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사찰 숲길 걷기명상
경내를 천천히 둘러본 뒤
약사전 뒤편으로 향하자
본격적인 숲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 초입에는 작은 계곡이 흐르고
여름비를 머금은 계곡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습기를 머금은 풀들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다.
계곡을 향해 오르면 보호수
한 그루가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고
위쪽으로는 전망대가 조성돼 있었다.
전망대에 오르자 삼각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가
선명하게 드러났고 원효봉과 노적봉도
가까이 다가와 있는 듯했다.
초여름 숲이 품고 있는 고양 흥국사와 숲 명상길
절 계곡마을에 여름이 한창이다. 신록이 무르익어 내리는 7월의 아침, 삼각산을 마주한 노고산 자락은 짙은 녹음으로 가득 차 있다. 봄꽃이 지고 난 자리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지고, 또 피어 있고, 숲은 한층 더 깊어진 생명력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숲속으로 들어서면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서울 도심을 지나 자동차로 5분 남짓, 걸어서는 30분 남짓한 거리지만 숲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아파트 숲과 자동차 소음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이런 공간은 이미 낯선 풍경이다. 흥국사의 숲은 천 년 전 모습의 일부를 간직한 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고양 흥국사를 찾은 것은 초여름 숲이 품고 있는 명상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천년고찰 흥국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약사여래를 모신 도량으로 오랜 세월 수행과 신행의 중심 역할을 해온 곳이다. 사찰 경내에는 수백 년 세월을 견딘 고목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고 일부는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년 사찰의 무게가 자연스레 전해진다.
흥국사는 오늘날에도 지역 불교의 중심 도량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복지활동, 신행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으며 특히 템플스테이 도량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젊은이들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돕는 프로그램부터 일반인을 위한 참선과 명상 프로그램까지 다양하게 마련돼 있어 사찰의 문턱을 크게 낮췄다.
몇 해 전 조성된 숲 명상길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템플스테이 참가자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즐겨 찾는다. 짧은 시간이지만 숲속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어린아이도, 노인도 어렵지 않게 숲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지역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자연 체험 학습 장소로 자주 찾는다고 한다. 이날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졌다. 아이들이 떠난 뒤 숲은 다시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숲 명상길은 흥국사 일주문 앞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경내를 천천히 둘러본 뒤 약사전 뒤편으로 향하자 본격적인 숲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 초입에는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여름비를 머금은 계곡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습기를 머금은 풀들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다.
계곡을 향해 오르면 보호수 한 그루가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무다. 보호수 위쪽으로는 전망대가 조성돼 있었다. 전망대에 오르자 삼각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가 선명하게 드러났고 원효봉과 노적봉도 가까이 다가와 있는 듯했다. 흥국사가 왜 명당이라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이다.
숲이 들려주는 소리,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전망대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한쪽은 노고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이고 다른 한쪽은 숲 명상길이다. 숲 명상길은 오른편 좁은 길을 따라 이어진다. 숲은 깊고 고요했다. 참나무와 상수리나무, 소나무가 서로 어우러져 울창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발밑에서는 지난해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여름 숲이라지만 낙엽들이 아직도 길을 덮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잔잔한 소리를 냈다. 멀리서는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새는 짧고 경쾌하게 울었고 어떤 새는 길게 음을 끌었다. 숲 전체가 거대한 합창단이 오케스트라를 연출하는 것 같았다.
사찰에서는 이 길을 숲 명상길이라 부른다. 이름 그대로 걷는 것만으로도 명상이 된다. 굳이 특별한 수행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천천히 걷고, 숨을 고르고,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숨 들이 쉬며 ‘아나’, 숨 내쉬며 ‘아빠나’, 잠깐 멈추며 ‘사띠!’를 반복해 본다.
문득 불교의 가르침인 ‘조고각하(照顧脚下)’가 떠올랐다. 자신의 발아래를 살피라는 뜻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숲길은 조고각하를 실천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발밑에는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개미들은 바삐 길을 오가고 있었다. 잠시만 고개를 숙여도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생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스락, 바스락.”
