시설로 삼림의 남벌과 사막화가 벌어지고 있었다. 고대 당시로서는 신흥 도시화와 상업의 발달로 한편에서는 상업적 교류와 교역의 증대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전제국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군주국가 코살라와 마가다의 두 강국 사이에서 나름의 외교 책략을 활용해 명맥을 유지해오던 카필라바스투 소국의 왕자, 싯다르타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감수성 많은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람의 관심과 흥미는 누가 시키고 이끈다고 그대로 되는 건 아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주변에 널렸어도 싯다르타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자연이었다. 부왕의 보호와 전통적 훈육도 그의 맑고 건강한 성품이 빚어내는 마음의 행로는 말릴 수가 없었다. 성안에도 바깥에도 하늘과 땅은 있었다. 세상 흐름과 자연의 변화 가운데서 고독과 사색을 즐기던 그의 마음이 가는 곳은 푸르른 대지였다. 푸른 숲과 더 넓은 창공이 한없이 좋았다.

그런 그가 강국들이 약소국을 호시탐탐 넘겨다보는 세상 속에서, 소와 양을 잡아 희생제를 지내는 광경도 보았다. 농부들이 밭을 가는 평온한 일상에서도 벌레들이 쟁기에 베여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새들은 그 작은 생명들을 쪼아 먹고 있었다. 실제 세상 삶에 부딪혀 그의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깊어만 갔다. 강대국들의 벌거벗은 폭력 앞에 전전긍긍하는 약소국들의 비극적 운명과 천지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약육강식의 부조화를 자연사의 먹이사슬이란 한마디 말로 받아들이란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연계의 먹이사슬이라고 하지만 살생이 끔찍한 광경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쫓고 쫓기며 먹고 먹히는 살육과 단말마의 순간이란 결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더욱이 그런 먹이사슬이 인간의 세상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합리한 기존의 관습과 종교와 논리를 뛰어넘다
싯다르타의 고민이 생로병사라는 실존적 인간 본질의 문제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왕의 간곡한 만류, 역사와 전통과 가족과의 이별, 풍전등화 같은 약소국의 운명조차 막지 못했을 만큼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자연사와 인간사의 부조리와 희비극, 풀리지 않은 난제들, 그 여러 가지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해결 난망에 이를 한계 지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짐작하던 영민한 청춘의 뇌리와 뛰는 가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비애와 고뇌로 가득 차 숨 쉬기조차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대지와 인간 세계의 다른 한편에 무서운 일들과 엄청난 모순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 그런 현상이 나라와 나라 사이, 계급과 계급 사이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사이, 일상의 인연과 사건에서도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연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먹고 먹히는 현상이 비록 본능에 따른 것이라 해도 안타깝고 슬픈 일이거늘, 하물며 인간의 행태가 정글의 세계처럼 약육강식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기성의 관념과 제도들이었다.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와 비극을 적당히 합리화하고 있는 기존의 관습과 종교와 논리들이 너무도 불합리하고 불철저하며 불성실, 무자비, 무책임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에는 자기의 조상과 조국을 포함해 모든 역사와 전통과 관습에 연루된, 대단히 오래되고 고질적인 인류사의 본질적 문제가 깊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없는 긍정과 부정, 회의와 천착과 각고의 노력 끝에, 설사 성벽의 너머, 저 바깥세상에 비록 해답이 없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죽음에 이를 절망이 이토록 바닥 모를 심연처럼 깊을진댄 더 이상의 지체와 머뭇거림은 의미가 없었다. 구원의 길이 없다면 지금 여기 이곳과 저기 저곳의 삶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인미답의 모험,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가는 길밖에 달리 길은 없었다.

번뇌는 이상으로 향하는 약동하는 힘의 원천
불교인은 이 싯다르타 청년의 문제의식과 모험적 결행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자연이든 인간사든 과제의 철저한 수행에는 연기법적 사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보이는 세계의 모습 뒤에는 과연 무슨 인연의 소치가 있고 무슨 까닭이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의문은 의문의 꼬리를 물고 이어갔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가슴과 뇌리를 떠나가지 아니했던 것이다.

