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中道) · 불이(不二)는 불의(不義)와의 타협 아니다
[불이중도(不二中道)의 현실적 의의와 적용]
부처님 가르침이 한역(漢譯)되면서 적잖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도교·유교의 견해와 개념으로 불교를 해석하려 한 초기의 격의(格義)불교1)의 한계는 말할 것도 없고, 구마라집·현장 등 대역경가들의 훌륭한 번역에도 한자와 한문이 가진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원래 가르침의 본뜻을 왜곡할 소지를 남겼다. 그 위에 한자의 자구(字句) 풀이에만 매달려 엉뚱한 해석을 시도하는 자의적 견해2)까지 겹쳐 많은 오해와 오남용이 생겼는데, 중도(中道)와 불이(不二) 및 공(空)에서 특히 그러하다.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중도나 중(中)에 관하여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원어는 ‘마지마 파티파다(Majjhimā Paṭipadā)’ 또는 ‘마제나(Majjhena)’인데, 이것이 모두 ‘중도’로 번역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거나, 세속적 절충주의로 오해되는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마지마(Majjhimā)’의 의미는 흔히 양극단 배제로 알려져 있으나, 보다 정확하게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함’을 뜻한다. ‘파티파다(Paṭipadā)’는 ‘구체적인 실천 절차(행로)’를 의미한다.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버리고 이 ‘마지마 파티파다’를 취하여 열반으로 나아가라고 하셨으며, 그 구체적 방법으로 ‘8정도(八正道)’를 가르치셨다.3) 후대에는 37조도품 · 6바라밀 등 불교의 일체 수행법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 전부가 이 중도라는 용어로 수렴되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유무이변(有無二邊)’의 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으로써 법을 설한다(Majjhena dhammaṃ deseti)”라고 하셨다.4) 후대 중관(中觀)학파의 용수(龍樹)는 이로부터 “중(中)=연기(緣起)=공(空)”이라는 공식을 도출하였고,5) 나아가 생성과 소멸(生滅), 영원과 끊어짐(常斷), 동일함과 다름(一異), 오고 감(來去)의 8가지를 모두 부정하는 방식으로 존재의 실상이 중도라고 하였다(八不中道).6)
부처님께서 갠지스강 비유에서 ‘중간에 가라앉는 것(majjhe saṃsīdeyya)’을 경계하신 것처럼7), 부처님의 정법(正法)에서는 시공적·산술적 중간이나, 규범적·이념적 타협점을 ‘중’으로 표현하신 일이 결코 없다.
이처럼 불교에서의 중(中)은 인간의 인지적 한계8)를 넘어서기 위한 수련법이자, 그 수행으로 체득한 ‘궁극적 진리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기호이다.
반면, 도가•유가 등 중국의 중(中)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에서의 中은 부족 광장에 세워진 깃대를 상징하는 상형문자에서 기원하여, ‘중간(Middle)’의 의미를 거쳐 우주론적 원리이자 통치 철학, 인간 심성의 최고 경지로 심화되었다. 서경(書經)의 ‘윤집궐중(允執厥中)’9), 유가의 ‘중도지치(中都之治)·중도(中道)·중행(中行)·중용(中庸)·시중(時中)’10), 도가의 ‘수중(守中)’11), 음양가의 ‘중정(中正)’12) 등에서 말하는 중은 철저히 현실 세계에서의 조화, 상황에 알맞은 처신, 그리고 이를 위한 세속적 수양 등 통치와 치인(治人)을 위한 용어이므로, 진상(眞常)에 달하지 못한 인식을 교정하여 고통을 타파하는 해탈을 목표로 하는 불교의 ‘중’과는 매우 다르다.
불이(不二)란 무엇인가?
'둘이 아니다'라는 의미의 불이(不二)는 “현상은 연기(緣起)이므로 공(空)이며 그것이 곧 중도(中道)”라는 대승불교의 핵심 원리에서 파생된 통찰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특징적 중심 개념으로서, 역사 속에서 치열한 교리적 논쟁과 철학적 발전을 이끌었고 매우 심오한 이론으로 구체화되었다.
