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 : 인식의 교정을 통한 우주적 불국토의 건설

[현대인의 삶을 바꾸는 사성제(四聖諦)]



사성제(四聖諦)는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

불교의 불법승(佛法僧) 3보는 부처님께서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신 후 5비구에게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를 설하는 초전법륜(初轉法輪)을 베풀어 깨닫게 하심으로써 성립되었다.

부처님께서는 6년가량 극한의 고행을 하시다가, BC 589년 12월 7일1) 아침 네란자라 강에서 목욕하신 후 수자타가 공양한 우유 죽을 드시어 기운을 차리고서는 붇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드셨다. 밤새도록 마왕 파순의 유혹과 공격을 물리치시면서, 초저녁에는 전생의 일을 아는 지혜를 얻으시고, 한밤중에는 중생이 업에 따라 나고 죽는 이치를 깨달으셨으며, 8일 새벽별이 밝게 빛나는 순간, 모든 번뇌가 끊어지고 우주의 실상인 연기법과 사성제를 완전히 깨달아 '부처님(Buddha)'이 되셨다.

이후 대각의 선열에 들어 계시는 동안 5주째에 범천(梵天; Brahmā)의 3회에 걸친 청을 받고2) 전법하시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49일째에 두 상인의 공양을 받으신 후 전법행(傳法行)을 시작하셨다. 10여일 동안 250㎞ 가량을 걸어서 2월 8일경3) 녹야원4)에 이르셨고, 교진여 등 5인에게 4성제를 설하여 처음으로 깨우치게 하셨으므로, 4성제는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 부분이다.5)

사성제(四聖諦)의 내용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을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고제)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집제)이며,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멸제)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도제)이다.”라고 마무리하셨다.

고제(苦諦)는 인생의 일상이 고통임을 밝힌 가르침이다.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생물학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져야 하고(愛別離), 미운 것과 만나야 하며(怨憎會), 구하고자 해도 얻지 못하는(求不得) 심리적 결핍도 겪기 마련이다. 붓다는 고통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하여 먼저 이러한 현실을 회피하거나 호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직시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6)

집제(集諦)는 고통의 발생 원인 규명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원인이 나와 대상 등 모든 존재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연기(緣起)의 법칙 아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알지 못하고 나와 내 것, 내 의견 등을 ‘집착(集)’하고 ‘갈애(渴愛)’하는 데에 있음을 밝혔다.

멸제(滅諦)는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 즉 ‘열반(涅槃)’이다. 이는 단순히 고통이 없는 진공 상태가 아니라,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貪·瞋·癡)이라는 세 가지 불길이 꺼진 평온의 상태를 말한다.

도제(道諦)는 멸제에 이르는 실천의 길로서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제이 가필드(Jay L. Garfield) 박사는 『불교 윤리학: 철학적 탐구』에서 사성제(四聖諦)를 보다 심층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고제에 대하여는 ‘두카’는 ‘잘함’이나 ‘편안함’을 뜻하는 ‘수카(sukha)’의 반대말로서, 단순히 신체적 통증만을 의미하지 않고, ‘불만족스러움’, ‘축이 어긋난 바퀴처럼 매끄럽지 못한 상태’,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를 모두 포괄한다고 하면서, 이를 고고성(苦苦性), 괴고성(壞苦性) 및 행고성(行苦性)이 항상한다는 의미7)로 설명하고 있다.

집제는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애착(탐욕)과 혐오(嗔心)로서 영원하지 않은 대상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소유하려 들거나(애착), 원치 않는 상황을 억지로 밀어내려 함으로써(혐오) 현실과 욕망 사이의 괴리를 만들어내는데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근원적 미혹(무명, avidyā)’이라고 한다. 이는 실재의 본질을 오해하는 인식론적 결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영속적이고 독립적인 ‘자아(self)’로 착각하여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 여기는 태도가 모든 집착의 뿌리가 된다고 본다.

