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고, 비우고, 기다린다 — 씨앗의 ‘자리’가 가르쳐 준 사랑의 방식

남효창 박사의 나무 이야기


정확한 날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의 인상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다.
아까시나무의 꼬투리를 조심스레 열었을 때, 그 안에서 마치 정갈하게 놓인 작은 존재들이 서로 기대듯 모여 앉아 있었다.
올망졸망,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씨앗들.
그 모습은 단순한 무작위의 배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의 의도가 담긴 구성, 질서와 유대, 연결의 감각이 배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봉선(縫線)을 따라 태좌(placenta)라 불리는 자리에서 영양분을 받고, 기대고, 성장하고 있었다.
그 구조를 보는 순간, 나는 단번에 알았다.
이건 단지 생리학이 아니라, 생명의 배치 방식이라는 것을.
‘어디에 놓이느냐’라는 단순한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전략이며 운명의 방향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열매들을 열어보았다.
어떤 씨앗은 중심 기둥에 앉아 있었고, 어떤 씨앗은 측벽에 기댄 채 숨죽여 있었다.
어떤 씨앗은 기저에 응집되어 있었고, 또 어떤 씨앗은 중축을 따라 둘러앉아 있었다.
각기 다른 위치, 각기 다른 자세. 같은 나무, 같은 시간에 자란 씨앗들이 완전히 다른 자리를 살아가고 있었다.
태좌는 구조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씨앗은 ‘앉은 자리’에 따라, 언제 깨어날지, 얼마나 영양분을 받을지, 어떤 방향으로 뿌리를 내릴지 결정받는다.
자리는 존재의 시작점이었고, 배치의 윤리였으며, 우주의 의자가 되었다.

나는 묻게 되었다.
“나는 어디에 앉아 있었는가?”
“나는 어떤 태좌에 기댄 채 살아왔는가?”
삶은 언제나 자리를 요구한다.
누군가는 중심에, 누군가는 가장자리에, 누군가는 뿌리 근처 어둠에 앉는다.
그 차이는 불공평이 아니라 다른 전략이다.
그리고 주어진 자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깨어남의 시작이 된다.

이제 나는 한 알의 씨앗 앞에 서면, 그 앉음의 자세와 방향을 먼저 들여다본다.
그것이 말해준다. 그 씨앗이 누구였는지를.
누군가 배치한 듯한 질서, 누군가 기억하는 듯한 배열—그 안에서 생명은 말없이 자신을 준비한다.
씨앗은 머무는 방식으로 말하고, 기다리는 방식으로 깨어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문장은, 언제나 자리다.

자리가 말해주는 것
씨앗이 앉은 자리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영양이 닿는 길이며, 빛과 온도를 받아들이는 관문이다.
태좌는 씨앗에게 속삭인다.
“여기서 자라라. 이 방향으로 깨어나라.”
우리도 그렇다.
앉은 자리, 서 있는 자리, 머무는 자리가
우리가 보는 풍경과 선택을 바꾼다.

관계의 언어 — 연결, 책임, 그리고 끝나지 않는 헌신

나는 혼자 깨어났지만, 곁에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흙 속 어둠에서 아직 말을 배우지 않았지만, 뿌리 옆의 생명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균류의 손길, 흙의 촉감, 곁에 있던 이들의 온도는 말보다 먼저 나를 안심시켰다.
그때 처음 알았다. 곁에 있다는 것’이 곧 생존이라는 것임을.

레비나스는 말했다.
“얼굴은 말보다 먼저 책임을 요구한다.”

나는 얼굴도 모른 채, 이미 타인의 책임 속에 살아 있었다.
곁에 뿌리를 내린 존재를 마주쳤을 때, 나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건 너를 피한 것이 아니라, 네 삶의 반지름을 존중한 것이다.
호두나무와 민들레처럼, 생명은 화학물질을 통해 거리를 둔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기 위한 ‘거리 두기’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자유란 타인의 자유와 조화를 이루는 힘이다.”

나는 나를 지키되, 너를 침범하지 않는다.
나는 뿌리를 뻗되, 서로의 공간을 인정한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

시간이 지나, 나는 꽃이 되었고, 벌과 새는 내 향기에 이끌려 왔다.
색과 맛, 구조와 시간으로 우리는 서로를 읽었다.
말하지 않고도 함께 움직였고, 함께 피어났다.

아렌트는 말했다.
“우리는 함께 말할 수 있을 때, 함께 존재한다.”

나는 말하지 않았지만, 존재로 말했고, 움직임으로 답했다.

그러나 관계의 절정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헌신이었다.

꽃이 지고 난 후에도, 어머니 나무는 멈추지 않았다.
화려함이 사라진 뒤에도 광합성을 이어가고,
수분을 끌어올려 봉선을 따라 양분을 흘려보냈다.
그건 단순한 생리작용이 아니라, 기억의 본능이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멈추지 않고 흘려준 빛과 물과 온기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어머니의 리듬이었고, 생명의 윤리였다.

 

산복사나무 열매와 씨앗

씨앗이 모두 날아간 뒤에도, 나무는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에도 잡아두지 않았고, 비에도 매달리지 않았다.
보내고, 비우고, 기다렸다.

그리고 가지 하나를 흔들며 문득 생각한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쯤일까?”
“잘 뿌리내렸을까…”

그러나 간섭하지 않는다.
기억하되, 돌아선다.
그게 어머니의 사랑, 어른이 된 생명의 방식이다.

우리는 서로를 돕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
나는 말이 없지만, 나의 존재는 누군가를 향해 기울어져 있다.
숲은 씨앗들의 말 없는 협약이었다.
모두가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연결되어 있었다.

말보다 먼저 닿는 것
숲의 관계는 말로 시작되지 않는다.
흙 속 뿌리의 감각, 곁의 존재를 피해 가는 방향,
꽃과 벌이 나누는 색과 향의 대화.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서로를 살게 하는 언어다.

식물의 ‘거리 두기’
일부 식물은 화학물질을 뿌려 주변 씨앗의 발아나 성장 속도를 늦춘다.
이를 타감작용(Allelopathy)이라 부르며, 호두나무, 쑥, 민들레 등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공격이 아니라, 자원 확보와 공존을 위한 전략이다.


남효창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숲 식생학 석사, 자연환경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산림환경정책학과 연구원 및 서울대 임업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숲 연구소이자 실내 치유 정원인 ‘마인바움’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나무와 숲』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