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믿음이 아닌 수행이어야 하는가
재가자의 바라밀다
법(Dhamma)
’법(法, dhamma)’은 본래 우주와 삶을 지배하는 질서와 규범을 가리키던 고대 인도의 베다-브라만교 용어이다. 붓다는 이 전통적 개념을 빌려오되, 그것을 전복적으로 재해석해 드러난 유일한 ‘실재(Reality),’ 곧 ‘이것’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했다.
붓다에게 법이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때 드러나는 ‘연기법칙(緣起法則)’이며, 그 조건적 발생의 흐름 속에서 고통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보여주는 해법이기도 하다. 붓다가 설한 법은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이 아니라, 인간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의 ‘정도(正道)’이자 동시에 유일무이한 ‘이것’ 그 자체이다.
법은 하늘의 해와 달처럼 자명하다. 그 존재 이유도, 별도의 설명도 필요 없는 드러난 ‘이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쉽게 보지 못한다. 과학 이론이 밝혀내는 새로운 ‘진리’에 사람들은 흥분하지만, 지금 이 찰나의 순간 그 자체가 바로 절대적인 ‘실재(Reality),’ 즉 법임을 보지 못한다.
고타마 붓다가 통찰한 것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라, 이미 작동하고 있는 자연의 질서—‘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였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이 단순한 자연 현상 안에 모든 삶의 비밀이 담겨 있다.
법을 보지 못하는 이유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자연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보다,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도록 길들여졌다. 붓다는 이를 ‘무명(無明, avijjā)’이라 불렀다. 무명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고통을 유발하는 삶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생물학적 인식의 구조적 왜곡이다. 즉, 인간 인식 체계가 가진 ‘진화론적 부작용’인 셈이다.
인간의 신경계는 생존을 위해 단기적인 자극과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다. 이 경향성은 생물학적 생존에는 유리했을지 모르나, 현대인의 삶을 과도한 심리적 ‘고통(苦, dukkha)’에 시달리게 만드는 근원이 되었다.
붓다가 통찰한 ‘고(苦)’는 단순한 신체적 통증이 아니라 인간 특유의 인지적 고통이다. 생리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고저를 반복하는 호르몬 현상과 우리 뇌의 시뮬레이션 기능이 맞물려 일어나는 연쇄 반응이다. 현생 인류는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의 불안을 상상하는 고도의 능력을 갖추었으나, 파충류 시절 형성된 스트레스 호르몬 체계는 그것이 단지 뇌의 시뮬레이션일 뿐이라는 사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붓다가 말한 ‘고(苦)’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흥분 상태인 행복감도 포함된다. 그 도취적인 행복 역시 결국은 소멸할 수밖에 없는 생리적 호르몬 작용의 한 이면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수행은 진화적으로 고착된 이 생리적 조건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수행이란 자신의 자동반응 체계를 명확히 자각하고, 그 내밀한 알고리즘을 점진적으로 재배열해 나가는 순차적 노력이다.
‘불교’라는 이름의 장막
문제는 법(Dhamma)이라는 본질 위에 덧씌워진 형식이다. 우리는 ‘불교’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사찰과 의례, 기복과 교리, 그리고 종교적 권위를 마주한다. 그러나 붓다가 가리킨 것은 제도나 신앙이 아니라 오직 법이었다. 그는 사후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으며, 대신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법과 율(Dhamma-Vinaya)만을 그대들의 스승으로 삼으라.” 또한 “법을 보는 이는 곧 나를 보는 것”이라 덧붙였다. 이는 붓다 자신조차 맹목적인 의존의 대상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 속의 불교는 점차 종교의 형식을 갖추며 붓다를 신격화했고, 열반을 현세를 초월한 어떤 이상 세계로 박제해 버렸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대중을 이끌기 위한 ‘방편(方便, upāya)’으로서 기능해 왔다. 하지만 방편은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일 뿐,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실체가 아니다. 불교를 신앙적 종교로만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보는’ 노력을 멈추고 ‘믿음’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명한 법을 가로막는 또 다른 장막이다.
