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대산 중대 사자암, 적멸보궁의 따스한 환대
아! 적멸보궁! 그 빛과 깨달음 속으로
지쳐야 비로소 산을 찾는 사람들
나는 산을 두려워한다. 높이, 더 높이 올라가며 숨이 차는 순간이 보람차기보다는 힘겹다. 평지는 얼마든지 오래 걸을 수 있지만, 산에 오르는 일은 내게 무척 커다란 모험이다. 이렇게 산을 두려워하는 내가 ‘그래도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도시의 삶’이 너무 지쳤을 때다. 그럭저럭 잘 살고 있을 때의 나는 산을 생각하지 않는다. 도시의 속도를 잘 따라가고, 사람들이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해도 기꺼이 경청할 수 있으며, 한 달의 스케줄표를 보면 ‘이렇게도 할 일이 많구나’라는 생각에 기운이 솟아날 때, 그럴 때는 굳이 산을 찾지 않는다. 아름답지만 힘겨우니까, 눈부시지만 오래 걸리니까, 산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감정노동의 강도가 높아지고, 사람들의 모든 말이 너무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만나야 할 사람, 답해야 할 메시지, 지켜야 할 약속, 써야 할 글, 설명해야 할 마음들이 겹겹이 쌓여 내 안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된다. 나는 한동안 ‘괜찮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고, 피곤해도 할 수 있다고 했으며, 상처받고도 이해한다고 말했다. 작가라는 직업은 때때로 슬픔조차 문장으로 정리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문장이 되지 않는 슬픔도 있다. 뜻을 찾지 말고 오래 품어주어야 하는 피로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오대산 중대를 생각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적멸보궁. 그 이름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졌다. 오대산 중대는 다른 적멸보궁과 달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장소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더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 멸할 멸. 무엇을 더 얻는 곳이 아니라 시끄럽게 타오르던 것이 조금씩 꺼지는 곳. 나는 무엇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아무것도 빌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곳으로 향했다.
캐묻지 않는 다정함, 사자암 가는 길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세상의 소리를 한 겹씩 지워나가는 일이었다. 산길을 오를수록 전화기의 신호보다 계곡물 소리가 가까워지고, 자동차의 엔진음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마찰음이 또렷해졌다. 몇 걸음 걷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요즘 숨을 이렇게 깊이 쉬지 않았구나.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숨을 제대로 쉬는 법’을 잊고 산다. 마음이 급할수록 호흡은 짧아지고, 불안할수록 몸은 앞으로 기울며, 세상에 늦지 않으려 애쓸수록 자기 자신에게 늦는다. 오대산의 길은 말없이 속도를 늦추라고 했다. 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오늘 안에 도착하지 못하는 마음은 없다고, 조금 늦어도 결국 당신은 당신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산을 처음 봤을 때는 이런 평화로운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나의 호흡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그동안 얼마나 건강이 나빠졌는지, 나의 숨은 금방 가빠졌고, ‘차라리 포기할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중대 사자암으로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체력 탓을 했지만 곧 알았다. 마음이 지친 사람은 오르막길에서 더 빨리 숨이 찬다. 말하지 못한 서운함, 잘해야 한다는 강박,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조바심, 내가 나에게 내린 수많은 판결까지 등에 지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산비탈을 따라 조금씩 신비롭게 펼쳐지는 오대산 중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하리만큼 안도했다. 그저 아름다운 건축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이 높은 산속에 머물며 길을 닦고, 밥을 짓고, 불을 밝히고, 기도를 이어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람이 지치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에 빠진다. 그러나 절에는 누군가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 종을 치는 사람, 낯선 이가 마실 물을 준비하는 사람, 아무도 보지 않아도 마당을 쓸어내는 사람, 어둠이 내려도 법당의 불을 켜는 사람. 그 이름 없는 노동이 한 공간을 따뜻하게 만든다. 잘 가꾸어진 경내에서는 더욱 그런 ‘보살핌’의 기운이 기분 좋게 흘러넘친다. 산속 깊이 자리한 사찰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유난히 따스하다. 사람들은 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캐묻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시고, 먹을 것이 있으면 먹으라고 권하고, 앉을 자리가 있으면 내어주었다. 나는 그 무심한 듯 다정한 태도가 좋았다. 진짜 환대에는 때때로 질문이 없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왜 지쳤는지 고백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왔으니 쉬어가십시오. 배고프면 드십시오. 목마르면 물을 마십시오. 그것이면 된다.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낯선 여행자들과도 몇 번 마주쳤다. 누군가는 물을 건넸고, 누군가는 사탕을 내밀었고, 누군가는 과자 봉지를 뜯어 옆 사람과 나누었다.