인도 중관학파의 불일불이(不一不異)·팔불중도(八不中道)와 이를 계승한 중국 삼론종의 진속이제(眞俗二諦)·파사현정(破邪顯正)13), 유식학파의 삼성설(三性說)14)과 유식무경(唯識無境)15)의 논리는 모두 이 불이의 통찰 위에 서 있다. 특히 번뇌에 물든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의 성품이라는 여래장(如來藏) 사상과, 생멸하는 현상 세계와 불생불멸의 진여가 본래 하나로 통한다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일심이문(一心二門) 구조는 불이(不二) 철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는 화엄종의 4법계론(四法界論)16)·상즉상입(相卽相入)17), 그리고 선종의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사상으로 만개하는 결정적 토대가 되었고,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18)의 선언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이 사상은 실재론적 아트만(Atman)을 주장하는 바라문교와의 논쟁, 그리고 마음과 물질의 외적 실재성을 세분하여 분석하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아비달마 철학19)의 이분법적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승의 핵심 논리로 정립되었다. 나아가 어떤 경전이 부처님의 궁극적 진의를 담았는가를 판별하는 요의(了義)·불요의(不了義)의 기준이 되었으며20), 방대한 가르침을 체계화하려는 천태종의 오시교판(五時敎判)21)이나 성문·연각·보살의 삼승(三乘)을 하나로 회통하는 일승(一乘)22) 사상의 성립 역시 이 불이(不二)의 사상적 전개와 궤를 같이한다.
불이(不二) 개념은 제법의 무상·무아를 밝힌 초기 불교의 연기 사상에 그 근원을 둔다23). 이 사상은 대승불교에 이르러 『유마경』의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24), 『사익경』25)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압축되었다. 이러한 초기 대승의 불이 사상은 용수의 중관학을 통해 ‘진공(眞空)’의 논리로 정립되었고, 훗날 선종(禪宗)의 ‘적멸(寂滅)’ 가르침으로 이어지며, 온갖 마음 현상과 삼라만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과에 따라 변전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관으로 대성되었다. 이러한 불이의 철학적 흐름은 한편으로 유식학(唯識學)으로도 전개되어, 주관적 인식 과정(수상행식)의 한계와 왜곡을 극복하고 현상의 여실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구현하는 데 그 궁극적 취지를 정립하게 되었다.
중도·불이에 대한 오해와 오남용
이 글에서 중도·불이에 관련된 제반 논의를 모두 검토하기는 어렵지만, 다음 오해와 오남용은 명확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1) 연기(緣起)와 불이(不二)는 공견(空見)26)과 악취공(惡取空)27)을 철저히 배격한다.
만사가 아무런 인과적 질서 없이 제멋대로 연결되어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다거나, 일체의 현상적 차별이나 도덕적 가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nihilism)는 불이론의 취지가 결코 아니다.
원측(圓測)은 『해심밀경』의 삼자성(三自性) 이론과 결합하여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대한 공 즉 본질이 있다고 착각하는 분별과 집착을 깨뜨리는 것은 정당한 공이나, 의타기성에 대한 공 즉 인연에 의해 생겨난 현상과 작용도 없다고 부정해 버리는 것 그리고 원성실성에 대한 공 즉 궁극적 진여의 자리마저도 단멸(아무것도 없음)로 돌려버리는 것은 오류라고 공의 의미를 명확히 하였다.28)
용수(龍樹) 또한 공(空)과 불이를 잘못 이해하는 '악취공(惡取空, 어설프게 이해한 공)'은 오히려 중생을 깊은 타락과 파멸의 늪에 빠뜨린다고 경고하였다.29)
불이는 현상의 차별성을 무시하는 맹목적 혼합이 아니라, 각자의 존재적 특성을 오롯이 인정하면서도 그 본질이 상호 의존적(연기적)임을 꿰뚫어 보는 정견(正見)의 안목이다.
(2) 세속적 중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영어로 ‘Middle of the road’로 번역되기도 하는 세속적 중도는 흔히 정치권 등에서 ‘중도 통합’이라는 수사로 애용되기도 하지만, 팔정도(八正道)와 같은 진리와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결코 따라서는 안 될 가짜 중도이다.
이러한 세속적 중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Golden Mean)’이나 토크빌이 말한 ‘시민적 절제(Moderation)’처럼 고귀한 덕목으로 분식(粉飾)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원칙 없는 기회주의’와 ‘무분별한 방임(Permissiveness)’으로 타락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단테는 『신곡』에서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은 천국과 지옥 모두에게 거부당한 채 지옥의 가장 비참한 변방에 버려진다”고 엄중히 경고했고, 링컨은 “옳고 그름이 선명한 사안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결국 악의 승리를 돕는 것”이라 했다. 마거릿 대처 역시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은 양쪽에서 오는 차에 치이는 가장 위험한 일”이라며 회색분자 식의 중립을 꼬집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와 사회공산주의 독재 체제는 개인의 천부인권30)·생산수단의 사적 소유31)·법치주의32) 등의 핵심 가치에서 완전히 모순·대립하므로 절충점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마치 이 둘을 통합하여 대립을 소멸시킬 수 있는 신통한 ‘중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대중을 기만하고, 정치적 수사로서의 중도를 악용하여 가치 규범적 정의를 무력화하고, 체제의 정당한 수호 노력을 극단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교묘한 사상적 왜곡에 불과하다. 복지는 자유 체제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유민주주의가 이룩한 번영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한 지 오래다.
