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기독교의 신행 | 신행이란 무엇인가? 4

신행이란 무엇인가? 4


불교와 기독교의 신행 


윤영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불교와 기독교는 시간적으로 2,000년을 넘었고 공간적으로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남극기지에도 법당과 교회가 있다. 그 엄청난 시공간 속에서 불자나 기독자로 살아온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고, 또 그들의 신행도 다양하다. 때로는 한 전통 안에서조차 정반대의 신행을 얼마든지 쉽게 만날 수 있다. 기독교만 해도 그 안에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라는 세 개의 거대 전통이 있지 않은가? 초기 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이처럼 논술 대상을 확정할 수 없는데 어떻게 논술을 진행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학술적 입장을 지키고 싶은 이들은 논술의 대상을 지역, 시대, 인물, 문헌 등으로 좁게 구체적으로 확정지어주기를 바란다. 예컨대 적어도 석가모니 붓다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행의 차이, 니까야와 4복음서에 나타난 신행의 차이, 혹은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가톨릭교회의 공식 입문 교재에 나타난 신행의 차이 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전적인 권한이 필자에게 주어졌다. 권한은 얼핏 자유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괴로움이다. 다만 독자들께 이해를 구한다. 이 짧은 지면에서 필자가 말하는 불교・기독교는 객관적 실재가 전혀 없는 단순한 작업 가설일 뿐이라는 점을. 즉 이 용어는 필자와 독자가 의사소통을 위해 불가피하게 임시방편으로 하는 설정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곳에서 필자가 수시로 마구 휘두르는 불교・기독교라는 말은 객관적 실체로 한정해 제시된 대상이 없는, 즉 필자가 읽고 들어 형성해온 주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신행

◎ 기독교자들의 믿음  기독교는 신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종교학도라면 그 종교의 술어로 그 종교를 진술해야만 한다. 자기 종교의 용어로 다른 종교를 진술하는 행위는 종교학도에게 금기사항이다. 이것도 불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어진 과제라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

기독교의 신행, 즉 기독교의 믿음과 실천은 믿음과 사랑, 즉 ‘야훼를 믿고 사랑을 실천한다’로 압축된다. 기독교는 ‘신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와 인간을 위해 죽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믿는 종교다. 기독자들의 신은 야훼이고 이 세상에 온 야훼는 인간 예수(Jesus)다. 즉 기독자들은 신 야훼가 인간 예수로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이들의 죄를 사면해주기 위해 대신 죽어주었다고 믿는다. 그렇게 대신 죽어준 행위, 즉 대신한 속죄[代贖]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이다. 그래서 신이 인간을 사랑한 것처럼 인간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야훼(YHWH, 혹은 YahWeh)는 명사가 아니라 ‘나는 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문장이다. 즉 나는 누구의 무엇이거나 누구에 의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자, 자존자(自存者)라는 뜻이다. 한국의 기독자들 중 가톨릭 신자들은 야훼를 하느님으로, 개신교 신자들은 하나님으로 번역해 부른다. 기독자들은 야훼를 다섯 가지, 즉 창조, 유일, 역사, 인격, 사랑의 의미로 믿는다. 역사란 주재(主宰), 섭리라고도 하는데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후 멀찍이 물러서서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사를 직접 좌우한다는 뜻이다. 야훼가 인격신이란 뜻은 그가 인간을 초월하는 신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차원을 공유하는 존재, 즉 인간의 언어로 인간과 소통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사랑은 신이 사람으로 이 땅에 와서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었다는 이야기다. 야훼의 이 이야기를 믿으면 구원이 이루어진다. 구원은 대속의 죽음으로 이미 성취되어 있다. 단지 믿음으로 확인하면 된다. 그러니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야훼가 주는 선물, 즉 은총이다.

신 야훼와 대한 이야기는 구약 39권, 사람으로 인간 예수 이야기는 신약 27권에 진술되어 있다. 기독자들은 이 성경을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이야기를 향한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믿는다. 개신교는 가톨릭이나 정교회보다 교회의 중요성이 덜하다. 가톨릭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개인이 야훼를 직접 신앙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성경과 성령을 통한 구원을 믿는다. 


◎ 기독교자들의 실천  기독자들의 실천은 단 한 가지, 사랑이다. 야훼가 사람으로 이 땅에 와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준 그 희생적 사랑을 그대로 따라 실천한다. ‘네가  받고 싶은 그대로를 남에게 먼저 베풀어라.’ ‘야훼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야훼와 네 이웃을 사랑하라.’ 기독자들의 실천 덕목, 사랑은 이렇게 간단명료하다. 전자는 최고의 가치라 해서 황금률, 후자는 사랑의 실천이 향하는 두 방향이라는 뜻에서 이중계명이라 한다.

사랑의 구체적 실천 덕목은 수도 없이 많지만, 야훼를 향한 사랑의 실천은 예배, 기도, 세례, 계명, 순례 등이고, 이웃을 향한 그것은 선교, 노동, 봉사, 헌금 등이다. 기독자들의 사랑의 실천은 많은 종교 중에서도 열렬하기로 유명하다. 많은 기독자들이 사랑의 실천에 목숨을 건다.