“하나 드세요.”
너무 평범한 말이라 오히려 마음을 건드렸다. 우리는 평생 이런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가. 하나 드세요.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밥 먹고 가요. 별것 아닌 작은 친절처럼 보이지만, 실은 바로 이런 환대의 말들이 우리의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인간의 문명은 이토록 따스한 환대의 언어와 몸짓 속에서 가까스로 이어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몫의 음식을 조금 떼어 낯선 사람에게 건네는 순간, 인간은 단지 생존하는 개별적 존재를 넘어 타인을 환대하는 공동체적 존재로 거듭난다.
그때 문득 싯다르타의 고행 이야기가 떠올랐다. 깨달음을 얻기 전의 싯다르타는 극심한 고행에 몰두했다. 욕망을 없애기 위해 몸까지 없애려는 듯, 그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너무 오랫동안 먹지 않았고, 자신의 육신을 한계상황까지 몰아붙였다. 그러한 극단의 고행 속에서도 깨달음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것이 해탈이 아니라 또 다른 집착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이 끝인가 싶을 때, 그때 수자타라는 여인이 쇠약해진 그에게 우유와 쌀로 끓인 유미죽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우리에게는 흔히 타락죽과 비슷한 음식으로 설명되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먹먹하다. 위대한 깨달음 직전의 싯다르타에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더 깊은 철학적인 사유가 아니었다. 더 혹독한 수행도 아니었다. 한 그릇의 따뜻한 음식이었다. 한 마음씨 좋은 사람이 고통받는 낯선 타인에게 건넨, 그저 평범한 밥이었다.
이름 모를 여행자가 나에게 준 과자봉지를 뜯으며, 나는 싯다르타가 그날 먹었던 그 따스한 유미죽을 떠올렸다. 우리가 가장 힘든 순간, 필요한 것은 이처럼 따스한 누군가의 환대가 아닐까. 그날 오대산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전혀 새롭게 받아들였다. 깨달음조차 밥을 먹은 사람이 하는 것이구나. 살아 있는 몸을 돌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숭고한 정신도 멀리 갈 수 없구나. 우리는 너무 자주 정신의 힘만 믿는다. 의지, 신념, 인내, 책임감. 그러나 때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철학이 아니라 소박한 죽 한 그릇이다. “힘내”라는 공허한 말보다 따뜻한 미역국 한 숟갈이 더 깊은 위로가 되는 날이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김 빠진 조언보다는, 조용히 밥상을 차려주는 누군가의 손길이 더 위대한 지혜가 되는 저녁이 있다. 세상에는 아름답게 말을 다듬어 우아하게 전해지는 슬픔도 있지만, 그저 아무 말 없이 먼저 밥부터 먹여야 하는 슬픔도 있다.
사자암에서 낯선 사람이 나에게 준 과자 한 봉지는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화려한 음식도 아니었고, 대단히 달콤한 맛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공포와 두려움을 씻어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웬만하면 그냥 모르는 사람은 지나쳐가고 싶었는데, 그분은 왜 유독 나를 불러세워 과자 한 봉지를 쥐어준 것일까. 이제 와 생각하니, 그분은 내 얼굴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을 본 것이다. 이 사람은 고통받고 있구나. 이 사람은 깊이 아파하고 있구나. 내가 가진 작은 것들을 나눠주고 싶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따스한 환대의 마음이 전해져 지금도 아릿한 슬픔이 느껴진다. 싯다르타의 유미죽 못지 않게 위대한 힘으로 나를 살린 그 과자를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요즘 얼마나 대충대충 아무 것이나 먹고 살았는지. 컴퓨터 앞에서, 전화기를 보며, 다음 일정을 걱정하며. 마음은 늘 다른 곳에 둔 채 음식만 몸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은 식사라기보다 연료 공급에 가까웠다. 그런데 산사의 오솔길에서는 과자 한 조각도 천천히 씹게 되었다. 맛있었다. 향기로웠다. 그것은 단지 과자의 풍미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 또 다른 낯선 사람에게 베푸는 삶의 온기가 아니었을까. 내 몸이 아직 이 온기를 느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람은 따뜻한 것을 받아들이는 동안 조금씩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밥의 온도, 손의 온도, 말의 온도, 눈빛의 온도. 우리는 거대한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한다고 믿지만, 정작 마지막까지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이런 작은 온기들인지도 모른다.
