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땅 60년, 부처님 인연으로 피워낸 자비의 꽃송이

- 나의 신행일지


맨발 4km 통학하던 가난한 소녀, 어머니 TV 사드리려 독일행
독일서 만난 스님 인연으로 10년간 스님들 안내하며 불교 귀의
90세 마리아 할머니 고통을 덜어주는 등 독일에서 자비행 실천

 

가난한 소녀, 독일 땅에서 부처님 법을 만나다

나, 소양자는 독일에서 60여 년을 살고 있는 불자로서, 서해안에 있는 아름다운 안면암의 신도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외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기적이다. 내가 한국을 떠나오던 1966년에는 한국이 너무나 가난해서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선생을 하시던 어머니 밑에서 두 형제와 함께 아버지 없이 정말 가난하게 살았다.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행정’이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메뚜기와 물고기를 잡고, 나물도 캐고, 풀로 인형을 만들어 소꿉장난을 하며 그래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신발이 없어서 매일 4km를 맨발로 걸어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익산에 있는 남녀공학인 남성중학교에 그림 실력으로 입학한 덕분에 돈 안 내고 장학생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늘 몸이 허약했다. 아마도 영양 부족이지 않았을까 싶다. 한번은 폐결핵에 걸렸는데 결핵약 하나 못 먹었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났다. 어머니께선 돈 드는 약 대신 밭에서 나는 채소와 토마토, 감자를 우리에게 먹였다. 그때 돼지가 살았던 오두막에는 모기는 물론 빈대, 벼룩, 이 같은 것들이 많아서 밤마다 물려서 가려웠다. 물린 자리를 긁어서 피가 나고 늘 아팠던 슬픈 기억들이 잊히질 않는다.

그렇게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갈 생각도 못 했는데, 어느 친척의 도움으로 ‘돈 안 들고 밥 먹여주고 기술도 가르쳐준다’는 대전간호학교에 입학했다. 갑자기 생전 처음 사랑하는 고향과 어머니 곁을 떠났다. 꿈 많고 예민한 사춘기라 고민도 많았고, 차비가 없어서 주말에 집에도 못 가고 친구들이 다 보는 멜로 영화 한 편도 보질 못했다. 그리고 그 흔한 연애도 한번 못 해보고 외로워했다. 주말에도 기숙사에 혼자 남아 청소와 손빨래를 하고, 빳빳하게 풀 먹인 교복을 무거운 다리미에 숯을 담아 열심히 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때 나는 독서를 많이 했고, 일기와 글쓰기를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기숙사에서 주는 밥과 김치는 꿀맛이었지만 양이 너무 적어서 늘 배가 고팠다. 군고구마 하나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보면 군침만 삼켰다. 하지만 재미있는 아르바이트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바로 식당 아줌마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당신이 귀가할 때 일부러 문을 조금 열어놓고 가면 룸메이트 경자와 함께 밤중에 식당에 들어가 남은 밥과 국을 먹었다. 졸업 후 조치원 보건소에서 결핵 퇴치 요원으로 일하다가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서울대학병원 치과에서 근무를 했다.

내가 6살 무렵, 우리 어머니는 옆집의 조그만 흑백 텔레비전으로 권투 중계 보는 걸 즐기셨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 여주인이 부엌에서 혼잣말처럼 “글쎄, 저 여자는 눈치코치도 없이 자꾸 우리 집에 텔레비전을 보러 오네.”라고 하는 소릴 들었다. 나는 그때 아주 큰 결심을 했다. 나중에 돈을 벌면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 가장 큰 컬러텔레비전을 사드려야지 하고 머리에 입력시켜놓은 것이다.

그러다 해외개발공사의 신문광고를 보았다. 독일에 가서 간호사로 일하면 두 달 월급으로 컬러텔레비전을 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로 이거다 싶어 혼자서 4주 만에 독일 취업 수속을 마쳤다. 23세 꽃다운 나이에 짐 5kg을 싸 들고, 당시 한국 비행기가 없어 알래스카로 돌아가는 일본 비행기를 빌려 타고 3일 만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괴테대학병원 근무를 시작했다.