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들으며 살아간다. 자동차 소리, 휴대전화 알림음, 텔레비전 소리. 하지만 숲에서는 오히려 소리가 적어지면서 더 많은 것을 듣게 된다.
새 소리도 그렇다. 이름은 모르지만 숲속 새들은 저마다 다른 음색으로 노래한다. 어떤 새는 높은 음으로 울고 어떤 새는 짧게 끊어 부른다. 멀리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도 들린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걸음에 맞춰 염불을 해 보았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기도 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기도 한다. 약사도량인 흥국사에 왔으니 ‘약사여래불!’도 부르며 가족과 이웃의 건강도 기원했다. 숲길은 어느새 수행의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숲 명상길은 천년고찰이 품고 있는 수행의 공간이며 자연이 들려주는 법문
명상길 한 바퀴를 도는 데는 20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걷다 보면 욕심이 생긴다. 조금 더 가보고 싶고 조금 더 머물고 싶어진다.
나 역시 노고산 능선 쪽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숲 명상길에서 갈라지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자 경사가 제법 가팔라졌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숲이 만들어주는 그늘 덕분에 걷기는 한결 수월하다.
능선에 올라서자 진초록 숲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다람쥐 한 마리가 잽싸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도마뱀 한 마리는 바위 틈으로 몸을 숨긴다. 사람들에게는 명상의 공간이지만 이들에게는 삶의 터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위안을 얻지만 자연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잠시 바위에 앉아 물을 마시며 산을 바라본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존재만이 줄 수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누리는 평온이 다른 생명의 불편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능선을 따라 걷다 보니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흥국사 뒤편 산자락의 전망 좋은 곳이었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쉰다. 눈앞에는 삼각산의 봉우리들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산봉우리 이름들도 눈길을 끌었다. 원효봉과 의상봉, 나한봉과 보현봉. 수백 년 동안 이 땅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불교문화의 흔적이 산 이름 속에도 남아 있다.
하산길은 혜명선원 뒤편으로 이어졌다. 오를 때보다 경사가 더 가팔랐지만 내리막길이라 수월하다. 이 길에서는 조고각하가 더욱 절실했다. 발아래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금세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내려오자 숲 바닥에는 둥굴레와 비비추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여름 햇살 아래 싱싱하게 자란 모습이 대견하다. 마치 수행자들에게 꾸준한 정진을 당부하는 듯했다.
주차장이 가까워질 무렵 숲길은 다시 완만해졌다. 처음에는 잠깐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20분 명상길이 더 긴 산행으로 이어졌다.
아쉬움은 없다. 오히려 마음은 가벼워졌다. 혼자 걸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산새와 대화를 나누었고 나무와 풀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흥국사 숲 명상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천년고찰이 품고 있는 수행의 공간이며 자연이 들려주는 법문을 만나는 길이다. 발걸음은 짧지만 그 안에서 만나는 깨달음은 결코 짧지 않다. 야생화가 피어 있고 숲이 말을 거는 여름날, 흥국사 숲 명상길은 여전히 지혜를 깨우는 선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처음 길을 나선 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짧은 숲 명상길을 걷겠다고 시작한 산행이 어느새 작은 순례가 되어 있었다. 숲은 훌륭한 선지식이다. 말없이 가르치고 꾸짖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나무는 서두르지 않는 삶을 가르치고 계곡은 흐르는 삶을 보여준다. 들꽃은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려준다.
흥국사 숲 명상길에서 만난 수많은 생명들은 모두 하나의 법문이었다. 바람도 법문이었고 새소리도 법문이었다. 발밑의 낙엽도 법문이었다. 그래서 이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천년 숲이 들려주는 가르침을 만나는 길이었다.
글/사진__여태동 시인. 경북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및 동국대 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를, 동방문화대학원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찰과 전통한옥 고택, 동화, 고승인터뷰, 도시농부 일기 등 10여 권의 책을 출간했고 법정 스님 관련 등 10여 편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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