부처님 없는 법당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절
적멸보궁에 이르렀을 때 가장 먼저 마음에 들어온 것은 ‘부처님의 빈자리’였다. 적멸보궁에는 일반 법당처럼 부처의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바라볼 형상이 사라진다. 자비로운 얼굴도, 내려뜬 눈도, 익숙한 미소도 없다. 부처님의 부재가 오히려 강렬하게 ‘내 마음속의 질문’을 환기시키는 듯했다. 보이는 부처가 없는 곳에서 나는 무엇을 향해 절하는가. 보이는 부처가 사라진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빌어야 하는가. 눈에 보이는 부처가 없는 곳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오래 숨겨둔 마음이 드러난다.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이미지가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벌거벗은 자기 마음뿐이다. 나는 천천히 절을 했다. 이마를 바닥에 대는 순간마다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오랜만에 산행을 해서 다리가 너무 아팠지만, 절을 하는 순간만은 그 아픔이 잦아드는 듯했다. 절을 한다는 것은 몸으로 겸손을 배우는 일이다. 평소에는 몸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머리를, 이제는 몸에서 가장 낮은 곳에 두는 일.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잠시 내려놓고, 나를 지키기 위해 세웠던 자존심도 내려놓고, 그토록 꼿꼿하게 들고 있던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몸 전체를 한없이 낮추는 일. 우리는 높아지느라 너무 지쳐 있었다. 이렇게 조금 낮아져도 괜찮았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사자암에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낮 동안 오가던 사람들의 발소리가 잦아들고 산사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해가 기울자 숲은 검푸른 침묵으로 깊어졌다. 까마귀가 유난히 거세게 항의하는 듯 울기 시작했다. 그때 예불이 시작되었다. 법당에 들어갔을 때 스님 한 분이 홀로 계셨다. 홀로 저녁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그 장면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누가 보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박수를 받을 일도 아닌데,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는 저녁, 깊은 산속 작은 법당에서 한 사람이 불상도 없는 볍당 앞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뒤에 앉았다.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도 함께 염불을 따라하고 있었다. 스님이 절을 하면 나도 절했고, 스님이 일어서면 나도 일어섰다. 독경 소리가 법당 안을 가득 채웠다. 청아하면서 깊고, 낮으면서 멀리 퍼지는 소리였다. 오대산 전체를 한 스님의 독경 소리가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 소리는 주변을 가득 채우면서도 시끄럽지 않았고, 청아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목탁이 울리고, 그 사이에 침묵이 놓였다. 그날 나는 소리만이 아니라 소리와 소리 사이의 고요를 들었다.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사이, 그 사이에서 내 마음속의 오래된 소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두 손을 모으며 무엇을 빌어야 할지 생각했다. 건강,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의 평안. 떠오르는 것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만은 아무것도 간절히 기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충만한 마음으로, 무조건 감사하고 싶었다. 지금 여기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게 ‘낯선 사람이 건네는 과자의 맛’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몸이 있어 감사합니다. 누군가의 기도를 옆에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 감사합니다.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여기까지 무사히 걸어올 수 있어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 아닌 기도’를 올리자, 지금까지 간절하게 빌었던 그 어떤 소원보다도 오늘의 ‘감사’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은 채 영혼의 보물창고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이, 그저 온 마음이 충만했다.