부처님의 중도는 불의와 정의의 중간에 서는 방관자적 태도가 아니라, 사(邪)를 파하고 정(正)을 드러내는 단호한 정견(正見)의 실천이다.
파사현정으로 정법 수호하는 것이 불자의 수행
제대로 건축된 사찰의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33)이 있고, 천왕문(天王門)34)·불이문(不二門)35)을 지나야만 대웅전·적광전·관음전·지장전 등 불보살을 모신 전각36)에 도달할 수 있다. 더러 불이교라는 이름의 다리를 지나기도 한다.
또한 전각과 요사채의 가운데에는 대개 비어 있는 마당을 두고, 건물들은 자로 잰 듯한 좌우 대칭 대신 자연 지형과 조화를 이루는 비대칭적 균형을 이루도록 설계되어 있다. 기둥의 나무를 반듯하게 다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춧돌을 자연석 그대로 사용하고 기둥 밑면을 깎아 그 표면에 맞추는 ‘그렝이’ 공법을 사용하여 인위도 방임도 아니면서 나무와 돌의 성질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기도 한다. 주요 목재 구조물 역시 홈을 파서 서로 맞물리는 짜임 공법을 사용하여 결구한다. 장식에서도 화려함과 담백함을 융합한다.37) 자연과 인공, 비움과 채움, 세속과 성스러움이라는 대립물들이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가장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태는 중도를 건축적 언어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중도와 불이는 불교의 본질 개념인데, 이를 곡해하여 오남용하게 되면 부처님 정법이 전해지기 어렵다.
오시고 가시는 모든 과정이 진리 그대로이신 여래의, 맨발과 발우 그리고 분소의만으로 중생의 고통을 구하기 위하여 고구정녕히 진리를 가르치신 행적에는 털끝만큼의 타협이나 티끌도 없으시다. 이러한 가르침을 왜곡하여 세속의 이해타산에 끌어 쓰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아니 된다. 파사현정으로 정법을 수호하는 것만이 불자(佛子)가 해야 할 수행이다.
1) ‘격의(格義)’란 뜻을 자로 재는 것 즉 기존의 기준으로 뜻을 헤아린다는 의미.
2) 대표적 사례로 법(法)을 물수(水)와 갈거(去)의 합으로 보아 ‘물이 가는 길’이 법이라고 해설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불교학의 법은 인도의 'Dharma', 법학의 법은 서양의 ‘Recht’·‘Law’ 등의 번역어인데, 후자는 ‘정의(Justitia)’, ‘존재론적 질서’, ‘의회의 의결’ 등에 관련된 개념이다. 따라서 물(水)의 물리적 또는 인문학적 속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법의 표준을 구하는 것은 심각한 자의적 왜곡이다. 법의 고자(古字) '灋' 중에는 죄인을 가려내 외뿔로 들이받는다는 전설 속 신수(神獸)인 ‘해태 치(廌)’가 포함되어 있어 水와 去로 파자한 것 자체도 잘못이기도 하다.
3) “다섯 비구들이여, 도를 행하는 모든 사람이 배워서는 안 될 두 가지 극단적인 행(二邊行)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첫째는 범부인 사람이 행하는 천박한 일인, 욕망의 즐거움에 집착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성의 법이 아니며 이치와 상응함이 없는, 스스로를 번민하게 하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하면 밝음을 이루고 지혜를 이루며 삼매를 성취하여 자재함을 얻고, 지혜로 나아가며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나아가니, 팔정도를 말하는 것이다.”〔김윤수 역주(2019), 『중아함경Ⅴ』 제204 라마경, 운주사, 395면〕
4) “세존이시여, …전략…어떤 것이 바르게 보는 것입니까? 붓다께서 산타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있음(有)과 없음(無)이라는 두 가지 의지할 것이 있어 취착에 부딪친다. 만약 이런 취착이 없다면 …중략…스스로 알 것이다. …중략…왜냐하면 세간의 일어남을 여실하고 바르게 본다면 세간에 없다는 것은 있지 않고, 세간의 소멸을 여실하고 바르게 본다면 세간에 있다는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양 극단을 떠나 중(中)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데,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명을 조건하여 형성하고…중략…괴로움의 큰 무더기가 소멸한다는 것이다.〔김윤수 역주(2019), 『잡아함경Ⅲ』 제301 가전연경, 운주사, 72~73면〕
5) 중(中)을 해설한 용수의 『중론』 제24장 〈관사제품〉의 제18송(인연생법송): “인연에 의해 생겨난 모든 법(연기), 나는 이것을 곧 공이라 한다. 또한 이는 가명(가설된 이름)이며, 곧 중도의 뜻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卽中道義)”.〔용수 지음•정화 풀어씀(2014), 『중론中論』 539면〕; 위 책에는 두 번째 구절이 ‘我說卽是無’라고 되어 있고, 구마라집이 애초에 ‘無’로 잘못 번역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범어 원문이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우리는 그것을 공(空)이라고 부른다)이고, 의미로도 공(空)이 타당하며 無는 중국사상에 의한 오류임이 명백하므로, 통설에 따라 고쳤다.
