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개인의 경제생활 | 불교와 자본주의

불교와 자본주의 4


자본주의와 개인의 경제생활


윤성식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자본주의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경제 발전의 효율적인 수단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설립한 애플 이사진에 의해 CEO 자리를 박탈당하고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쫓겨난 뒤에 회사를 설립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스티브 잡스가 나간 뒤에 애플은 경영 위기에 빠지며 다시 스티브 잡스를 CEO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고 애플은 오늘의 애플로 거듭났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날 애플의 주가는 하락하고 경쟁 기업인 삼성전자의 주가는 상승했다. 스티브 잡스의 개인적 가치는 얼마가 될까? 주가가 휘청거릴 정도니 대단한 가치일 거다.


우리는 사람의 능력을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고 부른다. 블루칼라 노동자, 화이트칼라 노동자 모두 인적 자본이다. 하지만 인적 자본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재무 자본을 제공한 사람은 자본가로 불리며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봉급, 기타 비용을 제외하고 남는 이익을 많이 가져간다. 자본주의는 재무 자본의 제공자에게 이러한 특별한 독점 권한을 부여한다.


어떤 사업가가 “한국에서 기업을 하는 것은 특권입니다”라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무 자본을 제공하는 자본가는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린다. 지금은 개인도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지만 1990년대만 해도 개인이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해도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가 없었다. 대출은 오직 재무 자본가에게만 열려 있는 특권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승자 독식의 특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소수의 승자에게 이익을 몰아주는 구조라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워런 버핏은 자기는 돈으로 돈을 버는데 노동으로 돈을 버는 자기 회사의 직원이 내는 세금이 더 많다며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는 천민자본주의,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일부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경제 발전에 매우 효율적인 수단이다. 오늘날 인류의 번영은 자본주의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불교는 2,600년 전에 이자를 허용했다. 허용을 넘어 장려까지 했다. 우리는 이자를 허용하는 불교를 당연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비교해보면 매우 획기적이다. 『중아함경』은 “처음에는 먼저 기술을 배워라, 그다음으로는 재물을 구하고, 그리고 재물을 구한 뒤에는, 그것을 나누어 4분(四分)으로 만들라. (…) 농사꾼이나 장사꾼에게 주어, 나머지 1분에는 이자(利子)를 나게 하고…”라고 설한다.


불교는 이자를 허용함은 물론이고 사유재산도 허용한다. 이처럼 불교의 경제관은 친시장 친자본적이다. 어떤 출가자는 많은 재산을 남기고 죽었는데 재산이 너무 많아 왕이 탐냈다는 구절도 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한 경제생활

불교적으로 바람직한 수입 활동, 지출 활동은 무엇일까? 『잡아함경』은 “건강한 몸으로 부지런히 재물을 구하라”고 설한다. 『중아함경』은 “마땅히 먼저 기예를 익히라. 그래야만 재물을 얻으리”라고 설한다. 불자라면 기술을 가지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번 돈은 어떻게 써야 할까? 『별역잡아함경』은 “사치하지도 검박하지도 않고 그 중도를 취하느니라”고 설한다. 소비생활은 절제가 미덕이지만 지나치게 인색한 것은 경계한다. 수입과 지출은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할까? 『잡아함경』을 보면 바른 생활이란 “수입과 지출을 알맞게 하여 수입이 많고 지출이 적거나, 지출이 많고 수입이 적게 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지출이 수입보다 많으면 안 된다. 경제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중도적 경제생활이다.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8정도를 설하셨다. 8정도의 하나인 정명(正命)은 흔히 바른 생활, 바른 직업으로 번역한다. 바른 생활이란 바른 경제생활을 말하며 수입과 지출을 알맞게 해 수입이 많고 지출이 적은 것이다. 『중아함경』은 ‘주술’, 즉 점을 치고 별자리를 보고 길흉을 말하는 직업을 삿된 직업으로 표현한다. 또한 『장아함경』은 “저울로써 남을 속이지 않는다”고 설한다. 바른 직업이란 정직하고 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직업이다.


무소유란 소유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첫째 불필요한 소유를 하지 않으며, 둘째 소유하더라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자이나교의 5계와 불교의 5계가 하나만 제외하고는 똑같다. 자이나교의 5계에는 무소유가 있지만 불교는 대신 ‘술 마시지 말라’는 계가 있다. 불교는 무소유의 종교라기보다는 중도적 소유의 종교라고 보아야 한다. 중도적 소유란 첫째 분수에 맞아야 하고, 둘째 목적과 기능에 비추어 적정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결함을 교정하는 불교적 방법

자본주의 문제 중에는 불공정한 측면이 있다. 재무 자본가가 인적 자본가에 비해 유리하고 자본이 클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유리하다. ‘대마불사’라는 표현은 대기업이 망하지 않도록 정부가 보호해준다는 의미다. 빈부 격차야말로 자본주의의 가장 큰 질병이다. 최근 빈부 격차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으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빈부 격차도 자본주의 국가 못지않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가진 자산과 소득에 따라 사다리의 어디엔가 위치한다. 부자 중의 부자인 슈퍼리치는 사다리의 맨 위에, 가난한 사람은 사다리의 맨 아래에 위치한다.


