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그으며 읽는 책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풀어본 반야심경』
반야에 대하여
보통 사람들이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기반은 두 가지이다. 하나의 기반은 실체론적 사고이고 다른 또 하나의 기반은 이분법적 판단이다. 실체론적 사고란 이 세상에는 실체를 가진 존재들이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킨다고 보는 것이고, 이분법적 판단이란 사물을 주와 객, 음과 양 등 논리적으로 대립되는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보고 이들을 좋고 나쁨,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성적 사유란 바로 이분법적 판단으로 사물을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어 보고, 논리의 법칙에 따라 사물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는 이성적 사유에 의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불교에서는 이성적 사유를 가리켜 분별지(分別智, kalpanā-jñāna)라고 하며, 분별지로 얻은 지식에는 어떤 한계가 있어 분별지로써는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본다.¹
바른 견해를 갖는 것, 즉 진리를 아는 것은 서양철학이나 불교나 또 다른 모든 철학이나 종교에서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태도 중 유명한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일 것이다. 그는 확실한 것 하나를 토대로 사물의 참모습을 알아내려고 하였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생각을 한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다.² 데카르트는 이렇게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얻은 하나의 결론을 바탕으로 정신과 물질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실체로 보고, 정신-물질 이원론에 바탕을 둔 그의 철학을 구성하였다. 데카르트는 철저하게 이성적 사유를 통해 이런 결론을 얻은 것이다. 그는 오온개공과 정반대의 결론을 얻고 그의 철학을 구성하였으며, 그의 철학과 수학은 그 후 뉴턴의 고전역학이 탄생하는 데 크게 기여를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정신-물질 이원론은 철학적으로 문제가 있어 요즈음은 유물론이 과학계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다.³ 그렇지만 정신-물질 이원론이든 유물론이든 실체론은 모두 문제가 있다. 더욱이 앞서 소개한 리 스몰린과 카를로 로벨리가 설명한 바와 같이 세상에는 근사적이고 임시적인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없다. 즉 이 세상에 실체가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스티븐 핑커가 말한 바와 같이 '아(我)'라는 것도 없다. 즉 과학적으로 보면 오온이 모두 공하다. 양자 현상을 관찰하고 얻은 입장에서 볼 때, 데카르트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잘못된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물질이 '공'하다는 것은 양자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얻은 결론인데, 불교에서는 어떻게 일체 사물에 실체가 없음(오온개공)을 알았을까?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라고 하여 반야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떤 사찰의 일주문에는 "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 알음알이(분별지)를 버려라"고 써놓을 정도로, 불교에서는,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이성적 사유를 벗어나야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불교에서는 진리는 반드시 반야로 직관하여야 한다고 본다. 부처님도 그렇게 설한다. 몇 개만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삼매에 들면 있는 사물의 참모습을 분명히 안다."⁴
"삼매에 들지 못하면 진리를 알 수 없다."⁵
삼매(三昧, samādhi)는 불교와 요가의 수행에서 깊은 선정에 들어 잡념을 떠나서 한 가지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말하는데, 이 경지에서 바른 지혜를 얻고 대상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 삼매의 경지에서 사물의 참모습을 직관하는 지혜가 반야이다. 반야와 삼매는 서양철학과 서양의 종교에는 없는 개념이다. 서양의 종교에서 기도 중에 황홀경(trance)에 이르기도 하고 최면상태에서 황홀경에 이르는 경우가 있으나, 불교의 삼매와 서양에서 말하는 트랜스 상태는 그 뜻이 전혀 다르다. 서양의 종교나 최면상태에서 황홀경에 이른 사람은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어떤 힘에 끌려 신비한 체험을 하거나 완전한 무의식 상태에서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어떤 능력을 보이는 데 반해, 불교의 선정삼매는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거나 능력을 보인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어보자.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감각과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윔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이선, 삼선에 들고 …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비상비비상처에 들고, …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의 초월적 능력을 경험한다."⁶
반야는 범어 프라즈나(prajñā), 팔리어 빤냐(paññā)에 대한 음역으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뛰어난 지혜를 말한다. 반야는 주객의 대립을 전제한 분별지가 아니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무분별의 지혜를 이르는 말이다. 반야의 내용은 선정의 체험을 통하여 현상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는 것이며, 모든 현상이 '공'하다는 것이다. 부처님과 불교의 수행자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반야를 통해서 깨달음은 성취되며, 현실 세계에서는 반야가 자비로써 작용한다. 반야는 일반적 판단 능력인 분별지가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의미한다. 반야는 어디까지나 주객의 대립을 초월한 경지에서 감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의식이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지식과는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체험이 없는 사람은 반야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렵긴 하지만 선 수행을 깊이 있게 수행하고 삼매를 경험한 하버드 대학교의 신경과학자 제임스 오스틴(James H. Austin, 1925~)의 설명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틴은 이렇게 설명한다.