6) 위 『중론中論』 11면 제1장 〈인연품〉 제1송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나아가 승찬은 『신심명』에서 간택(揀擇)과 증애(憎愛)를 배격하였고,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미혹과 깨달음(迷悟), 옳음과 그름(是非), 주관과 객관의 바탕이 되는 유와 무(有無) 등 36가지를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7) “이 큰 나무가 이 언덕에 닿지 않고 저 언덕에 닿지 않으며 강 가운데서 물밑으로 가라앉지 않고 섬에 걸리지 않으며 소용돌이에 들어가지 않고 사람이 또한 가져가지도 않으며 비인非人이 가져가지도 않고 또 썩지도 않는다면, 물의 흐름을 따라 순조롭게 나아가고 흐르며 보내어져서 큰 바다에 이르겠는가? …중략…이 언덕이란 6내입처, 저 언덕이란 6외입처, 물밑으로 가라 앉는다는 6내입처와 6외입처의 사이에 가라앉아 즐기고 탐하는 것, 섬이란 아만, 소용돌이란 계(戒)에서 물러나는 것, 사람이 가져간다는 것은 세속 사람과 출가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여 기뻐하거나 근심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며 서로 따르는 것, 비인非人이 가겨간다는 것은 범행을 닦으면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 썩는다는 것은 계를 범하거나 악하고 불선한 법을 행하면서 범행을 닦는 체하는 것, 큰 바다는 열반이라고 이름한다”〔김윤수 역주(2019), 『잡아함경Ⅱ』 제1174 유수경, 운주사, 182~184면〕
8) 인간의 시각이나 청각이 일정 주파수 대역에 한정되어 있어 다른 생물이나 기계의 인식 범주와 다르다는 점, 뇌세포에 일정한 전기적·화학적 자극을 주면 생생한 환각이 나타난다는 점 등은 이미 현대 과학을 통해 널리 증명된 사실이다. 나아가 인간이 생존 본능과 아집(我執), 선입관 및 왜곡된 개념의 필터를 통해 대상을 바라봄으로써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오인(誤認)을 범하는 것은 일상에서 왕왕 겪는 일이다.
9)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는 ‘윤집궐중(允執厥中,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을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순이 우에게 천하를 넘겨주며 전한 통치 원리라고 하고 있다. 권력의 치우침 없이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정치를 중(中)이라고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국선도에서는 요•순•우가 모두 단군의 후예로서 단군 이래의 수련법인 중단전의 기운을 지키라는 뜻이라고 한다.
10) 유가에서 말하는 중도는 "모든 감정과 행동이 상황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상태"를 말한다. 『중용』에서는 “기쁨•분노•슬픔•즐거움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도는 감정이나 행동이 넘치지도(過) 모자라지도(不及) 않아 천하의 근본이 되는 상태라고도 하고, ‘시중(時中)’이란 시간과 처한 상황(時)에 따라 가장 적절한 균형점(中)을 찾아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11) 노자•장자 등 도가 사상의 중도는 인위적인 분별을 지우고 우주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일견 불교의 중도와 비슷해 보이지만, 존재 자체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수련법에 근본적 차이가 있는데도 마치 불교의 중도와 동질인 것처럼 오해시키는 점에서 그 해독이 매우 크다. 노자 5장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니, 중간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의 ‘중(中)'은 유교적인 도덕적 적절함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시비(是非)와 언어적 분별을 떠난 '비어 있음(虛)'과 '고요함(靜)'을 뜻한다고 하고, 유·무, 고·저, 장·단 등 상대적 개념들이 서로를 생성한다고 보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우주의 근본인 도(道)의 관점에서 만물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齊物)을 중도적 삶이라 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해탈은 그 상대 개념 모두를 타파한 초월적 경지에서 얻는 지혜이고 실상인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12) 주역(周易)에서의 중도는 우주가 순행하는 원리 그 자체인데, 주역 괘 중 가장 좋은 상태로 꼽는 ‘중정(中正)’은 괘의 하중간(2효)과 상중간(5효)이 치우치지 않고 자기 자리를 바르게 지키고 있는 것으로서 천지가 조화를 이룬 것으로 본다. 한쪽이 비대해지면 다른 쪽이 쇠퇴하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음과 양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역동적인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중이라 한다.
