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동물의 윤리 | 동물 복지 5

동물 복지 5


애완동물의 윤리


최훈 

강원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1년 7월 법무부는 민법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조항을 신설할 것을 입법 예고했다. 놀랍게도 그동안 동물은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동물은 물건이다 보니 누군가가 소유한 동물을 다치거나 죽게 하면 재산상의 손해만 물어도 되었다. 만약 물건이 아니라는 조항이 생기면 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위자료도 물게 되고, 이유 없이 학대한다면 형사 처분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특히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이 조항의 신설을 반길 것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애완동물을 기르는 문화가 정말로 물건으로 취급하지는 않았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그간 동물 윤리 또는 동물 복지는 이른바 ‘공장식’ 축산에서 잔인하게 사육되는 농장 동물이나 인간을 위한 신약 개발을 위해 희생되는 실험 동물에 집중되었다. 그런 동물들에 비해 오히려 인간의 애정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애완동물에게 무슨 윤리적인 문제가 있겠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일단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과 같은 법적 대우를 받는다는 뜻이다. 물건이 아닌 사람은 사고팔지도, 증여하지도, 담보로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한때 인간을 그렇게 다룬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 조선 시대의 노비나 미국의 흑인 노예는 물건과 다름없이 사고팔리고 후손에게 증여되었다. 이런 일은 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동물이 물건이 아니라면 동물도 사고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애완동물은 펫 숍의 쇼윈도에 물건처럼 전시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구입한다. 심지어 거기서 팔리는 강아지들은 정말로 물건처럼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현재 펫 숍에서 팔리는 강아지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퍼피 밀(강아지 공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교배된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에서 키울 수 있는 작고 귀여운 개를 선호하기 때문에 퍼피 밀에서는 그런 개를 번식시킨다. 사람의 경우 인위적인 방법으로 개량된 인간을 태어나게 하려는 시도는 히틀러의 우생학을 떠오르게 하기에 극렬한 혐오의 대상이다. 그런데 인간과 마찬가지로 물건이 아닌 동물에게는 품종 개량이 허용될 수 있는가?

공장식 축산을 반대하는 것은 농장 동물에게 잔인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공장식 축산을 없애고 ‘인도적’인 축산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축산이라는 것 자체를 없애는 것일까? 최근 동물 복지에 관심이 늘어나면서 채식주의자 더 나아가 극단적 채식주의인 비건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채식주의’는 낯선 용어였는데, 이제는 ‘비건’이라는 말마저도 흔하게 쓰이게 되었다. 육식을 반대하는 채식주의자들은 당연히 ‘인도적’인 축산이라는 것은 ‘둥근 삼각형’이라는 말처럼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동물을 고기나 가죽을 목적으로 기르는 것 자체가 윤리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채식주의를 실천하며 동물 복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동물을 고기나 가죽을 목적으로 기르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허용될까?

현재 개를 기르는 사람들의 주된 목적은 귀여움을 곁에 두고 보기 위해서다. 과거에는 집이나 가축의 경비를 위해 또는 사냥을 위해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현대의 도시 문화에서는 대체로 귀여움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개를 기른다. 인간의 그런 욕심으로 생긴 장모종 개는 털이 길다 보니 시야를 가리고 위생에서 문제가 생기며, 주둥이가 눌린 단두종 개는 기도가 막히는 증후군이 생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장애가 있더라도 차별하면 안 되지만, 인위적으로 장애를 만들어 태어나게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모든 애완동물의 근본적 문제는 평생토록 귀여움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품종을 개량했다는 사실이다. 어린아이를 길러본 사람들은 한참 귀여울 때의 모습을 평생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일 뿐, 아이는 자라게 해야 한다. 이런 바람을 애완동물이 대리 만족시켜준다. 애완견은 야생동물이었던 늑대가 어릴 때의 귀여움을 평생토록 보존하는 방식으로 진화되었는데, 이것을 유형성숙((幼形成熟)이라고 부른다. 

유형성숙한 애완견은 귀여움을 보존한 대신에 의존성이 생긴다. 인간에게 의존적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주인인 인간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개는 주인이 없으면 혼자서는 깡통에 든 음식도 먹을 수 없으며 밖에 산책하러 나갈 수 없다. 물론 인간도 어린이나 장애인의 경우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적이다. 그러나 어린이의 의존성은 미성년 시절에 한정되고 장애인의 의존성은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에 견줘 애완동물은 인간에게 한평생 의존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글은 처음부터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썼는데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 중 이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애완’에서 ‘완’은 장난감을 뜻하니 애완동물은 동물을 장난감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동물을 평생 짝이 되는 동무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작금의 행태를 보면 ‘애완동물’과 ‘반려동물’ 중 어디에 더 어울리는지 쉽게 판단이 될 것이다. 돈 주고 사고 주인의 취향에 맞게 개량하고 주인에게 평생 의존하는 삶을 살게 하는 동물을 반려라고 부르기는 민망하다. 하긴 ‘주인’이라는 말도 반려에게 써서는 안 되기는 하다.

이런 의존성은 공동주택 거주자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특히 더 심하다. 우리나라는 좁은 공동주택에서 키우려다 보니 귀엽고 작은 강아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더 심하다. 이 개들을 마당이 있는 시골집에서 기르던 개(요즘은 이런 개를 우스갯소리로 ‘시고르자브종’이라고 부른다)와 비교해보라. 애완견은 길들인 동물이긴 하지만 늑대와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이다. 따라서 무리를 지어 생활하거나 뛰는 것을 좋아하는 야생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유기되어 산에서 들개가 된 개들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런 개를 좁은 집에 종일 가두어놓고 가끔 줄을 묶은 채 산책시켜주는 것이 전부인 삶이 과연 개에게 행복한 삶일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역지사지는 모든 윤리의 기본이다. 『숫타니파타』에서 “그들은 나와 같고 나도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여, 살아 있는 것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또한 남들에게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705)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역지사지의 정신이다. 그런데 이 역지사지는 불살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강제 노동을 시키지 않고 끼니마다 산해진미를 준다고 하더라도 갇혀 지내고 매여서 외출해야 하는 노예의 삶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나와 같고 나도 그들과 같은데 애완동물도 마찬가지 아닐까?” 물론 만 년 이상 인간에게 길든 동물을 거친 야생으로 내보내는 것도 그 동물이 바라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채식을 한다고 할 때 지금의 농장 동물을 야생 상태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애완동물의 사육 행태가 과연 동물이 선호하는 삶인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애완동물 중 개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고양이도 최근 사육이 늘어나는 동물이다. 개와 달리 독립생활을 하고 특별히 산책을 좋아하지 않는 고양이는 개와 같은 문제는 덜하다. 문제는 고양이의 사냥 본능이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에게 이 본능을 억제시키는 것이 또는 다른 놀이로 대체하는 것이 옳은지는 차치하자. 현안인 문제는 집고양이가 유기된, 한때는 ‘도둑고양이’로 불린, 길고양이다. 배고픈 길고양이는 쓰레기 더미를 뒤져 지저분하게 하고 자동차나 화단 등을 파손하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쥐뿐만 아니라 새와 같은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길고양이에게 먹을거리와 쉼터를 제공하는 캣맘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캣맘은 길고양이를 가엽게 여기지만 길고양이에게 죽임을 당하는 동물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길고양이가 굶어 죽지 않게 함으로써 “살아 있는 것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을 지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길고양이가 다른 동물을 죽이게 함으로써 “남들에게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애지중지하는 것은 물건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물건으로 다루지 않는 것인지 성찰해보아야 한다.  


최훈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원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동물을 위한 윤리학』, 『동물 윤리 대논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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