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익진 거사 | 다시 쓰는 재가 열전

다시 쓰는 재가열전|세속에 핀 연꽃


이 시대 불교 학자의 모범, 고익진 거사


세속, 비세속의 경계를 허물다


우봉규 

작가



40여 년 전, 3월 초의 남산.

동국대 후문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누군가?

맵찬 바람 속, 밤색 안경에 창백한 얼굴 하나가 힘겹게 걷다가 멈추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침 햇빛은 아직 멀리,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강의 노트를 빼서 들었다. 그가 아무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리라

둘은 말없이 코끼리 광장까지 억지로 걸었다. 꾸벅, 내가 다시 책을 건넸을 때 그가 가뿐 숨을 몰아쉬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 파리한 선연함, 무언가 까닭없이 가슴이 먹먹했다.

그런데 첫 수업, 종교학 강의에 놀랍게도 그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제일 첫 학번, 그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평소 나답지 않게 아주 곱게 대답했다.

그의 작은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접니다.”

그가 바로 병고 고익진 선생님이다. 그는 절대로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럴 힘도 없었다. 그는 내가 안쓰러웠고, 나는 그가 안쓰러웠을 뿐, 철없는 나는 분별없는 글쓰기에 바빴고, 그는 생사결의 연구에 바빴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세월,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그를 만났다. 그것도 그를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늘 함께 붙어 다녔던 도반, 지금은 직지사에 있는 묘각 스님과 함께였다.

“어디 가?”

“선생님 댁에.”

‘일승보살회’의 불원정토, 필동서재에서 만난 그는 대뜸 내게 물었다.

“강남 제비?”

“예?”

“친구 따라 강남 왔잖아?”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고익진 거사(1934~1988)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를 지냈고, <한국불교전서> 편찬실장 등을 역

임했으며 주요한 불교 서적을 다수 저술했다.

주요 편저서로는 『불교의 체계적 이해』,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현대 한국 불교의

방향』, 『원효사상의 실천원리』, 『한글 아함경』, 『한국의 불교사상』, 『고려불교사상의 호

국적 전개』, 『한국 고대 불교사상사』 등이 있다.

“그렇습니다.”

 그가 활짝 웃었다. 학교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쾌한 웃음, 나는 아직도 그의 그 웃음을 잊지 못한다. 그와의 인연은 그때 그 웃음으로 비로소 새로 시작되었다. 나는 졸업을 하고서야 그의 제대로 된 강의를 들었다. 아니 가르침을 들었다. 내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호는 ‘병고(丙古)’다. 스무 살부터 병을 안고 살았던 그에게『보왕삼매론』에 나오는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병고(病苦)를 병고(丙古)로 글자만 살짝 바꾼 그는 자신의 병을 괴로움으로만 여기기보다 탐욕을 버리게 하는 약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병고를 불행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불전 연구에 몸을 살랐다. 한자리에 하도 오래 앉아서 평생을 부종으로 고생한 그.

 원체 불학(佛學)의 불 자도 모르는 내게 단 그것만이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니고, 집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것들은 모두 오직 한 가지, 부처 공부를 위해서라는 그는 내게 간곡히 당부했다.

“꼭 마흔 살이 넘어서 책을 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당부였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세상을 향해 당장 할 말이 너무 많았던 나는 웃었다. 아니 비웃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선생님. 오늘이 어떤 시대인데… 마흔이 넘어서 책을 내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나 지금 그의 그 말을 듣지 않은 나는 뼈가 저리다. 그의 말을 들었던들 그 유명한 쇼펜하우어의 비명(碑銘)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아무리 해도 어머님하고는 화합이 되질 않았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가 간간 그렇게 혼잣말처럼 했던 것이다.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땅을 친다. 이제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하기 때문이다. 광륵사를 사이에 두고 오간 두 모자 사이의 끝없는 모정과 효성을. 어머니는 평생 아들에게 매달린 몹쓸 병 때문에, 아들은 자신만 걱정하는 어머니의 건강 때문에 목숨 다하는 날까지 서로를 놓지 못했던 회한이었음을.

자신의 생각을 담은 『한역 불교 근본 경전』을 발간하자마자 이를 교재로

‘1불승의 보살도’를 수습(修習) 실천하는 모임인 ‘일승보살회’를 창립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세상을 향한 신행이고, 회향이었다.

‘생활인의 불교’를 표방한 일승보살회는 직장인들을 주축으로

명실공히 생활인의 최고 불교 도량으로 발전시켰다.

왜 눈이 없다는 것일까?

 그는 광주에서 태어났다. 무등산 광륵사를 창건하신 여화 스님이 그의 어머니시다. 이름조차도 ‘위없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무등산, 그 한 골짜기에 불토 도량 광륵사는 위치한다. 여화 스님은 먼 훗날의 이 땅이 미륵 부처님의 정토가 되어 미륵의 빛으로 빛나는 광주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광륵사(光勒寺)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1934년 여화 스님의 4남으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의대 의예과 1년 재학 중에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을 얻고 말았다. 그리고 장기간의 입원 생활 후에 병원에서 살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고, 어머니가 창건한 광륵사에서 약 5년간의 장기 요양 생활을 하면서 불도에 귀의하게 되었다.