청소년기부터 고독과 비애와 고뇌로 점철되었던 스물아홉 살 청춘의 마지막 고비에서 문명과 야생을 넘어 새로운 진면목과 정면으로 마주하기까지 청년 붓다의 삶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스스로를 극복하고 무아와 만인 되기를 실현한 그가 한없이 존경스럽고 우러러 보인다. 그와 동시에 슬픈 눈빛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며 상념과 사색에 자주 잠기던 소년, 그리고 고뇌와 함께 용맹스럽고 도전적인 기상으로 넘치던 청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 젊음이 있었기에 대지의 연기적 현실에 물음을 던지고, 공(空)의 의미와 둘 아님에 대한 통찰을 통해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실존적 고뇌, 자연사와 인간의 본분사가 그 출발에서 함께했던 그 젊은 날이 있었기에 훗날 치열한 정진과 무아 자비의 삶이 가능했으리라. 그의 젊은 날의 번뇌는 번뇌가 아니라 깨달음의 동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번뇌는 버릴 것이 아니다. 이상으로 향하는 약동하는 힘의 원천이다. 우리는 대지의 활생과 인간의 길을 찾기 위해 한 번은 깊은 고민과 사색에 잠겨야 한다. 무릇 세상의 의미 있는 일, 굳건한 믿음의 근저에는 먼저 고뇌와 절망의 고통도 함께했으리라. 오직 진실만이 불교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되뇌이던 휴암은 부정과 절망의 깊이가 희망의 높이가 되리라고 강조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싯다르타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목소리처럼 들린다. 새벽 별빛을 바라보며 기뻐하던 순간, 수염 덥수룩한 모습으로 자연사와 인간사에 얽힌 생명계의 현실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겼던 청년 붓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 생애에 걸친 기나긴 길을 뭇 생명과 함께 가고자 나서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는 그의 가르침이 후세로 갈수록 이해할 사람이 점점 더 적어질 거라고 보았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알고 실천할 이가 소수일지라도 진실이 중요하지 수의 다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첫 발걸음의 의미가 바로 불교의 불교다움을 말한다. 그런 그가 비극의 대지와 모순의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2500여 년 전 생명계의 현실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 잠재적인 면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고뇌와 과제는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와 나일강 유역의 대규모 관개공사 이후 확대 강화되던 개발 질주의 시대에 대지의 사막화와 생명몰이의 인류사가 남긴 크고 작은 문제들이 쌓여 왔었다. 나는 청년 싯다르타와 오늘의 청년들을 마치 동시대인처럼 느낀다. 지금은 변화에 굼뜬 기성인의 오래된 생각보다 청년의 지식과 정보가 당장의 효율성을 발하는 시대이다.

중생과 보살이 둘이 아님을 강조한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나는 팔십의 노년이지만 그들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있는 중이다. 젊은 세대가 다른 어떤 세대보다 지구 위기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젊은이들의 고민이 출산율이나 생산 인구의 감소 같은 문제로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은 거대 담론의 문제이면서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이게 얼마나 젊은 세대의 삶에 깊은 상처를 안겨주며 중대한 의미 상실의 문제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자연의 생성 원리에 전혀 맞지 않은 반(反)생성의 막다른 길로 몰리고 있는 형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매 순간의 현대 생활 자체가 데이터 이용과 인공지능망 과용으로 에너지 과다 수요의 순환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과거와 현재의 도발적 난제 앞에서 가시적 미래에 희망이 보여야 현실의 대책도 효과를 발할 것이다.

우리는 그 희망을 찾고자 한다. 그 희망은 대지를 지키고 소비생활의 방향과 양식을 개선하는 데에서 싹튼다. 붓다의 깨달음을 존중하는 불교인이라면 먹이사슬과 육식 습관의 윤회적 차원을 벗어나려고 정진해야 한다. 아직도 각종 먹이사슬을 외면한 채 생산 편향과 에너지소비 극대화로 치닫고 있는 관성의 흐름에 변화의 동력과 희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금강경』의 내용처럼 말 못하는 중생과 보살이 둘 아님을 강조하신 가르침을 지켜 살아 있는 생명들을 보살펴야 한다. 비록 소수의 움직임이 될지언정 붓다의 가르침을 보편의 지침으로 삼아 이러한 인간의 책임을 자각하고 다하는 일 이외에 불교인의 사명은 달리 없을 것이다.

김규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동 대학 신문대학원을 졸업하고, 비엔나대학과 와세다대학에서 연수를 마쳤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18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BBS불교방송』 사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탈정치시대의 새로운 항로』, 『불교가 필요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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