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을 재생하는 삶의 조건을 먼저 살펴야
재가자의 바라밀다
‘수행한다’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나?
‘수행(修行)’은 글자 그대로 ‘닦고 행한다’는 뜻이다. 불교와 무관하게 쓰이던 한자어가 불교에서 구도적 실천을 의미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초기불교에서 유사한 말을 굳이 찾아보자면 bhāvanā(계발), sikkhā(훈련), paṭipadā(수행의 길) 정도를 들 수 있다. 모두 법(法, Dhamma)을 익히고 실천하는 움직임이다.
오늘날 수행은 명상이나 사띠(sati, 알아차리기)로 좁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보는 수행의 범위는 훨씬 넓다. 팔정도(八正道, ariya-aṭṭhaṅgika-magga)만 보아도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가에서부터 사띠와 선정(禪定, jhāna)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한다.
팔정도 역시 여덟 개의 수행 과제로 정형화해 이해하기보다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태도와 방식을 보여 주는 지도와 나침반으로 볼 수 있다. 사띠와 같은 불교의 독특한 수행 방식도 고(苦, dukkha)를 제거하는 하나의 테크닉으로만 이해하면 삶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더구나 수행을 마음을 다스리는 일로 이해하고, 명상이나 사띠라는 기술을 익히면 현실의 고를 뛰어넘어 어떤 초월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수행의 방향부터 잘못 잡은 것이다. 수행은 마음을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고를 재생하는 삶의 조건을 바꾸어 가는 일이다.
삶의 조건은 다양한데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나?
어떤 일이 지금 나를 괴롭게 한다면, 그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건의 ‘내용’을 곧바로 원인으로 단정하지 않아야 한다. 감각 정보가 들어오면 우리의 신경계는 즉각 반응한다. 그 뒤 기억과 해석, 예측이 개입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서사(narrative)의 형태로 구성된 해석은 제한된 정보와 기억에 의존해 뇌가 생성하는 예측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체험할 때 뇌가 내놓은 서사는 실제 일어난 사건 자체와 잘 구별되지 않는다.
가령 붐비는 지하철에서 옆 사람의 몸이 계속 내 몸에 부딪힌다고 하자. 감각으로 직접 체험된 것은 몸의 접촉이다. ‘참 무례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면, 그 서사는 감각 반응 직후에 만들어진 해석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일부러 내 몸을 밀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서사가 다시 편도체를 자극해 처음의 불쾌감을 더 큰 분노와 괴로움으로 증폭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수행자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괴로움의 조건은 외부의 사건인가, 그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인가. 아니면 둘의 상관적 조합인가.
모든 고를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도, 반대로 모든 고를 내 마음에서 찾아 마음만 통제하려는 것도 생산적이지 않다. 수행은 외부와 내부 어느 한쪽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일이 아니라 그 상관관계를 보고 바꿀 수 있는 조건을 우선 조율하는 일이다.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의 관점은 여기서도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실제 일어난 일에 그치지 않고 왜 끊임없이 서사를 만들어 내나?
군집 포유류 동물만 해도 감각 정보에 의존하는 기계적 반응으로 기본 생존을 유지한다. 더 복잡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영장류는 감각 정보에 해석과 설명을 덧붙여 한층 복잡한 판단을 내린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은 언어 사용과 결합하면서 이러한 해석적 설명에 근거한 판단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인류의 심리적 고통은 이런 진화가 빚어낸 일종의 구조적 기회비용이라고 나는 본다.
뇌과학에도 아직 정설은 없다. 몇 가지 기능적 가설이 있을 뿐이다.
첫째, 연속적으로 들어오는 방대한 감각 정보를 의미 있는 사건으로 묶어 이해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실제 경험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뇌는 그것을 사건 단위로 나누고 앞뒤의 의미와 관계를 연결한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일종의 정보 압축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나’라는 일관된 자기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기본 설정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를 포함한 뇌의 여러 영역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며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관여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내일의 나를 하나의 연속된 존재로 체험하게 되는 우리의 느낌은 이런 작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셋째, 현재 상황을 해석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해 대응하기 위해서다. 뇌는 외부의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는다. 기억과 지식, 현재의 감각 정보를 결합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끊임없이 예측하려 한다. 서사 기능이 뇌가 상황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하나의 기능적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문제는 진화적으로 오래된 정서 반응 체계가 실제 감각 자극뿐 아니라 기억과 해석이 만들어 낸 위협에도 반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붓다가 정확하게 지적한 고는 바로 현생 인류의 뇌가 진화 과정에서 빚어낸 일종의 ‘글리치(glitch, 오작동)’에 가깝다는 게 나의 해석이다.