독일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언어 불통과 문화 차이로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었고, 비싼 전화비 때문에 고국에는 전화 한 통 못 하고 보름 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에 의지해 향수를 달랬다.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은 한국 가족들에게 송금해 남동생이 대학에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삶의 지혜가 없어 많은 실패를 하고 때론 작은 성공도 하며, 이젠 거의 독일인이 되다시피 하여 말년을 편하게 잘 살고 있다. 나이 80이 되어 한독 가정을 이루고 살아온 이야기가 이곳 역사박물관에 보관되기도 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게 다 불보살의 가피이고 불법을 만났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 절로 소풍 갔던 기억을 떠올리면 산세가 수승하고 물소리가 들리던 그곳이 꼭 극락 같았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과 산신각을 돌며 마당 석탑 곁 약수터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곤 했다. 법당의 큰 금 부처님 앞에서 스님이 목탁에 맞춰 염불하시는 것을 보고 나중에 크면 한 번 더 와야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마리아 할머니를 돌보며 독일에서 자비를 실천하다

나는 40년 전 독일인 변호사와 결혼하고 비서학교를 나와 비서로 일했다. 어느 날 사무실에 한국 스님 한 분이 오셔서 도움을 청하셨다. 성악 오디션에 떨어졌으니 불교 포교사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불교에 대해 전혀 몰랐고 가톨릭 신자인 남편을 설득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법전을 연구해 ‘공익체 사단법인’을 등록하고 절을 만들어드렸다. 비록 그 스님은 6개월 만에 떠나셨지만, 그때 만든 법인 덕분에 한국의 여러 스님들께서 우리 집을 다녀가기 시작하셨다.

나는 공항에 가서 스님들을 모셔 오고 여행 안내도 해드리며 몇십 년 동안 자원봉사를 했다. 덕분에 우린 독일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여러 스님들께 불법을 배울 수 있었고, 한국 휴가 때 최고의 대접을 받기도 했다. 작년 휴가 때는 종정 성파 큰스님께서 계신 서운암에 가서 공양도 하고 16만 도자기 대장경도 관람했다. 특히 “공부하다 죽어라!”를 외치셨던 혜암 큰스님과의 인연도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 이런 인연들을 통해 팔정도와 삼법인을 알게 되었고 이를 실천하며 건강하게 살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 모태 신앙인 남편도 이젠 불교를 많이 이해하여 동네 성당에서 달마도 전시회와 다도회를 열었고, 십자가 앞에서 불교 강의도 하게 해주었다. 별명이 '부처신랑'인 우리 남편은 참으로 이해심이 깊고 자비로운 사람이다.

내가 봉사로 돕는 90세 마리아 할머니는 독거노인이시다. 임신중독 후유증으로 장애가 있는 아들을 39년이나 지극정성 돌보며 자립시켰지만, 남편이 죽고 딸들과도 인연이 끊겼으며 아들마저 연락을 거부하는 아픔을 겪고 계셨다. 할머니는 “신이 살아 계시다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느냐”며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셨다. 나는 할머니의 손가락을 보니 죽은 남편과의 결혼반지가 퉁퉁 부은 손가락에 박혀 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10년 전 돌아가신 남편에 대한 집착과 고통이 그 반지 속에 고여 있는 듯했다. 나는 할머니와 보석상에 가서 톱으로 반지를 잘라 빼드렸다. 할머니는 그날 처음으로 푹 주무셨다며 어떻게 그렇게 빨리 괴로움을 없앨 수 있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부처님 말씀대로 했을 뿐이라며 ‘독화살’ 이야기를 해드렸다. 독화살을 맞았을 때 누가 쏘았는지 따지기보다 화살을 먼저 뽑아야 살 수 있듯이, 고통의 원인을 묻기보다 지금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또한 20년간 아들을 못 보아 우는 할머니를 모시고 식물원에 가서, 8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멀리서나마 아들이 쓰레기를 치우며 행복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드렸다. 할머니는 보고 싶던 아들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또 보며 몰래 사진을 찍었다. “건강해 보이고 행복하게 일하고 있으니 됐다. 이제 가자.”

마리아 할머니는 나에게 연신 “고마워!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 이 빚을 어떻게 갚지?”라며 무척 행복해하셨다.

한국불교의 불모지인 독일에서 좋은 인연으로 부처님 법을 알게 되고, 타인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하다. 다음번엔 마리아 할머니께서 부처님 법에 반해서 불교에 입문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 이 글은 <제12회 대한불교조계종 신행수기 및 제6회 발원문 공모전> 중, 『법보신문』 사장상 수상작이다.

소양자(자연심)__해외 거주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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