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 (3)
『능엄경』은 현대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명법 스님
해인사 국일암 감원
20세기 후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이라는 학문적 판단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능엄경』은 한국과 중국에서 수행자뿐 아니라 재가 신도들 사이에서 널리 유통되고 있다. 근대적 합리성을 앞세운 불교학 연구에서 위경으로 판정을 받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금구성언으로 경전의 한 글자도 의심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다고 여기던 전통적인 교학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는 『능엄경』, 『원각경』 등의 위경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경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진실이라 믿으며 그 가르침을 따르려고 했던 수행자들과,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해석하려 한 주석가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 또는 문헌학적 증거가 없다거나 합리성의 잣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위경으로 낙인찍힌 경전들을 바로 연구 대상에서 배제하고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종교적 실천들을 적절치 못한 것으로 치부해도 괜찮을까?
현대적인 불교학 연구의 급진적인 결론을 피하면서 위경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특정한 장소와 시대에 지녔던 역사적 의미를 복구하고 현재적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먼저, 『능엄경』을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광범위한 영향을 끼쳐온 불교 경전 중 하나로서 동아시아 사상을 이해하는 문헌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적 연구가 있다.
『능엄경』은 중국 당송대 불교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선수행과 관련해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졌다. 선종의 오가칠종이 모두 『능엄경』에서 그들의 선법에 맞는 해석을 발견해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선가도 『능엄경』에서 그들이원하는 주장을 찾아냈다. 또 불교 외에도 역경과 도가의 수행법, 유가의 수행법에 응용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들어와 동아시아의 여러 수행법에 끼친 『능엄경』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주자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에게 끼친 영향과 송대 문인 사대부의 예술 활동과 관련해 『능엄경』의 의의를 살핀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다. 비록 역사학적 연구지만 『능엄경』이 갖는 실천적 가치와 사상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함께 선종 사상과 여래장 사상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과 오해를 불식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일종의 수행 지침서로서 『능엄경』의 수행적, 신행적 가치를 연구하는 종교 연구가 가능하다. 현대 사회에서 『능엄경』이 유통되고 있는 영역을 살펴보면, 첫째, 『능엄경』은 선 수행의 원리와 수행 방법뿐 아니라 수행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는 수행 지침서로서 참선 수행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둘째, 능엄주의 신비한 힘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재가 불자뿐 아니라 출가 승려들이 능엄주를 지송하고 있다. 능엄주 지송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감응이 일어나는 방법으로 수용되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다라니’ 지송에 대해 낡고 주술적이며 기복적인 신행이라는 비판적 시선을 보낸다.
종교 연구로서 『능엄경』 연구는 경에서 제시하는 수행법을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실질적인 효과를 탐구함으로써 경전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종교학적, 심리학적 가치를 주장할 수 있다. 능엄신주는 현행하는 다라니 중 가장 긴 것으로, 아주 빠른 속도로 외워도 5분 이상 걸린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단어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려면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불보살의 감응과 같은 신비주의적 설명 없이도 오늘날까지 선방에서 능엄주 지송을 일과로 삼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능엄주 지송이 가져오는 집중력 향상과 알아차림 강화는 실로 강력해서 선정의 깊이와 현실적 삶도 극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이 때문에 중국의 선화 화상 등 여러 스님들이 재가 불자들에게 능엄주 지송을 권하고 있다.
『능엄경』은 현대의 명상 수행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대목들을 지적해주는 수행 지침서로서 여전히 도움이 될 수 있다. 계율 및 식사법에 대한 엄격한 요구는 수행이 깊어지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항목이며, 일상적 지각 활동인 견문각지를 떠나지 않고 깊은 선정에 몰입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25가지 원통 수행 역시 오늘날까지 유효한 수행법이다. 특히 『능엄경』에서 가장 적합한 수행 방법으로 권유한 이근원통 수행법은 참선, 염불선 등의 전통적인 수행뿐 아니라 현대적인 소리 명상 방법으로 응용될 수 있다.