13) 삼론종(三論宗)은 2~3세기 인도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과 제바(提婆)의 『백론(百論)』에 표명된 이론을 중심으로 하여, 5~7세기 고구려 출신 승려 승랑(僧朗)과 중국의 길장(吉藏) 등이 체계화하고 정립한 불교 학파이다. 이 종파는 세속의 상식적 진리인 세제(世諦)와 궁극적 진리인 진제(眞諦, 第1義諦)가 모두 중도(中道)라는 하나의 진리를 가리킨다는 '이제불이(二諦不二)'를 핵심 교리로 삼는다. 아울러 사견(邪見)을 타파하는 것(破邪)이 곧 올바른 도리를 드러내는 것(顯正)임을 밝혀 불이(不二)의 실천적 성격을 정립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원효(元曉)가 『삼론종요(三論宗要)』를 저술하며 교학 발전에 기여했고,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에 의해 천태종·화엄종·계율종·법상종과 함께 5교(五敎) 중 하나인 법성종으로 정립되어 조선 세종 대에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될 때까지 그 맥을 유지했다. 일본에는 625년 고구려 승려 혜관(慧灌)이 원흥사(元興寺)에서 이를 최초로 강설함으로써 일본 초기 불교 사상의 초석이 되었다.
14) 유식학파에서 존재의 세 가지 양태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주관과 객관의 허망한 분별에 의해 잘못 집착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인연에 의해 상호 의존하여 일어나는 현상 세계인 '의타기성(依他起性)', 의타기성에서 집착이 사라져 드러나는 참된 본성인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뜻한다. 이들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인식 전환에 따른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다. 시공을 초월한 정토의 대기궁전(大器宮殿)에서 부처님이 해심밀보살(解深密菩薩)·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자씨미륵보살(彌勒菩薩) 등에게 설하셨다는 『해심밀경(解深密經)』을 근본 경전으로 삼는다. 이는 초기 대승의 미륵·무착이 지은 『유가사지론』과 『섭대승론』을 거쳐,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및 『삼성이품(三性利品)』에서 철학적으로 대성되었으며, 훗날 호법과 현장의 『성유식론(成唯識論)』을 통해 유식 교학의 핵심 존재론으로 집대성되었다. 흔히 드는 비유에서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알고 놀라는 착각의 상(相)은 변계소집성, 그것이 삼(麻)실로 꼬인 새끼줄이라는 조건적 현상(연기)임을 직시하는 것은 의타기성, 그 삼실마저도 고정된 실체 없이 본래 공(空)함을 꿰뚫어 보는 궁극의 진리 인식은 원성실성에 해당한다.
15) 오직 식(識)만 존재할 뿐, 식을 떠나 외부에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대상(境)은 없다는 유식학의 핵심 명제이다. 주관(인식하는 마음)과 객관(인식되는 대상)의 이분법적 대립을 타파하고, 인식 현상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식으로 파악하는 불이론적(不二論的) 구조를 취한다. 이는 『화엄경(華嚴經)』 〈야마천궁게찬품〉에 등장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및 선종(禪宗)의 화두인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와 사상적 취지를 같이한다.
16) 화엄종 제4대 조사 청량징관(淸涼澄觀, 738~839)의 『화엄법계현경(華嚴法界玄鏡)』에 제시된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네 가지 범주로 설명한 세계관. 개별적이고 차별된 현상 세계인 '사법계(事法界)', 평등하고 보편적인 본체 세계인 '이법계(理法界)', 본체와 현상이 걸림 없이 원융하게 통하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그리고 현상과 현상이 서로의 걸림돌이 되지 않고 중중무진으로 융섭하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를 뜻한다. 이는 본질과 현상이 분리되지 않는 대승불교 극치의 불이(不二)를 보여준다. 흔히 인용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성어는 현상의 차별상만을 보는 '사법계'의 묘사이기도 하지만, 집착과 분별을 완전히 여윈 뒤 삼라만상 그대로가 서로 걸림 없이 원융무애함을 깨닫는 '사사무애법계'의 궁극적 경지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17) 모든 존재가 서로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화엄학(華嚴學)의 핵심 논리이다. '상즉(相卽)'은 너와 나의 본질이 본래 하나임을 의미하고, '상입(相入)'은 공간적·작용적으로 서로에게 걸림 없이 들어감을 뜻하며, 삼라만상이 대립 없이 원융하게 하나로 녹아든 불이(不二)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제한된 분별망상(分別妄想)에 찌든 식(識) 구조를 타파하고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사상적 방편이자 극약처방일 뿐, 물리적 세계에서 양전자와 음전자가 본질적으로 같다거나 서로의 내부로 침투한다는 식으로 함부로 왜곡되거나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18)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등장하는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가지고 있다"라는 선언으로, 중생과 부처, 현상과 본질의 경계를 허물고 대승의 절대적 불이 사상을 천명한 핵심 교설. ‘불성’은 중생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원인으로서의 가능성’을 표현한 것으로서, 번뇌라는 껍질에 싸여 있는 ‘결과로서의 부처’를 선언한 ‘여래장’과 함께, "중생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며, 누구나 수행을 통해 그 가려진 성품을 드러내면 바로 부처가 된다"는 대승불교의 가장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다.