감각 정보에 기억과 해석이 더해져 만들어지는 ‘설명’을 ‘가짜 서사(false narrative)’라고도 부르지만, 가짜라는 말은 그 내용이 반드시 사실과 다르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옆 사람이 나를 무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옆 사람 본인도 자신의 의식에서는 ‘난 저 사람을 무시한다’는 의도나 자각이 없을 수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연기적 관계만 있을 뿐, ‘진리’라고 확정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객관적 명제는 찾기 어렵다.
뇌과학이 내놓은 가설 역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하나의 서사이다. 불교 수행은 뇌가 왜 이렇게 진화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서사가 어떻게 고를 증폭시키며 그 과정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를 보는 데 있다.
어쨌든 고의 조건이 뭔지 알아야 제거할 것 아닌가?
조건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일은 어떤 실체적인 원인을 구체적으로 찾아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 물음 자체가 자동적인 반응의 흐름에서 이미 한 발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기분이 갑자기 상했을 때 ‘왜 지금 내 기분이 상했지?’라고 자문할 수 있다. 그렇게 묻는 순간 의식은 불쾌감을 만들어 낸 사건과 서사에서 벗어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몸의 반응으로 즉각 이동한다. 이 간단한 자문만으로도 자동적인 반응 이후 밀어닥치는 서사화의 흐름에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앞의 지하철 사례로 돌아가 보자. 옆 사람의 몸이 계속 부딪히면 뇌는 순식간에 ‘나를 무시한다’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너무 피곤해서 자기도 모르게 저러는 것은 아닐까’라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순간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어느 해석이 진짜인지는 나도 그 사람도 모를 수 있다. 설혹 그 사람에게 나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실제 몸의 움직임에는 피로와 혼잡 같은 다른 조건이 함께 작용했을 수 있다.
여기서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만들어진 서사가 유일한 현실 해석도 아니며 진정한 현실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띠는 감각 정보 그 자체에 더욱 비중을 실어 우리 시스템 내부에서 발생하는 서사에 의해 촉발되는 고를 완화해 나가는 수행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외부 조건이 지속적으로 고를 재생한다면 당연히 그 조건을 바꾸는 것이 먼저다. 옆 사람의 몸이 계속 부딪혀 불쾌하다면 자리를 옮기면 된다. 반대로 내가 바꿀 수 없는 조건이라면 수행의 관심은 그 조건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옮겨 간다.
그러나 ‘나의 반응’ 역시 마음먹은 대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마음은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나의 것’도 아니며, 몸과 별도로 작동하는 독립적인 실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명상과 사띠 수행만으로 모든 고에서 다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 몸도 마음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수행자가 체험하게 되는 무아(無我, anattā)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몸과 마음을 다스려야 하나? 결국 수행은 외부 조건보다 나의 반응을 조율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몸과 마음을 서로 독립된 두 대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몸을 단순한 물질적 대상으로, 마음은 마치 그것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주인으로 본다. 이는 현대 과학이 보는 관점도 아니지만, 특히 수행에서는 그런 이분법적 도식화에서 출발하지 않아야 한다. 불교 수행은 마음이 몸을 지배하거나 ‘나’가 몸과 마음을 굴복시키는 억지 작업이 아니다.
붓다가 고행을 버린 것도 몸을 의지로 굴복시키는 방식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통찰에서였다고 나는 본다.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도 몸과 마음을 의지만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행자는 체험되고 있는 현상에서 고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다만 바라볼 뿐이다. 기실 너무나 간단하다. 이미 일어난 반응을 다시 의지로 억누르거나 없애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애쓴다는 것은 이미 새로운 서사 작업을 하고 있음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있는 그대로 보는 행위 그 자체가 자동적인 서사 기능에 연료를 공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감정을 없애야 한다’, ‘이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조작적 마음이 새로운 서사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 바로 그러한 조작적 마음조차 나의 것이 아니라 자의식에 앞서 움직이는 뇌의 작동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마음을 통제하는 일이 아니다. 몸의 조건을 살피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관찰하며, 그 작동이 달라질 수 있는 조건을 하나둘 서서히 조율해 주는 일에 가깝다. 의식적인 ‘나’가 몸과 마음을 지휘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수행은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이 ‘깨달음’이 어떻게 보면 수행 초기에 가장 어렵다.
하지만 조건에 집중해 조건을 서서히 조율해 나가면 몸과 마음의 작동도 서서히 달라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좋은 수면을 취한 후 몸과 마음의 반응이 잠을 설친 후와 달라지는 생물학적 원리를 기억해야 한다. 수행자는 몸과 마음을 억지로 조종하기보다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수행을 항해에 비유하고 싶다. 바람을 거슬러 죽도록 노를 젓는 일이 아니라, 바람의 방향을 살펴 돛을 올리는 항해와 유사하다. 의지와 노력으로 몸과 마음을 억지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스스로 순항할 수 있도록 조건을 조율해 주는 일이다.