"강한 집중이 지속적으로 형성되면서 신체적 자아의 감각이 사라지고 합일되는 느낌이 생긴다. 또 다른 경우에는 모든 욕구에서 해방되기도 한다. … 황홀한 진공으로 가득 차서 신체적 자아는 사라져 버리고 거대한 공간은 환희와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된다. 거기에는 사고도, 외적 시각도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 체험의 역설이 넘쳐난다. 한없이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공존하고 색과 공이 동시에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 무아의 경지에서 매순간 현재로서만 살아간다. 이 경지에서는 이전에 선과 악이라고 이름 붙인 그런 상태에서 자유롭다. 선과 악을 잘 판단하여 공명정대하고 스스로 윤리적이었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벗어나 있다."⁷
제임스 오스틴은 이 말을 통해 삼매에 들어서 선악을 보는 관점과 이성적 사유로 선악을 보는 관점의 차이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삼매의 경지에서는 선과 악이라고 이름 붙인 그런 상태에서 자유로운데, 그것은 이성적 사유로 잘 판단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고 선과 악을 판단할 필요 없이 저절로 자유로운 것이다. 반면에 이성적 사유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어느 것이 옳다고 판단하면 마음이 그 판단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이성적 사유로 얻은 결론에는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수 있으므로 마음과 생각이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삼매에 들어 반야의 눈을 뜨게 되면 생각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진리를 보게 되고,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된다.
쉽게 말해 반야의 눈을 뜨려면 탐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그릇된 욕망에서 벗어나 집착하는 바가 없어 마음이 자유로우며, 성내고 짜증내는 마음에서 벗어나 마음이 평화롭고 안정되어 있으며, 어리석은 마음에서 벗어나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 그 마음이 지혜롭고 어질 때, 반야의 눈이 떠지고 사물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반야로 사물을 직관하는 것과 오관으로 사물을 보고 이성적 사유로 판단하는 것의 차이는 위에서 이미 데카르트의 정신-물질 이원론에서 설명한 바이지만,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중도의 이치다. 『반야심경』이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그렇고, 부처님이 설하는 존재-비존재를 떠나 중도를 취한다거나, 상주-단멸을 떠나 중도를 취한다는 것이 바로 좋은 예다. 존재-비존재를 떠나 중도를 취한다는 것은 이성적 사유로 비추어 볼 때 도대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존재하면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존재-비존재를 떠나 중도를 취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물리학자 리 스몰린과 카를로 로벨리가 한 말을 되새겨 보고, 그들의 말을 빛으로 삼아 존재-비존재라는 말을 비추어 보자. 그들이 한 말이 바로 존재-비존재의 중도이자 색즉시공과 같은 표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도를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더 들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양자 현상 중 하나인 상태의 중첩(重疊, superposition)이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이성적 판단으로는 전기 스위치가 켜져 있거나(on) 아니면 꺼져 있는 것이지(off), 켜져 있기도 하고 꺼져 있기도 한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미시세계의 소립자들은 논리적으로 전기 스위치가 켜져 있기도 하고 꺼져 있기도 한 것과 같은 상태를 취한다. 중첩 상태 역시 존재-비존재의 중도를 말해 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사실 사물에 실체가 없다면 존재-비존재를 떠나 중도를 취한다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부처님은 분별의 대가이다. 불교 경전은 모두 논리적으로 잘 분별하여 앞뒤 이치에 맞게 설하고 있다. 부처님은 존재-비존재의 중도가 논리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반야심경』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색즉시공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썼다. 그것이 사물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양자 현상은 물리학자들이 측정 기구를 이용하여 관찰한 것이지만, 그런 도구도 없던 시대에 부처님과 『반야심경』의 저자는 중도의 이치를 어떻게 알았을까? 『반야심경』에 의하면, 또 부처님의 설법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반야의 힘이다. 그들은 반야로 사물의 참모습을 직관한 것이다.
반야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바닥이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탐진치에서 벗어난 맑은 마음으로 보면 사물의 참모습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어지러우면 흙탕물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무리 좋은 도구를 사용하여도 그 바닥의 참모습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이성적 사유만으로는 결코 사물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반야의 뜻이다. 실제로 인간의 이성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수학적 증명이 있다.
¹ 분별이란 사물을 차별하여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어 보는 것을 뜻하며, 분별지란 분별한 것에 개념 작용을 첨가한 인식으로서 이성적으로 사물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얻는 지혜를 뜻한다. 반면에 무분별지(無分別智), 즉 반야는 언어적 분별을 초월하여 사물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는 지혜, 전체를 보는 지혜를 뜻한다.
² 데카르트 저, 권오석 옮김, 『방법서설』, 흥신문화사, 2006, p.45.
³ 존 R. 설 저, 정승현 번역, 『마인드』, 까치, 2007. 이 책에서는 이원론과 유물론과 같은 실체론이 갖는 문제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⁴ 『쌍윳따니까야』 22: 5, 「삼매의 경」; 『쌍윳따니까야』 35: 99, 「삼매의 경」; 『쌍윳따니까야』 35: 160, 「삼매의 경」.
⁵ 『쌍윳따니까야』 35: 97, 「방일한 삶의 경」.
⁶ 『쌍윳따니까야』 16: 9, 「선정과 곧바른 앎의 경」.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깨어 있는 상태에서 깊은 선정 체험을 한다고 설한다.
⁷ 제임스 H. 오스틴 지음, 이성동 옮김, 『선과 뇌의 향연』, 대숲바람, 2012, pp.51~53.
신진욱|동국대학교 법학과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Worcester State University에서 연수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 사무국장, MSC Trained Teacher, 대한불교조계종 선명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 『드디어 시작하는 명상입문』이 있고, 공역서로 『깨달음의 길』, 『이 세상은 나의 사랑이며 또한 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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