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중도(不二中道)의 현실적 의의와 적용]
불교의 중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살아가면서 갈수록 절감하는 것은 사람들의 성격이 천차만별이고 이러한 성격은 각각 장단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다혈질인 사람은 화를 잘 내지만 뒤 끝이 없고, 점액질인 사람은 화를 잘 내지는 않고 평소 차분하지만 일단 화가 나면 오래 간다. 낙천적인 사람은 매사에 긍정적이지만 미래를 대비하는 점은 약하고, 비관적인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기 쉽지만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을 잘 대비할 수 있다. 이런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며 사람들은 대체로 이러한 성격에 따라서 살기 마련이다. 사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몰이해와 갈등은 많은 경우 이러한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어렵게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서로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사태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을 종합하면 하나의 관점에서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가 생길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다양한 관점을 종합하려면 자신의 성격적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어야 한다. 자신의 성격적 한계에 구속되지 않고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적절하게 잘 대응하는 사람을 우리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단적으로 말해 현명한 사람은 자기 성질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고, 자신이 관계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방향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렇게 현명한 사람은 매사에 중용을 구현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남을 돕더라도 관대함이라는 중용을 지켜야 한다. 남을 돕되 상대방이 자립하는 것을 방해할 정도로 지나치게 많이 베푸는 것은 낭비이다. 반면에 상대방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적게 베푸는 것은 인색함이다. 상대방이 자립하는 데 도움이 될 정도로 적절하게 베푸는 것이 관용이다. 너무 지나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것이 중용이다. 이렇게 중용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우리가 처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변하며 우리가 관계하는 사람의 성격이나 정신적 수준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적절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베풂이 다른 사람에게는 낭비이거나 인색함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매사에 중용을 실현하는 현명한 사람의 지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사랑에 입각해 있다. 그러한 지혜가 이러한 관심과 사랑을 토대로 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용하는 영리함으로 전락한다. 예를 들어 능란한 사기꾼은 자신이 속이려는 사람의 성격이나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을 현혹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기가 막히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사기꾼을 현명한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고 영악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불교가 말하는 중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과 매우 유사하다. 부처야말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현명한 사람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는 사람들의 다양한 근기와 각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적합한 가르침을 펼쳤다. 부처의 이러한 지혜는 만인이 깨달음에 도달하여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비심을 토대로 한 것이다.
중도의 삶과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
부처처럼 현명한 사람이 자비심과 지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자비심과 지혜는 제2의 성격과 같은 것이 되었기에, 그러한 덕들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마지못해 하는 의무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종류의 탐욕이나 시기심 또는 증오에서 벗어나 있기에 마음이 항상 평온하고 충만하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충만한 행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할 뿐 그것으로 어떠한 보상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사이의 중도를 가르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지만 불교도 다른 인간을 사랑하려면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경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만을 이기적으로 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교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오히려 이기적인 탐욕이야말로 고통의 원인이라고 본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 내적으로 충만하여 자신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자기혐오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 대한 불만이나 자기혐오에 가득 찬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는 없다. 마음이 스스로 평화롭고 충만한 자만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도 갖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이기주의도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행복을 무시하고 남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봉사할 것만을 강조하는 이타주의도 거부한다. 불교는 남에 대한 봉사도 그러한 봉사에서 행복을 느낄 때만 유의미하다고 본다.
불교는 이렇듯 남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중도를 구현하라고 가르친다. 부처는 한때 욕망의 근절을 목표하는 고행을 추구했지만 그것을 통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자, 금욕과 방일(放逸) 사이의 중도를 추구하게 된다. 흔히 욕망을 분출하면서 사는 삶을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은 욕망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는 욕망을 근절하기 위해 욕망과 싸우라고도 하지 않는다. 욕망과 싸우려는 태도는 욕망을 죄악시하면서 그러한 욕망을 근절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의식을 불어넣어 주기 쉽다.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도, 욕망과 싸우는 것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불교는 우리에게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불교는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에 사로잡히지도 그것을 부정하려고도 애쓰지 말라고도 말한다.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도 그것을 부정하려고 애쓰는 것도 모두 욕망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을 다만 조용히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조용하게 바라보면 욕망의 불길이 사그라들고 우리를 사로잡는 힘을 상실하게 되면서 우리 마음에는 평온함과 충만함이 깃들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욕망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금욕도 방일도 아닌 중도를 구현하는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실현하는 현명한 인간이 되라’라고 말하지만, 현명한 인간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불교의 수행법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현명한 인간이 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동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최근에는 불교와 서양철학 비교를 중요한 연구과제 중 하나로 삼고 있다. 주요 저서로『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연구』,『니체와 불교』, 『쇼펜하우어와 원효』, 『에리히 프롬과 불교』등이 있고,『불교와 아리스토텔레스』등의 번역서가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