19) 부파불교의 주류 견해로서,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은 실재하며 현상의 궁극적 요소인 법의 본체는 항상 존재한다)라는 원칙하에, 정신과 물질의 세계를 세분하여 5위 75법(5位75法)의 체계로 논하였다. 선악의 인과가 즉각 실현되지 않는 경우에 관하여 순현법수업 (順現法受業)·순생수업(順生受業)·순후수업(順後受業)의 삼시업(三時業) 이론을 만들기도 하였지만, 숙명론·과거와 미래를 연결할 매개체의 부재 등 비판을 받았다. 용수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공법공(我空法空)'의 대승 불이(不二) 철학을 제시하였다.
20) 부처님께서는 (뜻이) 확정된 경(了義經, nītattha suttanta)과 (숨은) 뜻을 알아내야 할 경(不了義經neyyattha suttanta)를 구분하시고,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다”라는 말씀은 확정된 경이고, “‘비구들이여 한 사람, 두 사람…중략…이 있다.’라는 식으로 세속적 언어로 말씀하셨더라도 ‘궁극적 의미에서는 사람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숨은 뜻을 알아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이에 관하여 거꾸로 우기는 것을 경계하셨다.〔대림스님 옮김(2012), 『앙굿따라 니까야1』, 초기불전연구원, 209~210면〕. 불이론(不二論)은 '불요의경의 숨은 진의'를 적극적으로 규명하여 요의(了義)로 발흥(發興)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21) 천태종의 개조 지의(天台智顗, 538~597)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래와 같이 시기별로 분류하여 오시교판(五時敎判)을 확립하였다. ① 성불 후 최초 21일간 대승의 보살들에게 설법하신 화엄시(華嚴時), ② 이후 12년간 초심자들을 위해 사성제와 인연법을 설하신 아함시(阿含時), ③ 그다음 8년간 『유마경』·『능가경』·『사익경』 등을 통해 대승 사상을 고취하신 방등시(方等時), ④ 이어서 22년간 『금강경』 등 공(空) 사상을 선양하신 반야시(般若時), ⑤ 마지막 8년간 『법화경』과 『열반경』을 통해 만중생이 성불하는 일승(一乘)의 길을 가르치신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가 그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수세기에 걸쳐 발전한 인도의 다양한 경전들이 선후 맥락 없이 한꺼번에 중국으로 유입되자, 교리적 혼란을 극복하고 부처님의 진의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고안된 사상사적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불교사학에서 역사적 문헌 성립사와 일치하는 연대기적 사실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22) 성문승(聲聞乘, Sravakayana)은 4성제 등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라한과를 수행하는 방법, 연각승(緣覺乘) 또는 독각승(獨覺乘, Pratyekabuddhayana)은 12인연법을 홀로 깨달아 아라한과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대승 측에서 이들이 아공(我空)은 이루나 법에 집착하여 비수행자 제도(濟度)를 경시한다고 비판하여 소승이라고 불렀다. 보살승(菩薩乘) 또는 대승(大乘, Mahayana)은 아공법공을 주장하면서 중생제도를 목표로 삼았고, 불일승(佛一乘, Ekayana)에서는 소승법도 존중하면서, 부처님 법은 모든 중생을 성불로 이끄는 다양한 방편이라고 보았다.