불교의 신행

◎ 불교의 믿음  불자들은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과 붓다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공동체인 승단(saṅgha)을 믿는다. 그리고 자신이 불성을 가진 존재라고 믿는다. 

초기 불교 시대의 붓다는 깨달은 인간이다. 붓다는 진리를 깨달았고 그 결과는 해탈이다. 해탈이란 죽음까지 포함하는 일체의 속박을 벗어나는 대자유의 성취다. 모든 인간은 붓다처럼 깨달음과 해탈의 가능성, 즉 불성(buddhadhātu)을 갖고 있음을 믿는다. 대승불교 개혁 운동 이후, 대승불교의 불자들은 부처님을 초월적 능력을 지닌 신적 존재로 믿기도 한다.

불자들은 승단이 공인한 문헌과 그에 진술된 진리, 즉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다. 붓다가 깨닫고 가르쳐주신 진리를 몇 마디로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일체의 존재와 현상에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으니 어떤 존재나 현상도 소유하거나 영원케 할 수 없다. 만일 이를 모르고[無明] 소유의 욕망[貪]과 소유를 집착[着]을 계속한다면 고통뿐이다. 이를 깨닫고 탐착을 버린다면 대자유의 해탈[nirvāna]을 얻는다’가 주요 내용이다. 선업을 지어 공덕을 쌓으면 금생은 물론 내생까지도 행복하게 살고, 악업을 지어 업장을 쌓으면 마찬가지로 불행하게 산다는 믿음도 중요하다. 승인된 승단도 불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자 믿음의 대상이다.


◎ 불자들의 실천  불자들은 지혜를 성취하고 자비를 베푸는 실천을 한다. 지혜는 붓다와 마찬가지로 해탈의 대 자유인이 되기 위한 실천이고 자비는 타인과 세상의 해탈을 돕는 실천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고요히 집중하고, 연기법, 사성제, 삼법인, 업과 윤회의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등 이른바 수행을 해야 한다. 자비는 남과 세상을 향해 물질과 가르침과 위로와 위안을 베푸는 실천이다. 불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고통과 행복을 나누며 함께하는 실천을 한다. 

수행을 위한 불자들의 구체적 실천은 초기 불교와 대승불교를 대별함이 좋다. 전자의 실천은 계율, 정신 집중, 가르침 이해, 즉 자신의 해탈을 위한 수행이 주류였다. 초기 불교에도 자비의 실천이 있으나 해탈을 위한 자기 수행의 한 덕목이다. 대승 시대에 이르면 불자들의 실천은 자비에 집중된다. 대승불교의 실천은 수행의 자비가 아니라 남을 위한 희생으로서의 자비가 첫째 덕목이 되고, 초기 불교의 세 덕목에 보시가 최우선이 되고 인욕과 정진이 더해져 여섯 가지 실천으로 압축된다. 예불, 공양, 기도, 주력(呪力), 절, 순례 등 다양한 실천법들이 개발되고, 자비의 실천은 보시, 방생, 봉사, 대중공양 등으로 구체화된다. 


차이점과 공통점

불교와 기독교의 신행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수행과 신앙이다. 전자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해탈을 성취코자 하고, 후자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무능과 야훼의 절대 권능을 믿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한다. 불자는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스스로 수행하지만 기독자에게는 그것이 바로 원죄, 즉 신성 모독죄다. 창조의 주인을 믿지 않고 피조물 인간을 믿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기독교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 아버지와 아들, 왕과 신하의 관계다. 후자가 전자를 따르지 않으면 죄인이다. 40년 넘게 만나온 수많은 기독자들이 불교를 향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지점이 불자들은 매 순간 목도하는 오점투성이의 인간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불자들이 진리, 즉 다르마(dharma)를 믿는 데 대해서 기독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법칙이나 도리는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들은 야훼를 인격신이며 역사하는 신으로 믿는다. 그들의 야훼는 사랑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는 역동적 신이다. 반면에 불자들은 인격적 존재는 영원하지 못하며 이법(理法)만이 영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불자들은 그 진리를 인간이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자들에게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여서 오직 신이 열어 보여주어야만[啓示] 알 수 있다. 불교는 성찰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불자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지만 기독자들은 구원은 이미 선물로 주어져 있다고 믿는다. 

불교와 기독교의 실천, 자비와 사랑은 말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둘 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불교는 자기없음(anātman)을 깨달아서 자기를 버리고 기독교는 야훼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서 자기를 버린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타인과 세상을 향해 자기를 바친다. 이것이 두 종교의 최대 일치점이다. 

거대 종교 불교와 기독교의 같고 다름을 어떻게 몇 페이지로 진술할 수 있겠는가? 같음도 쉽게 말할 수 없고 다름도 쉽게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사상이 달라도 실천이 같으면 같다고 하고, 혹자는 실천이 같아도 사상이 다르면 다르다고 한다. 필자는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과 세상을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힘, 그 힘이 어디서 오는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믿는다.  


윤영해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서강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종교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와 번역서로 『불교사상의이해』(공저), 『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 『천수경과 기도영험』 등이 있고, 「기독교와 불교의 自己否定의 의미」,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과 그 관계 변화」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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