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삶을 바꾸는 사성제(四聖諦)]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중 마지막 단계인 도성제(道聖諦)는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시키고 해탈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이론적인 깨달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수행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행한 첫 설법으로 알려진 팔정도(八正道)는 이 도성제의 핵심 내용이다. 따라서 팔정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이를 삼학(三學)인 계(戒)·정(定)·혜(慧)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올바름」의 깊은 뜻
팔정도는 부처님이 깨치신 이후 녹야원에서 행한 첫 번째의 설법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대각의 내용을 가장 순수하게 설명한 깨침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라는 설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여덟 번을 반복하고 있는 「올바름」이라는 표현이다. 과거 서양의 신학자들이 상투적으로 반복해온 불교 폄훼의 논리가 있었다. 즉 기독교에서는 '성스러움'이라는 교리가 있지만, 불교에서는 그 성(聖)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종교의 핵심은 이 성스러움에 대한 외경과 믿음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이성적인 논구(論究)에만 집착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불교는 종교라기에는 부족한 철학일 뿐이라는 논리이다. 간혹 불자들 중에서도 불교를 철학이라고 일컫는 이들도 있고, 또 그와 같은 주장이 불교를 높이는 것이라는 어이없는 망상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성스러움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은 불교를 자신들과의 동격이 아닌, 한 수 아래라는 교만심이 가득한 억지주장일 뿐이다.
성스러워야만 종교일까? 부처님의 대답은 바로 「올바름」이다. 생각이 올바르고, 행동과 마음이 올바를 때 비로소 인간의 본성은 회복된다. 즉 불교는 성스러움을 따르는 종교가 아니라 올바름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이 팔정도는 불교가 중생을 교화하는 첫 단계이다. 나중에는 이 수행을 37각지(覺支) 안에 포함시켜서 서른일곱의 조도(助道) 즉 완성을 향한 수행이라고 묘사한다. 팔정도를 삼학(三學)으로 압축해온 교학은 고집(苦集)에서 말했던 삼독(三毒) 제거를 위해 그 수를 맞춘 것이며 이것은 팔고(八苦)의 극복을 위해 제시한 팔정도의 숫자도 마찬가지이다.
① 계(戒) : 윤리적 실천
삼학의 첫 번째는 '계'이다. 이 낱말은 불교도들이 지켜야 할 행동강령이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지고 엄숙한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를 가까이하고 싶어도 오계를 접할 때마다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이들도 많다. 특히 첫머리에 나오는 불살생이 그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오랫동안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에 젖어온 이들에게 모든 생명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불교는 나약한 패배주의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계'를 윤리적 실천이라고 번역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윤리적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고대 희랍철학의 핵심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였다. 그들 이전의 소피스트들은 철저한 자연주의 철학의 신봉자들이었다. 자연현상의 배후에는 무슨 원칙이 존재하는가. 자연의 섭리와 질서는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집중적으로 논구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자연주의적 관심 대신에 인간의 문제에 천착하였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아버지로 부르게 된 근본원인이기도 하다.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는 좌우명을 내건 그는 이 인간의 문제를 철학적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선각자였다. 그의 학문적 손자인 아리스토텔레스도 그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 이전에 있었던 인간탐구의 결론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인간은 언어를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등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자 윤리적 존재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였다. 이 점은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되는 결정적 조건이었다. 따라서 계는 그 윤리성을 말하는 불교적 표현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사람다울 때 그 고결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그 사람다움이 바로 윤리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인간의 행위는 선행과 악행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양자구분이 모호한 경우도 있다. 불교에서는 그 중간 형태를 무기업(無記業)이라고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행을 말하면서 반복적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명언인 '한 마리의 제비가 온다고 해서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한두 번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또 흉악무도한 악인도 가끔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어쩌다 악인이 선행을 베푼다 해도 악인이 선인이 될 수는 없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에서는 그 선악의 근원을 업(業, Karma)으로 규정한다. 업에는 선천적 업과 후천적 업의 구분이 있다. 선천성이란 것은 태어날 때의 내 소질, 성격 즉 DNA를 가리킨다. 반면 후천적 업은 교육, 환경 등으로 형성되는 업장을 말한다. 그 비율은 반반이다. 따라서 윤리적 실천을 완성시키려면 끊임없는 인격적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인격이 있듯이 나라에도 국격(國格)이 있는 법이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꼽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그 윤리적 인격성이 높다는 점이다. 미국은 「정직」을 사회윤리의 표본으로 삼는다. 그들은 「거짓말」을 패악으로 여기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 일본은 「폐 끼치지 않음」이 국민들의 공감대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윤리성 성적표는 여전히 중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② 정(定) : 올바른 마음가짐
정은 선정 즉 자나(Dhyana)의 준말이다. 이 단어 속에는 올바름을 얻기 위한 정신 집중의 뜻이 담겨 있다. 간혹 선정을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명백한 오역(誤譯)이다. 메디테이트란 말은 명상을 뜻한다. 그러나 선정은 컨센트레이션(Concentration)이라는 번역이 올바르다. 즉 정신 집중이다. 이 선정의 수행 방법은 부처님 때부터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불교 수행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선정 수행은 남종선(南宗禪)이었지만, 최근에는 위파싸나(Vipassana), 티벳선 등도 많은 호응을 얻는 추세이다.