23) 신체는 모인 물방울과 같고, 느낌은 물 위의 거품과 같으며, 지각은 봄의 아지랑이와 같고, 모든 형상은 파초와 같으며, 의식의 법은 환상과 같이 관하라. 널리 두루 자세히 사유하고, 바르게 알아차리고 잘 관찰하면, 알맹이 없고 견고치 않으며 나나 나의 소유란 없다네.…중략…비구여 힘써 닦고 익히며 이 무더기의 몸을 관찰하라. 밤낮으로 항상 마음 모아, 바르게 알고 알아차림에 매어 머물면, 유위의 형성은 길이 쉬고, 영원히 청량한 곳 얻으리라.〔김윤수 역주(2019), 『잡아함경Ⅰ』 제265 포말경, 운주사, 187~188면〕
24) 유마거사는 세간과 출세간·생사와 열반·주관과 객관 등의 대립을 언어적 분별이라고 규정하는 31명 보살들의 견해 표명에 뒤이어 문수보살이 “일체 법에서 말로 주고받음이 없고, 보일 것도 알릴 것도 없어 모든 문답을 벗어나는 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다”라고 말하고 유마힐에게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감인지 묻자 유마힐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유마의 일묵). 문수보살은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문자와 어언까지 있지 아니함. 이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찬탄하여 말하였다.〔이영무 역해(1989), 『유마경강설』, 월인출판사, 361~368면〕
25) 『파사익경』이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도 있다 하나, 구마라집이 401년 유마경을 한역한 직후인 402년 한역한 『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 약칭 『사익경』이다. 『유마경』에서 32보살과 유마힐이 불이를 논하였다면, 제석천왕 사익이 아라한들에게 불이에 관하여 질의한 내용으로서, 천태종의 교판에서 『유마경』 등과 함께 방등시(方等時)에 배대되는 핵심 대승경전. 언어적 분별을 떠난 제법의 평등한 공성(空性)과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밝혀 불이(不二)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다.〔김영률 외(2013), 『사익범천소문경』 외, 동국대 역경원〕
26) 공견(空見, śūnyatā-dṛṣṭi, nāstika, med-pa)이란 공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견해로서 공을 전혀 없다는 허무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 공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닌 견해는 부정된다. 대표적으로 외도가 주장하는 바 “선을 행하는 자도 악한 결과를 받고, 악을 행하는 자도 선한 결과를 얻어 인과가 모두 공하다”고 보아 선악의 업보가 가지는 이치를 무시하는 것과 불교 안에서 아직 공의 참된 뜻에 무지하여 “모든 존재의 체상은 전혀 없는 것이다(決定無有諸法體相)”라는 식의 허무적 공견을 가지는 입장을 말한다. 원측(圓測)은 『해심밀경』의 삼자성(三自性) 이론과 결합하여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대한 공(본질이 있다고 착각하는 분별과 집착을 깨뜨리는 것)은 정당한 공이나, 의타기성에 대한 공(인연에 의해 생겨난 현상과 작용도 없다고 부정해 버리는 것) 그리고 원성실성에 대한 공(궁극적 진여의 자리마저도 단멸(아무것도 없음)로 돌려버리는 것)은 오류라고 한다.〔지관 편저(1998), 『가산불교대사전』 제1권, 가산불교문화연구소, 1064면〕
27) 악취공(惡取空, dṛg-bhraṣṭā śūnyatā)이란 공(空)의 참된 의미를 오해하여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집착하는 ‘잘못 이해된 공성’을 뜻한다. 대승불교에서 공(空)은 고정불변한 실체(자성)가 없다는 연기(緣起)의 이치를 밝혀 집착을 타파하는 방편일 뿐, 현상 세계의 엄연한 인과적 실재나 도덕적 책임주의까지 부정하는 단멸론(斷滅論)이 아니다. 그럼에도 만사의 연기적 차별상과 선악의 인과법(因果法)을 무시한 채, “본래 공하므로 아무런 질서도 가치 기준도 없다”라며 도덕적 방종과 궤변을 일삼는 태도가 바로 악취공의 전형이다. 이는 사회적 맥락에서 일체의 법치와 규범적 정의를 무력화하고 인과적 유기성을 왜곡하는 사상적 타락으로 귀결되므로, 정법(正法)의 중도 철학에서는 이를 철저히 배격한다.
28) 지관 편저(1998), 『가산불교대사전』 제1권, 가산불교문화연구소, 1064면; 장규언(2025), 『원측 사상의 해석학적 연구』, 시아이알, 158~164면. 원측은 모든 대상이 다 공하다고 보는 청변(淸辨) 보다는 호법(護法)의 견해를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29) 용수(龍樹)는 『중론(中論)』 제24장 〈관사제품〉 제11송에서 “공성을 잘못 파악하면 지혜가 낮은 이를 파멸시키니, 이는 주술을 잘못 걸다 도리어 해를 입거나 뱀을 독니 쪽으로 잘못 잡다가 물리는 것과 같다(canayā dṛṣṭayā śūnyatā mandamedhasaṃ vināśayati durgrhītā sarpasiva khalakā vā)”라고 엄중히 경고하였다.〔용수 지음•정화 풀어씀(2014), 『중론中論』 535면 등〕
30)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라는 기본 개념 자체가 집권 세력 이외의 인권을 박멸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최고 존엄’이라는 용어를 부끄러움 없이 사용하는 것도 같다.