경전, 언어라는 이름의 장막
경전 역시 ‘법(Dhamma)’ 그 자체는 아니다.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한문으로 이어진 전승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시대적 해석과 번역의 왜곡이 개입된다. 초기 경전조차 붓다 사후 수백 년에 걸친 구전과 편집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법의 본질을 흔들지는 못한다. 법은 결코 문자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은 목적지로 향하는 지도일 뿐이다. 지도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자의 해석과 교리적 논쟁에 집착하는 순간, 그것은 자유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갈애(渴愛, taṇhā)’가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법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실재, 즉 ‘이것’에서만 확인된다. 불법의 중심은 제도화된 불교가 아니라 수행 그 자체에 있다. 그것은 직접적인 관찰과 알아차림, 곧 매 순간 ‘깨어 있음(sati)’으로만 증명되는 실천의 영역이다.
스스로 등불이 되는 용기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오로지 법과 율에 의지하여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살아가라.” 자신이 드러낸 법이 박제된 종교나 신앙으로 변질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권위에도 기대지 말라.” 심지어 붓다 자신에게조차 의존하지 말라는 이 치열한 가르침은, ‘깨어 있음(sati)’이란 오직 각자의 내면적 경험을 통해서만 확인 가능한 ‘이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공동체나 제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철저히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투쟁이다. 진리의 길은 도반과 함께 걸을 수 있지만, 그 길 위에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는 오직 각자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 깨어 있어 줄 수는 없다.
‘깨달음’이라는 환상
불법이 어렵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작동하도록 우리 몸이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나’라는 실체에 대한 집착은, 뇌가 신체를 보호하고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해 낸 고도의 알고리즘적 장치다. 붓다의 ‘제법무아(諸法無我, anattā)’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 흔히 쓰는 ‘깨달음’이나 ‘깨달은 자’라는 표현도 엄밀히 말하면 법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어떤 존재가 성취하거나 획득하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번뇌의 조건이 사라질 때 드러나는 찰나의 연기적 작용일 뿐이다. 갈애와 동일시가 멈추는 바로 그 순간, 열반의 성질이 잠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작용을 '체득한 고정된 존재'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본질에 대한 오해이자 또 다른 집착이다.
‘깨달음’은 생애 단 한 번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 안에서조차 '깨닫고 있는 나'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란 전전두엽의 이성적 기능을 활용해, 뇌가 생존을 위해 가동하는 ‘망상 기능’—과거의 반추와 미래의 투사—이 편도체를 자극하여 과도한 호르몬 반응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지극히 과학적인 자기 조율이다.
불교의 초월과 이상
불교가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도 수행 전통을 이어온 이유는 붓다의 가르침이 지닌 형이상학적 깊이나 권위 때문이 아니다. 단 하나, ‘깨어 있음(念, sati)’이 실제로 고통을 줄인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검증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띠’는 특별한 심리적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몸이 만들어내는 자동반응 이전의 찰나적 알아차림이다. 이 알아차림과 자동반응 사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우리 몸에 설정된 알고리즘이 생성하는 고통은 줄어들며, 나아가 생물학적 작동원리 자체를 조율해 나갈 수 있게 된다. 붓다가 몸·느낌·마음·법을 관찰하는 ‘사념처(四念處)’ 수행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갈애가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릴 때 대상과의 동일시는 약화되고, 그로 인한 고통의 연쇄도 점차 느슨해진다.
고통의 연결 고리를 한두 번 끊었다고 해서 삶의 고통이 완전히 중단되지는 않는다. 평생을 정진한 도인이라 해도 일체의 통증조차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 역시 대열반 직전, 노쇠한 신체의 고통을 숨기지 않았다. 고통은 그 조건이 갖춰지면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발생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숙명과 한계를 부인하는 것은 망상이지 불교가 아니다.
우리는 통제 밖에 있는 삶의 조건 자체를 단번에 바꿀 수는 없다. 다만, 몸의 자동반응을 미리 알아채고 바라봄으로써, 불필요한 심리적 고통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약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알고리즘을 반복적으로 직시할 때—즉 법을 볼 때—고통을 생성하는 기제 자체가 약화되고, 나아가 세계를 인식하는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것은 개인의 세계관이 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식되는 우주와 세계가 ‘객관적으로’ 천지개벽하는 것과 다름없다.
법은 제도나 경전, 혹은 신앙의 형식 속에 박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고통이 어떻게 생겨나고 사라지는지를 보는 바로 그 찰나의 자리에서 드러난다. 그것이 진정한 불교의 초월이며 이상이고, 또한 열반이다.
남시중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저널리즘 석사(MSJ)를,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개를 위한 변명-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대한 철학적 성찰』,『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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