외부 조건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조건에 대한 반응을 살펴야 하지만, 쉽게 바꿀 수 있는 외부 조건이라면 그것부터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다. 나를 지속적으로 지치게 하는 관계나 환경이라면 벗어나는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단 하나의 조건만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한다고 보나?
개인적인 소신이지만, 나는 소식(小食)이라고 믿는다. 나의 수행 경험에 전적으로 기초한다. 초기 경전에서 붓다가 식사의 절제를 강조한 대목들을 접할수록 나의 이런 확신은 더 강해졌다. (2026년 2월호 「수행의 출발은 왜 소식인가」 참조)
과식은 비만과 대사 이상으로 몸에 부담을 준다. 아직 연구가 충분히 축적된 것은 아니지만, 과식과 대사 이상은 뇌 기능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결과가 계속 보고되고 있다. 과체중과 만성적인 대사 이상은 만성 염증을 유발하고, 실행 기능과 억제조절, 기억 등의 저하와 연관성이 보고된다. 최근에는 위고비와 같은 GLP-1 계열 약물이 욕망과 충동, 중독 성향 등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그와 관련된 뇌의 신경계적 변화까지 연구되고 있다.
소식 자체가 구조적으로 고를 생산하는 현생 인류의 뇌를 치료한다거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식사법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몸에 계속 과부하를 걸면서 마음으로만 수행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제안이다.
모든 사람에게 하루 한 끼나 두 끼만 먹으라는 말도 아니다. 몸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만큼만 먹자는 뜻이다. 정확한 양과 횟수는 사람마다 건강 상태와 생활환경, 육체적 활동의 강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현대인을 괴롭히는 불안과 우울, 충동은 순수한 심리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신경계와 내분비계가 함께 만들어 내는 생리적 현상이기도 하다. 몸의 조건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마음만 따로 떼어 조율하려 해서는 고를 만드는 조건을 충분히 다루기 어렵다. 몸의 조건을 무시하면서 마음만 조율하겠다는 생각은 내가 보기에 명상에 집착하는 현대 수행관의 중요한 오류 가운데 하나다.
바꿀 수 없는 조건은 어떻게 하나?
삶의 외부 조건을 바꾸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모든 조건을 마음대로 조율할 수도 없다. 바꿀 수 없는 조건 앞에서는 대신 그 조건에 반응하는 몸과 마음의 작동을 살펴야 한다.
다만 수행을 명상이나 사띠와 동의어처럼 이해하면 바꿀 수 있는 삶의 조건을 먼저 조율하는 일을 간과하게 된다. 관계를 바꾸고, 생활을 단순하게 하고, 먹는 것을 조절하고, 불필요한 소유와 자극을 줄이는 일을 수행과 무관한 삶의 선택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붓다는 직업 승려 집단을 만들려고 했다기보다 수행 공동체를 통해 수행에 적합한 삶의 조건을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 했다고 나는 믿는다. 율장에 반영된 절제와 검소함, 도덕적 삶의 방식에서는 배우려 하지 않으면서 명상이나 사띠만을 모든 고통을 단번에 해소하는 신비한 테크닉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꾼다. 바꿀 수 없는 것은 사띠로 알아차린다. 그러나 사띠가 삶을 하루아침에 천국이나 열반(涅槃, nibbāna)으로 바꾸는 마법은 아니다. 그 어떤 수행도 살아 있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없애거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조건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사띠 역시 현실을 마음 하나로 극복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고를 만드는 조건을 다 바꿀 수 없을 때 남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결국 수행은 무엇을 바꾸는 일인가?
수행은 세상을 마음대로 바꾸는 일도 아니고 마음을 내 마음대로 통제하는 일도 아니다. 명상이나 사띠라는 하나의 기술을 익혀 현실의 조건을 단박에 뛰어넘는 일도 아니다.
수행은 고가 반복해서 발생하는 조건을 바꾸는 일이다. 외부 조건 가운데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불필요한 조건은 줄인다. 바꿀 수 없는 조건이라면 몸과 마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려, 이미 생긴 고에 새로운 서사가 덧붙는 것을 줄여 간다.
모든 고는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소멸한다. 붓다의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를 거창한 우주론으로만 해석하면 그것이 수행에서 가리키는 바를 놓치게 된다. 연기는 현대 양자역학을 미리 설명한 물리 이론이 아니다.
고도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이 달라지면 고도 달라진다. 수행자들이 2천6백 년 동안 거듭 확인해 온 법이다.
고를 만드는 조건 하나가 사라지면 그 고는 이미 사라졌다.
수행은 결국 이 연기라는 법을 자신의 체험으로 확인하고, 고를 만드는 삶의 조건을 지속적으로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다. 삶을 매 순간 바꾸는 일이 바로 수행이다.
남시중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저널리즘 석사(MSJ)를,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개를 위한 변명-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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