31)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경제 체제는 토지·자본·기술은 물론 노동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시장을 통한 자율적 교역을 금지하며, 중앙 권력의 명령과 계획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을 도그마로 삼으므로 사적 생산과 자유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사적 소유권의 보장과 사적 자치의 원칙은 단순한 물질적 탐욕의 허용이 아니라, 인간이 국가 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서 존엄성과 자유를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담보이다. 하이에크(F.A.Hayek)가 지적했듯, 생산수단을 독점한 국가 권력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직업·거주·사상까지 지배하여 인류를 ‘노예의 길’로 이끌게 된다. 또한, 사회주의 명령경제 체제가 실패한 것은 인간의 이기심을 통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소유와 교환 속에서 형성되는 '시장가격(Market Price)'이라는 합리적 신호 체계를 인위적으로 소멸시켰기 때문이다(미제스의 '사회주의 경제계산 불가능의 정리'). 가격이라는 지표 없이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경제적 합리성을 달성할 방법이 없으므로, 권력의 독단적 계획은 필연적으로 참혹한 빈곤과 공급 부족을 낳을 수밖에 없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좌파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동일시하는 세간의 선전 역시 완전한 왜곡이자 억지이다. 경제적 예측과 유도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계획'은 소시민이나 기업이 세우는 미래 계획과 마찬가지로 시장의 합리성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사적 소유권과 시장을 원천 부정하는 체제에서 자원의 강제 배분을 위해 작동하는 명령경제체제의 계획과, 사적 소유와 자유시장 경쟁을 전제로 하여 가격 신호를 중심으로 수립되는 시장경제체제의 경제계획은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32) 공산-사회주의 국가에도 헌법이나 법률의 형식을 갖춘 규범이 존재하고 외견상 준법을 강조하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Rule of Law)가 아니라 권위주의 권력이 법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법을 통한 지배(Rule by Law)’에 불과하다. 진정한 법치주의는 통치권자 역시 법에 구속되어야 한다는 '법의 우위'와, 피치자의 자유로운 정치 참여 및 권력분립을 전제로 한다. 반면,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구성원 전체를 구속하는 최고 가치로 '당(黨)의 지시'나 '수령의 교시'가 법 위에 군림하므로 통치 불가능한 절대 권력이 상존한다. 또한 규범의 명확성 원칙•포괄위임 금지•소급입법 금지와 같은 법적 안정성의 기초가 부정되기 일쑤이며,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의 원칙이나 과잉금지원칙(비례성의 원칙) 등 국가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기본권을 수호하기 위한 본질적 안전장치가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의 법은 인권 보장의 보루가 아니라, 오직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당적(黨的) 목표와 권력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한 기술적·강제적 도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자유민주주의의 법치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33) 일주문의 기둥은 앞에서 볼 때 2개 또는 4개이지만, 옆으로 보면 반드시 한 줄인데, 이것은 앞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한 역동적 균형으로서의 중도를 보일 뿐만 아니라, 세속과 성스러움을 하나로 모으되 담벽이나 문을 두지 아니하여 서로 상통할 수 있게 함으로써 중도와 불이를 표현하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34) 천왕문에는 4명의 수호신장이 모셔져 있는데, 본질의 세계인 전각에 들어가기 전에 내면의 찌꺼기까지 털어내도록 돕는 강력한 '영적 소독 장치'이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비파(琵琶)를 들고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안락하게 하며,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보검(寶劍)을 들고 위덕으로 만물을 소생시키며,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의 모습으로 여의주나 탑을 들고 악인을 벌하고 구도심을 내게 하며,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장도나 탑 또는 깃발을 들고 불법을 옹호한다.
35) 불이문은 전각이 있는 중심 마당 바로 앞에 위치하는 문으로서 단독 문 형태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대웅전 마당 축대 밑에 보제루(普濟樓)나 만세루(萬歲樓) 같은 누각을 세우고 그 밑을 계단을 통하여 오르도록 만들기도 하는데, '이분법적 번뇌의 어둠(사바세계)'에서 '절대 평등의 밝은 지혜(불국토)'로 차원이 전환됨을 체감하게 하는 건축적 연출이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 같아서 쪼갤 수 없는 하나이고(생사불이), 번뇌를 잘라 버리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본질을 깊이 통찰하는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라는 번뇌즉보리, 나아가 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본래 차별이 없어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곧 부처라는 심불중생 3무차별(心佛衆生 三無差別)의 표현이다.
36) 대웅은 석가모니 부처님, 적광(寂光)은 비로자나 부처님을 뜻한다. 부처님 모신 집은 궁(宮) 또는 전(殿), 보살 모신 집은 각(閣)으로 하나, 더러 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 보살 모신 집을 전으로 칭하기도 한다. 3성각은 통상 독성(獨聖 나반존자)과 산신 및 칠성을 모신 집이지만, 통도사의 3성각은 지공•나옹•무학 3대사를 모신 집이다.
37) 김부식은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제1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 조항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새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라고 썼고, 정도전이 이를 경복궁 건축 원칙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근본은 불교의 중도 미학적 지향과도 깊이 상통한다 할 것이다.
구상진|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 법학과 교수 및 동 대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변호사,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명예회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한국불교와 자유민주주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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