세 번째로 『능엄경』에 대한 철학적 연구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 심리철학은 근대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지만 오늘날 심리철학은 인지과학, 자연과학, 인공지능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몸과 마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뿐 아니라 과학적, 윤리적 문제들과 얽힌 복잡한 논의를 다룬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똑같은 감정과 의식을 가진 존재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인가?’,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과 컴퓨터의 존재론적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등등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질문을 비롯해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이 논의되고 있다.
마음과 관련한 철학적 문제들은 불교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주제다. 특히 『능엄경』은 마음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에 대해 다른 어떤 경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치밀한 논증을 제공한다. 『능엄경』은 대상으로서의 세계와 주체로서의 마음이 분리되어 있고 마음은 의식된 것일 뿐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부정하면서, 이 마음을 대상과 반연해 발생하는 마음, 즉 식으로서의 마음이라고 본다. 아난이 대표하는 몸과 마음에 대한 통속적 견해인 “마음이 몸속에 있다”는 주장에는 마음의 개념, 몸과 마음의 관계, 자아 동일성에 대한 철학적 전제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 주장이 일원론이든 이원론이든,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마음에 대한 이론은 마음을 실체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능엄경』은 대상에 따라 애락하는 마음을 자기 마음이라고 집착하는 아난의 생각을 깨부수면서 의식으로서의 마음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정맥소」에 따르면, 아난의 생각은 세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즉 본래 마음이 아닌 것을 마음이라고 여긴 잘못과 식심은 체가 없는데 체가 있다고 생각한 것, 식심은 있는 곳이 없는데 있는 장소가 있다는 생각인데, 칠처징심장의 논증은 비심(非心)과 무체(無體)를 바로 증명하지 않고 식심이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만 증명함으로써 식심이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과 마음이 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아난이 주장하는 마음의 장소는 네 가지로, 몸의 안, 몸의 바깥, 근의 속과 중간, 일정한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그 밖에 마음은 장소가 없다는 주장까지 일곱 가지 견해를 아난과의 문답을 통해 하나하나 논파해 마음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없앤다. 『능엄경』은 실체로서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데, 이 논증이 현대 심리철학에 대해 유의미한 주장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현대 심리철학의 가정, 즉 심리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잘못된 문제 설정이라는 비판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AI를 비롯한 인공지능 연구와 철학 및 심리학의 결합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과 똑같이 사유하고 감각하고 느끼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도 있다. 오늘날 인지과학적 연구는 마음의 내적 측면보다 행동에 주목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으로, 마음을 기능적 구조로 설명하는 인지과학적 설명으로 마음의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특히 인지과학이 빠뜨린 마음의 능동성은 철학적 설명이 없이는 해명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대상에 따라 발생하고 사라지는 의식으로서의 마음을 부정한 후, 인식 주체로서의 근(根)을 주목해 식정원명(識精元明)한 보리 열반(涅槃)의 근원으로서 여래장을 끌어들인 『능엄경』의 논지는 지능을 넘어 인간 마음의 본성을 해명하려는 현대 심리철학에 대해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비록 현상적인 의식을 벗어나서 마음의 문제를 설명하는 방식을 현대 철학이 선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대 문명이 야기한 새로운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 위해 불교학은 스스로 새로운 언어와 관점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필요하다. 이와 같은 도전은 불교학이 문헌 연구라는 협소한 틀을 벗어날 때 가능하다. 또한 불교적 실천이 갖는 심리적, 지성적, 존재론적 가치를 설명하기 위한 폭넓은 연구가 행해져야 한다. 그럴 때 인류가 맞이하는 문명적 전환에 응해 유의미한 담론을 생산하는 데 『능엄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기여할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번 호를 끝으로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불교 경전 길라잡이> 『능엄경』 편 연재를 마칩니다.
명법스님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운문승가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운문승가대학 회주 명성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미학과에서 독일미학으로 석사, 동양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스미스 칼리지에서 박사 후 과정 연수를 마쳤다. 서울대 미학과 강사, 동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해인사 국일암 감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미학의 역사』(공저),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가 있고, 「서양 현대 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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