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존재론과 인식론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존재론과 인식론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회장



오온과 존재의 무상
 불교의 명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실체니 본체니 제1원인이니 신이니 뭐니 이름을 붙여도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항상 모든 것을 괴로움의 제거와 관련 짓지 않으면 그것은 희론이고 망상이며 어리석은 일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괴로움의 제거라는 이 명제를 잊어버리고 깨달음이라는 것의 성질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깨달음은 괴로움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한 체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 교리를 공부하거나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행을 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해탈이고 열반이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제거를 위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나라고 믿는 지금의 이 몸뚱이와 마음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온(蘊;skandha)이라는 것은 다발, 혹은 모여서 쌓인다[집적(集積)]는 뜻이다. 이것을 음(陰), 또는 중(衆)으로도 번역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 또는 몸과 마음을 포함하는 일체의 물질적, 정신적인 것을 다섯 가지의 다발, 혹은 덩어리, 집합으로 구분해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오온이라고 한다. 그 다섯 가지의 집합이라는 것이 바로 색·수·상·행·식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 특히 인간은 이 오온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이것은 생리학적 분류이면서 동시에 심리학적인 분류이기도 하다.

 먼저 색(色;rūpa)이라는 것은 육체 또는 물질적인 것, 물질적 요소를 말한다. 이색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색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색체와 형태를 포함한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색이라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감각에 의해 식별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빛깔과 형태뿐만 아니라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이 모두 색에 포함된다. 그래서 모든 물질적인 것의 대명사로 쓰인 것이 이 색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이 색의 성질을 변괴(變壞) 혹은 질애(質碍)라고 표현했다. 변괴란 변해 허물어진다는 뜻이며, 질애라는 것은 무엇인가 가로막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변괴라는 것은 물질이 변화해 파괴된다는 뜻이며, 질애라는 것은 물질이 일정 공간을 점유해 서로 막히며 동시에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 못하는 성질의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색은 넓은 의미로는 일체의 물질을 총칭하는 것으로 오온에서의 색이 여기에 해당한다. 십이처나 십팔계에서의 색처 혹은 색계는 물질의 일부분을 지칭하는 좁은 의미의 색이다.

 넓은 의미의 색에 대해 『아함경』에서는 이를 사대종(四大種) 및 사대종 소조색(所造色)이라고 하고 있다. 즉 물질을 구성하는 네 가지 으뜸 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종과 이 사대종으로 합성된 것을 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지는 단단한 성질의 것, 수는 습성의 것, 화는 더운 성질이 있는 것, 풍은 움직이는 성질의 것을 말하는데, 이 네 가지 성질을 가진 것이 서로 어울려서 만들어지는 것을 사대가 만든 색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신체는 단단한 성질의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혈액 등의 수와 체온의 화, 움직이는 힘의 풍이 모두 모여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사대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서 사대소조라고 한다.

 이러한 사대와 사대로써 이루어진 것이 우리의 신체를 비롯한 모든 사물이며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 오근과 색・성・향・미・촉의 오경을 합해 열 가지의 색이라고 하며, 여기에 무표색(無表色)을 더해 11종의 색법으로 분류한다. 무표색이라는 것은 행동이나 언어에서의 습관력을 말한다. 우리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대부분이 어떤 의도하에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습관력이 잠재의식으로 남아서 우리의 육체라고 하는 물질 안에 보존된다고 보아 이것도 색에 넣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색을 단순히 물질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사대설은 나중에 더 발전해서 육대설(六大說), 혹은 육계설(六界說)로 전개된다. 이것은 지・수・화・풍의 사대에다 공(空)과 식(識)을 더한 것이다. 공이란 지・수・화・풍으로 채우고 남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 식을 더해 인간존재의 모든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지・수・화・풍이라는 색에 치중한인간 구성에 대해 식을 더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더욱 드러낸 것이라고할 수 있다.

 다음으로 수(受;vedanā)라는 것은 고와 낙을 느끼는 감수(感受) 작용이다. 여기에는 육체에서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즐겁고 불쾌한 느낌과 정신으로서 지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고와 낙의 감정이 있다. 수라는 것은 이와 같이 감각이나 지각에 의해 우리가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이다. 감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안근・이근・비근・설근・신근의 오근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지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근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근이라는 것은 피부를 말하며, 의근이라는 것은 신근을 통해 느껴지는 우리의 마음의 헤아림이다.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이 바깥의 색・성・향・미・촉・법과 접촉할 때에 이 수가 생기는 것이다.

 상(想;saṃjňā)이라는 것은 마음에 떠오르는 개념을 의미한다. 감각과 지각에 의해 인식 작용이 일어날 때 이것은 붉은 꽃이구나, 이것은 유리잔이구나 하고 떠올리게 되는 그러한 개념을 말한다. 즉 추상적인 사고 작용으로써 사물의 외형적인 현상을 개괄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정신 활동이다.
 행(行;saṃskāra)이라는 것은 목적의식을 지닌 의지 작용을 말한다. 행을 넓은 의미에서 말할 때는 제행무상에서의 행과 같이 모든 현상을 가리키지만 오온에서의 행은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에 의해 좋고 나쁜 느낌이 들고 그것을 가지고 싶다거나 피하고 싶다고 마음먹는 의지 작용이 행이다.
 식(識;vijňāna)이라는 것은 나에게 느껴진 감수 작용과 그것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고 여기에 대해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종합적인 판단에는 분별하고 인식하고 평가하는 모든 정신 작용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꼬집었을 때 아프다고 느끼는 것은 수이고, 아름다운 여인이 꼬집었다고 알아채는 것은 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내가 미워서 꼬집은 것이 아니고 나에게 관심을 끌려고 꼬집었구나. 그러니 화내지 말고 한번 씨익 웃어줘야지’ 하고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씨익 웃어주는 것이 행이다.