멸제는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 또한 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서, 탐욕·분노·미혹이라는 ‘세 가지 불길’이 꺼진 평온한 상태인 ‘열반(nirvana)’의 상태가 존재함을 보이는 것이다.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인 ‘팔정도(八正道)’의 도제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는(正思惟) 지혜,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며(正業), 바르게 생활하는(正命) 계행(戒行),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르게 깨어 있으며(正念), 바르게 집중하는(正定) 수행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단편적인 행동이나 심경의 변화가 아니라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의 전면적인 전환을 통하여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 불교 수행이라는 것이다.

<사성제에 관련된 의문에 대한 AI 답변>

(1) 입력치 변경으로 온갖 번뇌가 다 극복되나?

도덕현상학적 관점에서 번뇌는 외부 세계의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주체의 인식 시스템이 세상을 왜곡하여 받아들인 결과물이다. 사성제는 고통의 환경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인 ‘입력치’를 근본적으로 교정하는 작업이다. 무명(無明)이라는 인식론적 결함을 치유하고, 연기(緣起)의 이치에 따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되면, 집착의 뿌리가 사라지므로 온갖 번뇌는 자연히 눈 녹듯 사라지게 된다.

(2) 무한 승복이 사성제의 취지인가?

사성제의 고제(苦諦)가 강조하는 ‘여실히 봄(如實知見)’은 결코 현실을 무조건 수용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 진정한 취지는 정확한 ‘인식적 정직성’에 기초하여 가장 강력하고 능동적인 대응을 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현실을 호도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고제)이야 말로 고통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여(집제)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첫 단추다. 이치에 근거하여 현실을 똑바로 읽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맹목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불국토로 회복시키는 주체적인 행위(도제)로 나아갈 수 있다.

(3) 속인의 순간 쾌락은 무의미한가?

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에서 보듯,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맛보는 ‘다섯 방울의 꿀’은 찰나의 달콤함은 주지만 그 대가는 종국적 파멸이다. 속인의 쾌락 자체가 악한 것이라기보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무상(無常)의 이치를 망각하고 매달리는 ‘맹목성’이 문제인 것이다. 사성제는 이 찰나의 쾌락을 넘어, 탐·진·치라는 세 가지 불길이 꺼진 근원적이고 평온한 상태인 ‘열반(선열)’의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4) 악이 왜 발생하며, 악은 파멸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나?

악은 우주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실재의 본질을 오해하는 ‘근원적 미혹(무명)’에서 비롯된 그림자다. 자신을 독립된 ‘자아’로 착각하여 타자를 공격하고 패권을 휘두르는 맹목적 탐욕은, 결국 연기적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기에 자멸이라는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반면 이치는 건설적이고 상생적이기에, 악은 구조적으로 지속될 수 없고 지혜가 밝아지면 무지에 기반한 악은 필연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

(5) 사성제는 대승불교의 적극적 이타행(利他行)과 어떻게 연결되나?

사성제는 개인의 안심입명을 넘어 대승의 실천 강령인 ‘섭대승계(攝大乘戒)’를 작동시키는 근본 엔진이다. 타인의 고통을 우주적 이치의 어긋남으로 수용(고제)하고, 그 원인인 사회적 무명과 맹목성을 진단(집제)하여, 적극적인 구제 행위(도제)로 나아가는 것은 사성제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치를 깨달은 자에게 타인의 불행은 우주 전체의 미완성이기에, 그는 섭대승계라는 구체적 도구로 세상을 수리해 나가는 능동적인 우주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다.

8정도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불국토를 건설하자!

사성제는 개인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바람직한 운영 방법의 기초이자, 우주적 불국토 완성의 비결이다. 팔정도는 개개인이 고통의 바다를 건느는 지혜일 뿐만 아니라, ‘상락아정’8)인 불국토를 건설함으로써 우주적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인간이 이 지혜로운 실천을 통해 고통의 바다를 건널 때, 지구촌은 물론이고 우주 전체가 그 본래적 평온과 우리의 행위가 일치하는 ‘윤리적 완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1) 조계종의 공식 견해. BC 528년, BC 445년 등 다른 견해가 있고, 상좌부 불교에서는 탄생·성도·열반 모두가 웨사카(Vesak) 보름(대체로 양력 5월)이라고 본다.

