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 시대와 불교 |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시대와 불교

명법 스님
해인사 국일암 감원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의 이야기다.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며 만류하는 숫도다나왕에게 태자는 네 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출가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네 가지란 영원한 젊음을 누리며 늙지 않는 것, 영원히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출가 이후 이천육백여 년,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인간은 외부 환경의 개조를 넘어 자기 자신의 신체적, 인지적 향상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기획을 시도하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 향상 과정이 기하학적 속도로 진행되면 머지않은 미래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간의 능력과 기능을 향상시킨 문자 그대로의 인간 이후의 인간, 신인류의 출현이 가능하며, 죽음까지 극복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퍼져 있다. 만약 이천육백여 년 뒤에 태어났다면 숫도다나왕은 아들의 출가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캐서린 헤일스 같은 학자는 포스트휴먼이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도래한 현실이라고 말한다.1) 그들은 서양 르네상스 이후 신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성과 합리성을 중심으로 정의된 ‘인간’이란 개념이 오늘날의 현실과 맞지 않으며, 신인류 출현 이후 도래할 기계적 변화에 따른 사회와 인간관계 변화를 주목할 때 인간중심주의가 지속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생명의 정의도 달라졌다. 자기를 조작하는 힘을 가진 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물질조차 생명을 가진다는 것이 인정된다. 태아의 유전자를 선택하거나 기계장치를 몸에 삽입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과 문화의 전통적인 구분이 쓸모없게 되었다. 포스트휴먼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개념이므로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생명이 평등하다고 본다. 포스트휴먼은 ‘자연-문화 연속체’라고 본 로지 브라이도티는 인간은 역사적 구성물이며 ‘인간 존엄성’이나 ‘자율성’, ‘권리’ 같은 것들도 ‘인간 본성’에 대한 사회적 협약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하며 타자화되고 주변화된 존재들을 복권해 관계적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명과 비생명, 기계와 인간을 연속체로서 보는 관점은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와 ‘무정불성’에 익숙한 불교인에겐 낯설지 않은 것이다. 인간 향상은 붓다 되기를 목표로 하는 불자들에게 당연하고 가능한 목표로 여겨진다. 하지만 기계장치로 인간 향상을 꾀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몸 안에 삽입된 보정 장치들을 몇 년 지나지 않아 교체해야 하고, 몸으로 겪는 고통, 즉 ‘고고(苦苦, dukkha-dukkhata)’가 사라져도 ‘괴고(壞苦, viparinama-dukkhat)’와 ‘행고(行苦, sankhara-dukkhata)’는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미래를 완전히 바꿀 것이라는 맹목적 긍정과, 인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퇴행적 부정을 모두 경계한다.

허무주의의 극복과 종교의 귀환
인간중심주의의 등장으로 진리와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제공하던 종교는 물러나고, 이성에 의한 역사의 진보, 과학적 진리,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 경제 성장, 공리주의적 행복과 같은 것들이 삶의 목적이 되어 허무의 감정을 덮어주고 인간의 나약함과 필멸성을 보충해주었다. 하지만 신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이 모두 선언된 포스트휴먼 시대는 세속적인 형태의 ‘보편적 가치’조차 신봉하지 않는다. 니체가 예견했던 것처럼 종교를 대신했던 대체 종교마저 무너질 때 허무주의가 등장한다.

삶의 무의미와 정체성 상실에서 비롯된 허무주의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포스트휴먼 담론은 무엇보다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이성의 한계를 직시하기를 요구하면서 다시 종교를 소환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가 인간의 종말을 우려할 정도로 부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를 전복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주체로서 포스트휴먼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주체성은 교차적이고 상호적인 방식의 존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적 주체성을 말한다. 인간과 생명, 인간과 기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계 설정은 곧 이들 사이의 윤리를 확립하는 것이므로 지금까지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여성, 장애인, 유색인, 성소수자 등 인간 종 내의 타자만이 아니라 인간 종 밖의 타자들에게까지 삶의 경험을 확대해야 한다. 따라서 브라이도티가 지적하듯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이 우려하듯이 인간에게 무관심해지거나 탈인간화된다는 의미가 아니며” 오히려 “윤리적 가치와 확대된 공동체 의식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의미”2)한다.

불교는 이에 필요한 상상력과 정서적 변용을 제공하는데, 특히 서로 다른 존재들이 상호 침투되어 있음을 밝히는 화엄의 법계 연기적 사유는 무한한 변용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또한 불살생의 계율과 모든 생명에 대한 예경, 승가의 자연친화적인 삶의 방식에서도 인간의 동물 되기, 인간의 기계 되기, 인간의 자연 되기와 같이 낯선 영역과의 만남을 촉진하고 새롭게 경험하게 만든다.

