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 스님과 함께하는 마음공부
삶이라는 영화 관람
어떤 배우는 한 편의 영화를 찍고 나서, 그 주인공 역할에 너무 깊이 몰두한 나머지, 영화를 찍은 후에도 한동안 그 주인공의 아픔이 환영처럼 자신을 힘들게 했노라고 고백하곤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배우가 아닌 관객이었음에도,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주인공의 마음에 공명하여 힘들어 하기도 한다.
이렇게 고통 받는 배우나 관객이 우리를 찾아와 고통을 호소한다면, 당신은 아주 쉽게 그것은 영화일 뿐이며, 그 배역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해 줄 것이다. 아주 쿨하게 잊으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 당신이 바로 저 배우와 같다면 어떨까? 당신은 당신 삶이라는 영화를 찍고 있다. 그러나 배우가 역할을 자신이라고 여기듯, 지나온 삶을 우리는 당연하게 '내 삶'이라고 동일시한다.
과연 그럴까? 내가 살아온 삶이라는 모든 경험들, 그것이 정말로 '내 것'이었을까? 내가 과거에 그 삶을 경험했어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삶을 경험한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삶을 지켜보는 무엇이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삶의 주체인 것이 아니라, 그 삶을 바라보는 무엇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 몸을 나라고 여기면, 우리는 내가 그것을 경험한다고 쉽게 규정해 버린다. 이 몸은 인연 따라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너무나도 깊이 당연시 해 왔던 내 몸이 나라는 생각을 습관적으로 믿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관심을 기울인 채, 텅 빈 열린 마음으로 살펴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일어남을 무언가가 안다. 그 일이 일어남을 지켜보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렇게 보지는 못한 채, '내가 삶을 경험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럼으로써, 더 이상의 깊은 통찰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 몸이 나'라는 착시적 시각으로 삶을 보게 되면, 육체에 갇혀있을 뿐, 그 너머의 진실에 가 닿을 수 없다. 이 육체와의 동일시는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내가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을 뿐이다. 진실은, 내가 삶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지켜보는 그 무엇일 뿐이다. 체험의 주체라는 '나'는 없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이 곧 답이다
눈이 눈을 볼 수 있을까? 눈은 자기 스스로의 눈을 볼 수 없다. 다만 다른 모든 것들을 보는 것을 통해 '보는 눈'이 있음을 그저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이와 같이 부처는 부처를 볼 수 없다.
당신이 바로 부처다. 부처인 당신이 부처인 당신을 찾고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보려고 애쓰고 있다. 눈이 눈을 보지 못하듯, 부처는 부처를 보지 못한다. 보는 그것이 바로 찾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처를 확인하려고 할 때, 그 확인하려고 애쓰는 그것을 돌이켜 회광반조(廻光返照)해 보라.
찾는 부처는 놔두고, 찾고자 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불법(佛法)은 불이법(不二法)이다. 둘이 아니다. '찾는 주체'와 '찾아지는 대상'을 둘로 나눈 채, 내가 그것을 찾으려고 하면, 이것은 찾아지지 않는다. 주객이 둘로 나뉘지 않는 것이 곧 부처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즉 찾는 자가 곧 찾는 것이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 부처가 부처를 찾는 것. 그러니 주객을 둘로 나누어 놓고, '나'가 '저것(부처)'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분별망상이기 때문에, 분별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이것이 저것을 보고, 이것이 저것을 알고, 내가 사물을 보는 등으로 대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불이법이기에, 그런 분별의 방식으로는 가 닿을 수 없다. 눈이 눈을 보듯, 하나가 하나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말을 염두해 두고 다시, 이 불이법을 확인해 보자. 당신은 부처를 찾고 있다. 견성(見性)을 추구한다. '이뭣고?' '나는 누구인가?' 이 화두를 깨닫고 싶다. 시도해 보라. '나는 누구인가?' 하고 찾아 보라.
여전히 당신은 오랜 습관적 방식으로 '내'가 '진리(부처)'를 찾고자 둘로 나눈 뒤에 애써 찾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하고 묻는 그것이 바로 찾는 그것이다. 다시! 당신은 지금 묻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 묻고 있는, 찾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분명히 '진리가 뭐지?' '참나가 누구지?'하고 묻고 있지 않은가? 그 질문이 바로 답이다.
'진리가 뭐지?'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그것이다. 다만 이렇게 확인되고 있지 않은가? '뭐지?' 이렇게 확인이 된다. 자기가 자기를 찾고 있었을 뿐!
이해가 멈추는 곳에 답이 있다
이 세상은, 삶은, 나는 알 수 없는 놀라운 신비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 그저 모를 뿐! 모른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해 주라. 모르기 때문에 진정, 자유롭다.
알려고 들면 알아야 할 수많은 것들이 끊임없이 나를 무지한 자로 비웃고 말 것이다. 안다고 여기는 것이 있을 뿐, 진정 아는 것은 없다.
삶을, 우주를, 나를 이해하기를 포기해 보라. 그것은 이해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삶은 왜 이런 거지? 나는 왜 이렇게 밖에 못 살까? 이 일은 왜 일어났을까?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거의 그 일은 잘 한 것일까? 모른다. 알 수 없다.
그 모든 질문에 답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이 단순한 답변 속에서 그저 존재해 보라. 삶이 곧 답이다. 질문이 곧 답이다. 이해가 멈추는 곳에 답이 있다.
법상 스님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발심해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 년 군승으로 재직했으며, 온라인 마음공부 모임 ‘목탁소리(www.moktaksori.kr)’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유튜브 ‘헬로붓다TV’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목탁소리 지도법사로서 서울 목탁소리휴 주지, 상주 대원정사 주지로 있다. 저서로 『보현행원품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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