예불이 깊어질수록 기묘한 장엄함이 찾아왔다. 사람이 수백 명 모인 대법회가 아니었다. 화려한 조명도 음악도 없었다. 한 명의 스님과 뒤에 앉은 한 명의 여행자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오히려 아주 오래된 거대한 의식 속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수백 년 동안 이 산에서 이어져온 기도가 그 한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의 염불 속에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그 모든 염불과 독경과 탄식과 도란거림까지, 모두 다 녹아있는 듯했다. 눈 내리는 밤에도, 비바람 부는 저녁에도, 전쟁이 있던 시대에도, 나라가 흔들리던 때에도 누군가는 이 산에서 저녁예불을 올렸을 것이다. 인간은 너무 쉽게 절망한다. 세상이 무너졌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여전히 밥을 짓고 있다.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기도하고 있다.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낯선 사람에게 물을 건네고, 과자를 건네고 있다. 세상이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절을 하다가 문득 눈물이 났다. 슬퍼서인지 기뻐서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너무 오래 고통을 버틴 사람이 비로소 안전한 곳에 도착했을 때 흐르는 눈물, 누가 “이제 쉬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먼저 알아듣고 흘리는 눈물. 나는 그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대로 두었다. 스님의 독경은 계속되었다.
거대한 희망 대신 따뜻한 한 끼
나는 다시 절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생각을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와도 된다. 꼭 강해질 필요는 없다. 오늘은 밥을 먹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잠들어도 된다. 왜 그렇게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허락의 말을 나 자신에게 전하기가 어려웠을까. 수자타가 내민 한 그릇의 유미죽을 다시 생각했다. 수자타는 자신이 붓다가 될 사람을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저 굶주린 수행자에게 음식을 건넸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건네는 작은 친절의 결과를 알 수 없다.
낯선 여행자가 나누어준 과자 한 봉지는 그에게는 ‘작은 친절’이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내 인생의 눈부신 클라이맥스’가 되어 힘겨운 시간을 밝혀줄 것이다. 그러니 무심코 베풀어라. 어디선가 그런 말이 들리는 듯했다. 무심코 베풀기, 조건 없이 나눠주기, 누군지도 묻지 않고 환대하기. 그런 따스함이야말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가 하루하루의 강물을 건너가게 해주는 유일한 영혼의 뗏목일지도 모른다. 내가 건넨 따뜻한 밥 한 끼가 어떤 사람을 다시 하루 더 살아가게 할지 모른다. 환대는 결과를 계산하지 않는다. 그저 건넨다. 그리고 그 건넴 속에서 인간의 세계는 겨우 따뜻해진다. 산을 내려오기 전 사자암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다사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도 직접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 영혼이 들었던 한마디가 있다. “당신은 여기 있어도 됩니다.”
잘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그저 살아 있는 사람으로 여기 있어도 된다는 말. 나는 이제 적멸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이해한다. 적멸은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수많은 소리 가운데 꼭 들어야 할 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목탁 소리. 밥 짓는 소리. 바람 소리. 따스한 마음이 전하는 온갖 다정함의 소리들. “하나 드세요”라고 말하는 낯선 이의 목소리. 그리고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호흡의 소리. 세상에 지칠 때마다 나는 그 저녁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오대산 깊은 곳, 사람들이 모두 내려간 뒤의 사자암. 작은 법당 안에서 홀로 절을 올리던 스님. 그 뒤에서 함께 머리를 숙이던 나. 청아하게 번지는 독경. 이마에 닿던 차가운 바닥. 아직 바지 주머니에 남아 있는 달콤한 과자 한 봉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기도였다.
삶은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날 나는 다시 믿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아직 따뜻한 것이 남아 있다고. 사람이 사람에게 따스한 인사와 과자를 건네는 한. 낯선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한. 아무도 보지 않는 저녁에도 누군가 기도를 계속하는 한. 우리의 삶은 완전히 차가워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거대한 희망 때문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따뜻한 밥 한 끼가 우리를 살리고, 낯선 사람의 사탕 한 알이 우리를 세상 쪽으로 다시 돌려세우며, 한 사람의 조용한 기도가 무너진 마음을 일으킨다. 아마 부처의 길도 따뜻한 한 그릇의 죽에서 다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대산 중대 사자암에서, 나의 길도, 눈부시게, 싱그럽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글/정여울__작가.『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데미안 프로젝트』저자
사진/이승원__작가.『공방예찬』,『학교의 탄생』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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