또한 종교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삶을 수용하도록 돕는데, 싸구려 위안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를 통해서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명에 대한 감정의 공존] 이 두 가지 감정이 우리가 위축되지 않는 실존과 현재 순간의 각성으로 전향하는 것을 돕도록 만들 수 있기”3) 때문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적극적인 삶의 태도는 “필연적인 것을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것”4)이다. 니체가 말한 운명애는 브라이도티가 주장하듯 “우리가 지금 여기서 여러 타자들과 공유하는 생명의 표현적 강도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은 종교가 약속하는 영생, 구원, 초월과 거리가 멀지만, 삶의 진실인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여러 타자를 향한 ‘되기’를 실천할 수 있다. 열반마저 거부하며 중생을 위한 영원한 수행을 계속하는 보살은 현재의 삶에 대한 완전한 긍정이 종교적인 실천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브라질의 법학자이자 사상가인 웅거는 현재의 삶을 완전하게 향유하려면 인간의 실존적 약점들을 직시하고 미래에 일어날 변화들을 만들어낼 역량 강화를 위한 인간 자신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5) 그는 인간 지능과 신체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제도들과 수정된 믿음들이 어떤 경험을 촉진하고 다른 경험을 억제하기 때문에 인간 본성은 천천히 한계에서만 변하게 될 것”이므로 미래의 종교는 신이 없는 현실에서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인간의 필멸성, 무근거성, 충족 불가능성을 확고하게 인정”6)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삶의 긍정과 소외의 극복이 인간의 자기 신격화와 권력 숭배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인간의 필멸성과 무근거성, 충족 불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변화가 단지 “철학적 태도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실제로 종교적 비전에서의 변화”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세계의 변혁이 철학이 아니라 결단으로 이루어지며 그런 결단은 위대한 삶에 대한 용기와 비전은 종교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이도티 역시 “합리적 행위성과 정치적 주체성이 실제로는 종교적 경건함을 통해 전달되고 지지될 수 있으며”, “신앙 체계와 제의들이 비판적 사유와 시민권의 실천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7)고 보았다.

새로운 보편적 가치의 실천과 불교
생명과학과 디지털 기술은 물질이 단순한 질료가 아니라 지능이 있고 자기 조직적이라는 사실에 기초해 인간의 몸과 지능을 증강시켰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과 인간-아닌 형태들을 분할하는 이원론으로부터 생명의 평등성과 연결성을 회복하는 새로운 전체론적 접근이 되어야 한다. 불교는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공경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존중을 통해 인간과 인간-아닌 형태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자연적 필연성의 영역에서 해방되기를 강조하기보다 그 영역 안에서 그 영역과 조화를 이루며 발생하는 해방의 형식”8)을 예시하며 포스트휴먼의 곤경을 극복하고 지구적 위기들을 해결하는 길을 제시한다.

포스트휴먼 주체는 다수의 소속을 허용하는 생태철학 안에서 다양체로 구성된 관계적 주체로서 차이들을 가로질러 작업하고 또 내적으로 구별되지만 여전히 현실에 근거를 두고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사상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근거로 하는 종교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곤궁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웅거가 지적하듯이 종교의 혁신적 변화는 관념과 실천이 결합할 때 가능하다. 불교의 인간관과 생명관은 포스트휴먼 시대의 대안적 영성, 미래의 종교에 적합하며 필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통찰들이 불교 속에 있다는 사실보다 그 통찰들을 어떻게 현실화하는가에 대한 비전과 실천이 더 중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전통적인 교학 체계 안에서 설명되고 있는 붓다의 실천을 어떻게 현대적인 생활 속으로 확대하는가’이다.

1)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캐서린 헤일스, 허진 역, 열린책들, 2013
2) 『포스트휴먼』, 브라이도티, 이경란 역, 아카넷, 2015, p.243
3) 『미래의 종교』, 웅거, 이재승 역, 도서출판 앨피, 2021, p.369
4) KSA 6, p.297(『동서철학연구』 제98호, 「니체, 허무주의와 운명애」, 이상엽, 한국동서철학회, 2020. 12. p.350, 재인용)
5) 웅거, 위의 책, p.359
6) 웅거, 위의 책, p.362~363
7) 브라이도티, 위의 책, p.50
8) 브라이도티, 위의 책, p.66

명법 스님
해인사 국일암에서 출가했다. 운문승가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미학과에서 동양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해인사 국일암 감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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