 그런데 이 오온을 얘기하는 의도는 오온으로써 이루어진 나의 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을 말하는 데에 있다. 색은 물질적인 것이며 물질적인 것은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무상한 것이다. 그 무상한 것에 의지해 일어나는 수・상・행・식 또한 무상한 것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상한 것에 의해 ‘나’라는 영구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유발한다.

 붓다께서는 경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이다. 고인 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닌 것은 나의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진실하고 바른 관찰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도 무상하다.

 이와 같이 오온을 통해 우리는 고의 실상을 관찰한다. 이렇게 오온 하나하나의 무상함을 살펴 괴로움의 근원을 살피는 것을 오온관(五蘊觀)이라고 한다. 오온이 무상하고 고이며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함에 의해 오온을 싫어하고 오온에 의한 탐욕을 떠나서 깨달음을 이룰 수가 있다.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오온에 대해 바르게 인식함으로써 고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오온 가운데에서 정신적인 것에 해당하는 수・상・행・식의 네 가지를 명(名)이라고 한다. 여기에 물질적인 색을 더해 명색(名色)이라 한다. 그러므로 오온은 한마디로 명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명색이라는 것은 당연히 우리에게 존재로 인식된다.
 우리 중생은 오온으로부터 이루어져 있다고 했는데 이 오온은 네 가지의 자양분을 가지고 살아간다. 단식(段食)・촉식(觸食)・사식(思食)・식식(識食)이 그것이다. 단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먹는 음식에 의해 살아가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식은 우리의 육체를 지탱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촉식은 감각에 의해, 사식은 지각에 의해, 식식은 분별에 의해 살아가는 부분이다.

 촉식과 사식, 식식은 정신적 요소를 말한다. 우리 중생은 이 네 가지 자양분에 의해 생명을 지탱해간다. 우리는 우선 음식물을 먹고 몸을 유지한다. 거기에 오근으로 느끼는 감촉을 즐긴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느낌은 더 많이 더 오래 가지려고 하며 싫은 것은 배척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생각이 자라난다. 또 촉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느낌이 지각으로써 자라난다. 이것이 사식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탐내면서 우리의 식은 점점 자라나게 되고 이 식이 커갈 때 명색이 자라나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는 미래의 고의 원인을 낳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이 단식・촉식・사식・식식의 네 가지 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비구가 이 사식을 즐기고 탐하면 식이 머물고 자라며, 식이 머물고 자라는 까닭에 명색이 생기고, 명색이 자라는 까닭에 모든 행이 자라나며, 모든 행이 자라나는 까닭에 미래세의 존재가 자라고, 미래세의 존재가 자라는 까닭에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근심, 슬픔, 번뇌, 괴로움이 발생하니 이리하여 큰 괴로움이 무더기가 발생한다.

 이처럼 우리 중생은 음식물로써 몸을 지탱하고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 느낌을 키우고 그 느낌에 대한 탐욕을 길러가면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의 오근과 오경이라는 실체가 없는 색이 서로 접촉해 즐겁고 불쾌한 느낌을 가져온다. 그 느낌은 구체적인 생각으로써 우리의 마음으로 자라게 되고 거기에 따라 좋은 것은 더 취하려고 하고 싫은 것은 배척하려고 하는 행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우리가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해 그것을 대상화하고 그 대상을 내가 즐긴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게 하기 위해 오온이 설해진 것이다. 그래서 오온을 지탱하는 사식을 즐기지 않으면 우리의 괴로움이 멸해진다고 했다.

만일 사식을 즐기거나 탐하지 않으면 식이 머물거나 자라지 못하고 식이 머물거나 자라지 못하는 까닭에 명색이 자라지 않으며, 명색이 자라지 않는 까닭에 모든 행이 자라지 않고, 모든 행이 자라지 않는 까닭에 미래세의 존재가 자라지 않고, 미래세의 존재가 자라지 않는 까닭에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근심, 슬픔, 번뇌, 괴로움이 생기지 않느니 이리하여 큰 괴로움이 무더기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오온에 집착하지 않으면 우리의 괴로움도 사라지게 된다. 불교의 수행은 결국 오온의 관찰과 이를 통한 무아의 체득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단순히 무엇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사물과 현상의 분석과 관찰, 거기에 따른 실천을 통해 괴로움을 제거하는 삶의 방식 그 자체다. 괴롭지 않은 삶 이외에 우리가 추구할 것이 더 무엇이 있겠는가?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철학 박사). 전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총지종 중앙교육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불교총지종 정사이면서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근본불교개설』, 『현대인을 위한 불교 입문』, 『불교 교양으로 읽다』, 『내 인생의 멘토 붓다』, 『관세음보살 예찬문』, 『초발심자경문』, 『대일경 주심품』, 『생활불교, 재가불교』 등 다수가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