남종선의 핵심은 화두(話頭)를 깨트리는 간화선이다. 인간의 근원적 의혹을 화두로 정형화(定型化)하고, 그 의혹의 안개를 깨트릴 때 원만한 해탈을 얻는다는 가르침이다. 육조혜능(638~713)의 법계(法系)에서 출현한 임제의현(?~867)은 이 간화선을 완성시킨 인물로 꼽힌다. 번뇌망상을 깨는 방편으로 할(喝)이라는 대갈일성(大喝一聲)을 펴기도 하고, 주장자를 치켜드는 상징성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이미 사라진 화두선을 오롯이 보전하고 있는 유일한 불교국가이기도 하다.
위파싸나(Vipassana) 선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이다. 간혹 지관(止觀)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 수행은 동남아시아의 장로불교 전통 속에 계승되고 있다. '그대로 본다'는 것은 알아차림(Sati)이라고 한다. 알아차림은 객관적 관찰 방법이다. 흔히 관찰의 사법(四法)이라고 하는데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네 가지이다. 나의 몸, 느낌, 마음의 동요, 법의 전개 등을 투명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것은 불과 30년 남짓하지만, 그 실용성과 용이한 접근성 때문에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③ 혜(慧) : 반야의 현전화(現前化)
대승불교의 핵심적 술어 가운데 하나는 반야(般若)이다. 쁘라즈냐(Prajna)의 음역(音譯)인데 즈냐라는 말에 쁘라라는 접두어를 붙인 경우이다. 즈냐는 '안다' '인식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 인간의 앎을 객관적이지 않은 편견으로 가득찬 부족한 '앎'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언제나 나의 이기심을 전제로 하는 앎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쁘라즈냐의 원래 뜻은 '초월적 예지' '절대 완전의 지혜'라는 뜻이다. 일반적 인식은 분별지(分別智)라고 한다. 늘 나와 남을 가르고, 자그마한 일도 '나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는가'를 따지는 이기적 심사이기 때문이다. 이 완전한 예지를 얻은 경지에 대한 가르침이『반야심경』이다. 반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은 오온개공(五蘊皆空) : 인격을 구성하는 색(色, 물질), 수(受, 느낌), 상(想, 상상), 행(行, 잠재적 무의식력), 식(識, 마음)이 모두 영원하지 못할 뿐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 물질은 공허하며 공허한 것이 물질이다.
나는 반야에 세 가지 현대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생명의 본질을 통찰하는 힘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한다. 그 안에 감추어진 진실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반야는 생명의 본질을 꿰뚫는 형안(炯眼)이다. 둘째, 나고 죽음의 번민을 극복하는 힘이다. 태어나는 것은 없어지지만, 그것은 또다른 형태의 삶으로 이어진다. 이 윤회의 사슬을 끊는 힘이 반야이다. 옛 선사들의 가르침 가운데 '나고 죽음이 없다'는 표현이 있다. 나는 태어났고 또 언젠가 죽는다. 그런데 나고 죽음이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나는 이 우주의 한량없는 생명체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만으로 따지면 80억분의 1이고, 동물·식물 모든 생명체를 합해서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양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내가 죽으면 이 세계와 우주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 만약에 나의 존재가 그 도도한 생명의 물결 속에 있는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면, 나의 죽음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의 죽음을 대신하는 또 다른 삶이 있기 때문이다. 옛 선사들은 나라는 존재를 그 거대한 물결 속의 존재로 승화시킨 것이다.
셋째, 반야는 '더불어 사는 지혜'이다. 나의 존재는 가깝게는 부모 형제, 멀리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나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물, 불, 바람, 공기, 태양 등 많은 외부적 조건이 필요하다. 즉 나는 독자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들을 향한 연민, 자비, 호혜(互惠)의 입장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내가 없으면 남도 없지만 남이 사라지면 나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을 위한 헌신, 나와 남의 동질성을 이해할 때, 나는 보살이 된다. 남을 도울 때는 관세음보살이고, 남을 깨우칠 때는 문수보살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때는 금강역사가 된다. 즉 반야는 보살정신을 실천하는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이 계·정·혜의 삼학은 중생을 보살로 살게 하는 가장 소중한 불교적 진리이다.
정병조|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및 영남대 대학원 석사,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 네루(Nuhru)대 교수 및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사)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동국대 부총장, 금강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철학사상사』,『불교문화사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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