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복지 1
불교와 동물의 권리
- 차이는 있으나, 차별은 없다
허남결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불평등한 차이 : 삶의 여섯 수레바퀴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인간의 몸을 받고 이 세상에 왔을 때 비로소 깨달음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가르쳐왔다. 초기 경전들 속에서 불살생이나 자비심과 같은 도덕적 가치들은 동물의 고통에 대한 지극한 관심으로 나타날 때도 있지만, 경전 속의 관련 언급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존재들은 애초부터 깨달음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동물들에 대한 수행자들의 배려나 사랑은 어디까지나 수행의 최고 목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발휘될 필요가 있는, 사무량심의 부수적인 결과물로 여겨졌다. 당시의 수행자들은 동물을 포함한 자연 세계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가질 것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태도는 인간이 아닌 다른 유정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수행자 자신의 정신적 고양을 위한 일이라고 봤던 것이다. 대부분의 경전 속에서 동물들의 도덕적 지위는 불분명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그들의 자연적 본성을 인간의 관점에서 임의로 왜곡하고 있는 사례들도 적지 않다. 『안타 자타카(Anta Jātaka)』에서는 까마귀와 자칼을 아첨과 탐욕의 화신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의인화된 도덕적 성질을 특정한 종들에게 일방적으로 귀속시킴으로써 오히려 그와 같은 동물 종들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편견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으로의 환생이 다른 경계의 존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오직 인간만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여섯 가지 영역의 삶은 존재들 간의 위계적 가치 체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 전적으로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데이미언 키온(Damien Keown)에 따르면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 세계에 대한 불교의 태도는 복합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불교의 궁극적 가치가 세속적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을 모색하는 종교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불교에서 자연 세계는 열반에 이르는 과정의 수단이나 도구로서 가치를 인정받았을 뿐 그것 자체가 곧 불교 수행자의 관심사일 수는 없었다. 초기 불교의 이런 자연관은 불교를 막연히 생명 생태 친화적인 사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약간 실망시킬지도 모르겠다.
평등한 무차별 : 선불교와 동물
초기 불교와 달리 대승 전통의 선불교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붓다가 될 가능성, 즉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했다. 이러한 선불교의 동물관과 관련해 서재영은 선사들의 어록에 나오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정리해 자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거기에는 선불교와 동물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그에 의하면 출가 수행자와 수행처 주변에 살고 있던 동물들은 서로 우호적이었으며 때로는 법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완전히 평등한 사이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일상생활을 공유했다고 한다. 예컨대 원숭이 무리들과 벗하며 도토리와 밤을 주워 식량으로 삼았다는 위산영우, 낙락장송의 가지 위에서 까치와 함께 살았던 조과화상, 사슴과 금낭조의 시봉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행인선사, 암자 주변에 호랑이와 이리, 사슴 떼가 뛰어놀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던 우두법융, 동물들이 가져다준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다는 범일국사 등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선사들과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며 그들을 외호하던 동물들에 관한 에피소드도 전한다. 이런 유형의 사례로는 공양미를 강탈하려는 도둑들로부터 호랑이가 공양미를 지켜주었다는 남양혜충, 호랑이를 법제자로 두었던 선각선사 등의 일화가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선사들의 법문을 듣거나 진리를 강설하는 동물들도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똬리를 틀고 자신의 몸을 휘감았던 뱀에게 삼귀의를 일러주고 교화시킨 가비마라존자, 동시에 일곱 줄씩 읽어 내려가며 60일 만에 『법화경』을 모두 암송하자 이를 지켜본 염소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법어를 들었다는 영명연수, 항상 따르던 500마리의 학에게 게송을 일러주어 불법의 진리를 깨닫게 했다고 전해지는 학륵나존자, 원숭이의 울음소리와 새, 산천초목이 모두 설법을 한다고 말한 천태덕소, 제비 새끼 한 마리가 훌륭한 법문을 한다고 칭찬한 현사사비 등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사례에 속한다.
이뿐만 아니라 『동산록』과 『벽암록』 등에도 동물을 화두의 소재로 삼은 고칙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선불교가 인간과 동물을 절대적 평등의 관계이자 평등한 무차별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또 다른 선전(禪傳)들에서도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불법을 알아듣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어 어쩌면 선불교는 오늘날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는 동물 권리의 문제와 관련해 가장 근본적인 해결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차이와 차별을 넘어 중도적 실천으로
불자라면 누구나 수지하고 있는 불살생계는 ‘인간인 우리’가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를 충분히 암시해주고 있다. 이 취지에 따른다면 우리 불자들은 처음부터 인간 외의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도 항상 자비심을 베풀어야 할 도덕적 책무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동물들의 고통을 인식하고 이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는 모든 불자들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불살생계를 어기는 잔인한 행위, 예컨대 고기를 먹거나 가죽옷을 즐겨 입고, 동물을 학대하는 일 등을 포함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불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자 삶의 자세여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실천들은 고통스러운 일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며, 더군다나 우리들의 삶에서 어떠한 본질적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일도 아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자 우리 자신들의 정신적 완성을 촉진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 상황은 우리 불자들에게 지금까지 무심코 견지해온 ‘인간과 동물’에 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수계식에서 가장 먼저 불상생계를 받았고 그 정신에 따라 살 것을 서원한 불자들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불평등한 차이’를 인정한 초기 불교와 ‘평등한 무차별’을 강조한 선불교 사이에서 인간과 동물의 도덕적 관계를 한번 더 곰곰이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어쩌면 여기서 중도(中道)적 실천의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피터 싱어가 말하는 ‘이익 동등 고려의 원리’와 유사한 불교 윤리적 행위 전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허남결
동국대학교 국민윤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 박사),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불교 윤리와 공리주의의 접점 모색에 관심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공리주의 윤리문화 연구』가 있고, 번역서로는 『불교와 생명윤리학』, 『자비 결과주의』, 『불교응용윤리학 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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