2)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연기와 사성제의 법이 너무나 깊고 오묘하여, 탐욕과 분노에 눈먼 중생들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보시고, 침묵하려 하셨는데, 범천(Brahmā)이 나타나, “세상에는 번뇌가 적어 법을 들으면 깨달을 수 있는 자들도 있으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 법을 설해 주십시오.”라고 세 번이나 간곡히 청하였기에 대자비심을 내어 설법하기로 결심하셨다.[김윤수 역주(2019), 『증일아함경Ⅰ』, 운주사, 제19 권청품 435~437면]

3) 남방불교에서는 성도일인 웨사카(Vesak) 보름으로부터 2개월가량 후인 아사달라(Asadha)월 15일 밤에 초전법륜을 베푸셨다고 본다.

4) 녹야원(鹿野苑, Isipatana)은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바라나시 근처 사르나트(Sarnath)에 있다. ‘사슴 동산’이라는 의미인데, 부처님께서 그곳 사슴왕이셨다는 전생담이 있다.

5) 정반왕이 태자를 보호하면서 함께 수행하도록 보낸 교진여(Kondañña), 아살지(Assaji), 마하남(Mahānāma), 바제(Bhaddiya), 십력가섭(Vappa) 5인. 그들은 싣달타가 고행을 그만두고 수자타가 준 우유 죽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고타마가 타락했다"며 실망하여 떠나 녹야원으로 갔고, 멀리서 부처님이 오는 것을 보고서는 "수행을 포기한 자가 오니 아는 척도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거룩하고 평온한 위신력에 압도되어 일어나 자리를 치우고 발을 씻겨드리며 예경을 표하였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여래는 타락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불사의 법을 얻었다"고 선언하시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성제 설법을 시작하셨고, 4제 각각을 내 보이고(示傳) 권하며(勸傳), 증득하게 하는(證傳) 3전(傳) 12행(行)의 가르침을 완성하셨다.[김윤수 역주(2019), 잡아함경Ⅲ, 운주사, 제379 전법륜경 171~176면; 중아함경Ⅴ, 제204 라마경 393~400면; 증일아함경Ⅱ, 제24 고당품(의1) 140~150면]

6) 불설비유경의 ‘안수정등(岸樹井藤)’에는 “미친 코끼리(죽음)를 피해 우물 속 넝쿨(생명)에 매달린 인간은, 위에서는 쥐(시간)가 줄을 갉아먹고 아래에서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있으며 우물 벽에는 독사들이 혀를 내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위에서 떨어지는 다섯 방울의 꿀(감각적 쾌락)에 취해 자신의 위태로운 상황을 잊고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고 있는 형국”이라고 비유되어 있고, 같은 취지의 여러 가지 절절한 비유가 잡아함경 제43권에도 설해져 있다.[김윤수 역주(2019), 잡아함경Ⅱ, 운주사, 149~203면]

7) 고고성(苦苦性)이란 신체적 통증·질병·불안·이별 등 누구나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불쾌한 경험 등 명백한 괴로움을, 괴고성(壞苦性, 변화의 괴로움): 모든 현상의 무상함에서 비롯된다. 즐거운 순간조차 영원하지 않으며, 그 즐거움이 끝날 때 우리는 반드시 결핍과 상실의 고통을 겪는다는 모든 현상의 무상함(anitya)에서 비롯되는 변화의 괴로움, 행고성(行苦性)은 우리가 상호의존적인 존재(연기)이기에 자신의 삶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근본적 불안정성을 뜻한다.

8) 상(常)이란 무상한 현상에 매달리던 맹목성을 버리고, 변치 않는 연기의 이치에 합일하는 영원성을 회복하는 것을, 락(樂)이란 찰나의 위태로운 즐거움이 아닌,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의 절대적 평온을, 아(我)란 고립된 소아(小我)라는 집착의 허구를 깨뜨리고, 우주 만물과 하나로 연결된 자기의 본 모습을, 정(淨)이란 탐욕과 분노의 불길을 꺼뜨려,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가 청정하게 변모된 상태를 의미한다.


구상진|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 법학과 교수 및 동 대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변호사,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명예회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한국불교와 자유민주주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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