빈부 격차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만약 개인이 사다리의 상층부에 위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빈부 격차가 더 심해졌다는 통계가 나왔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진 것이다. 개인이 사다리의 아랫부분에 위치하면 매우 불리하다. 가난한 사람은 대출을 받을 때 신용 등급이 낮기에 높은 이자를 지불한다. 부자는 신용 등급이 높아 낮은 이자를 지불한다. 실제로는 반대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경제 논리에 의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기에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빈부 격차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다. 자비의 관점에서 보아도 가난한 사람은 정부 혹은 사회가 보살펴야 한다.


경전은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의 도리가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임을 설한다. 『중아함경』에는 “나라 안에 빈궁한 자가 있거든 재물을 내어 구제하여 주라”고 쓰여 있다. 전륜성왕은 복지를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견노념왕이 아들에게 말하는 형식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라에 외로운 이와 노인이 있거든 마땅히 물건을 주어 구제하고 가난하고 곤궁한 자가 와서 구하는 것이 있거든 부디 거절하지 말라.” 또한 『장아함경』에는 부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왕과 대신의 대화에서 왕의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모든 인민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였다.” 몸이 아프면 치료해주고 배가 고프면 밥을 주고 머물 곳을 마련해 침구까지 주는 총체적인 복지국가가 불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국가상이다.


『증일아함경』은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사문과 바라문을 공양하고 외로운 노인을 모셔 기르며 빈궁한 이에게 보시하였다. 네 성문과 성 복판에 창고를 만들고 금, 은, 잡보, 코끼리, 말, 수레와 의복, 침구, 의약, 향, 꽃, 음식을 쌓고, 고독한 이를 위해서는 그 아내를 주선해주며 갖가지로 보시하되…”라고 설한다. 고독한 사람에게 아내를 주선해주라는 구절은 우리를 놀랍게 한다. 부처님은 의식주, 즉 생존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차원을 넘는 복지국가를 설하신 것이다. 인간의 외로움까지도 해결해주고 가정까지 마련해주는 삶의 질 차원의 복지다. 복지의 천국이라는 북유럽에서도 이런 수준의 복지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불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전륜성왕의 사례로 간주되는 아소카왕은 이와 비슷한 시도를 했지만 경전에서 주장한 수준에는 훨씬 못 미쳤다.


뉴질랜드는 복지국가다. 특히 자녀 수당이 많기에 아이가 셋인 부모는 자녀 수당만으로 일하지 않고 놀면서 먹고살 수 있다. 복지국가의 문제점은 근로 의욕이 감퇴하고 국민이 복지에 기대 의존적인 생활태도가 습관화되는 것이다. 『별역잡아함경』은 ‘‘벌이 온갖 꽃을 채집하듯이 밤낮으로 재물을 얻으라”고 설한다. 불자라면 정부의 복지 혜택이 있더라도 부지런히 경제생활을 해야 한다.


불교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연기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와 세상은 별개가 아니며 나와 타인도 별개가 아니다. 인류는 모두 아프리카의 ‘루시’라는 한 여인의 후손이라고 한다. 나의 경제생활과 타인의 경제생활, 대한민국의 경제생활, 지구의 경제생활이 모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재 탄소 중립을 전 지구적으로 추진하는 이유가 어떤 한 나라의 노력으로 지구를 기후위기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면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보다 공정한 자원 배분과 소득 분배를 추구해야 한다.


불교는 모든 존재가 홀로 존재하지 않는 동체대비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나와 별개가 아닌 사람이 불행할 때 그 사람의 불행이 범죄나 사회 불안의 요소가 될 수 있다. 불교의 지혜로 빈부 격차를 해결하지 않으면 부자마저 행복하지 못한 세상을 살아야 한다. 불교가 빈부 격차를 해결하는 방법은 경전에 쓰여 있는 대로 집이 없는 사람에겐 머물 곳을, 배고픈 사람에겐 음식을, 아픈 사람은 치료해주는 방법이다. 한마디로 세상에 태어났다면 생존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기주의에 의해 다른 사람과 세상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쉽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가 소득 재분배 정책, 복지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를 교정하려고 하지만 한계가 있다. 불교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면서 보다 나은 경제 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불교의 지혜가 지구촌의 경제생활에도 비추기를 기대한다.



윤성식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와 미국 오하이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UC버클리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로 있다. 『불교자본주의』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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