오랜 병고로 인생의 덧없음을 절실히 느꼈던 저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종교와 철학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힘만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일인 것 같아 저보다도 먼저 그런 일들을 생각했던 선현들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산사에서 『반야심경』이라는 불교의 짧은 경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참으로 놀라운 말이 있었습니다. 눈도 없고 색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훗날의 이 같은 담담한 술회처럼 꽃다운 청춘을 병고로 흘려보낸 그는 없는 눈과 없는 색을 찾기 위해 늦은 31세 나이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아는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라는 석사 학위 논문을 통해 우리나라의 불교계에 ‘왜 불교학은 아함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아함에는 과연 어떤 순서가 있는가’를 제기해 아함이 불교학의 기본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정립시켰다. 


고익진 거사의 저서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그는 이 책을 통해 아함이 불교학의 기본이라는 것을 정립시켰다.


 어디 그뿐인가.

 「원효의 기신론소별기를 통해 본 진속원융애관」(불교학보, 1973), 「삼법인보설」(동국사상, 1974), 「원효사상의 실천 윤리」(한국불교사상사, 1975), 「종교 간의 대립과 불교적 관용」(불교와 현대세계, 1977), 「원묘요세의 백련결사와 그 사상적 동기」(불교학보, 1978), 「서명유식의 기본 입장」(동국사상, 1978) 등의 많은 연구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늘 초조했다. 짊어진 육신의 한계로 그토록 자신이 원하던 산문입도는 덧없는 꿈일 뿐이었다. 오로지 필동서재에서 힘든 계단 너머의 동국대학교와 광륵사를 오가며 불전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함에도 그에게는 절실히 이루고픈 소망이 하나 있었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1981년.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담은 『한역 불교 근본 경전』을 발간하자마자 이를 교재로 ‘1불승의 보살도’를 수습(修習) 실천하는 모임인 ‘일승보살회’를 창립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세상을 향한 신행이고, 회향이었다.

 ‘생활인의 불교’를 표방한 일승보살회가 추구한 삶의 자세는 그의 생전에 다섯 개의 모임(1반~5반)을 이루었고, 100명을 훨씬 웃도는 인원이 법회에 동참했다. 그 주축은 불교를 전공하는 청년들이었지만, 대다수가 직장 생활을 하는 일반인들로 명실공히 생활인의 최고 불교 도량으로 발전시켰다. 설법의 내용은 당연히    6대 법문이었다. 그는 엄격하고도 세심하게 6대 법문의 법상을 기초부터 강의했고, 제자들은 스승이 던진 질문을 참구했다.

 그러나 상술한 그의 유리알 같은 연구 업적들, 특히 대중 해방을 향한 뜨거운 인간애, 그 높낮이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가 새롭게 일으킨 한국 아함은 물론, 그가 평생 천착한 『반야심경』 끝자락의 의미도 역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났던 단 한 분의 스승!

 후일 이봉춘 동국대 명예교수는 “그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이 시대 불교 학자의 전범(典範)으로,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정신적 이상과 고매한 인품으로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고 평했다. 

 1988년 가을.

 무슨 대단한 원고를 쓴다고 다니던 출판사에 휴직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있을 때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후배로부터 다급한 전보를 받고 병원으로 갔을 때는 그는 이미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입에 문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아무리 귀를 갖다대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평생 죽음을 안고 살았던 그. 그래서 불행했고, 그래서 행복했다. 그래서 그는 승속이 얼마나 다르며, 얼마나 같은지를 잘 알고 있는 몇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 가을비가 이승의 마을을 적시는 창가에서 홀연 탈 윤회의 마을로 떠나간 그를 생각한다. 그리고 낯익은 노래처럼 그가 건네준 목판의 「한 길을 걸어가는 보살이여」 대신, 바로 입가에 맴도는 이근배 시인의 시구 하나를 외워본다.


 가서는 오지 않는 것이 있다.

 한 알 육과가 썩어지면 

 흙이 되는가. 물이 되는가. 바람이 되는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우봉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월간 『문학』에 소설 『도깨비살』로 등단했으며 『황금사과』로 동양문학상을, 『객사』로 월간문학상을, 『남태강곡』으로 삼성문학상을, 『갈매기야 훨훨 날아라』로 계몽사 아동문학상을 받았다. 2001년, 2002년 서울 국제 공연제에 「바리공주」, 「행복한 집」이 공식 초청작으로 공연한 것을 비롯해 「저편 서녘」, 「나부상화」 등 희곡 작품을 발표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이곳에 살기 위하여』, 『저 산문 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경허와 그 제자들』 등이 있으며, 『눈보라 어머니』, 『대장군이 된 홍동지』 등을 발표하면서 동화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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