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과 불교]

부처님께 세상에 남아주시기를 청한 범천의 두 번의 권청
“부처님이 지금 걱정하고 불평하시는 건가요?”
『마하붓다왕사』를 교재로 스터디하던 자리에서 한 청년이 던진 질문이다. 범천의 권청이 일어나기 전, 부처님께서는 홀로 이런 생각을 하셨다.
‘내가 깨달은 이 법은 난해하다. 이 법을 천신과 인간들에게 설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피로와 고갈을 가져올 뿐이다.’
이 생각을 읽은 범천이 급히 부처님을 찾아와 세상에 남아주시기를 청한 일이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범천의 권청’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 권청을 받자마자 곧바로 세상에 머물기로 결정하신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두 차례나 거절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범천은 마치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간절함으로 부처님을 설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연꽃의 비유로 마침내 부처님을 설득하였고, 그 결과 45년간 팔만사천경이 세상에 주어졌으니 범천은 세상을 구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범천의 권청은 처음이 아닌 두 번째 권청이었다. 『마하붓다왕사』의 연대기에 따르면 범천의 첫 번째 권청은 성불 후 5주째에,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권청은 두 번째로 약 50일째에 이루어진다. 먼저 첫 번째 권청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부처님께서는 성불 이후 보리수와 함께 열반의 즐거움을 만끽하셨다. 그러던 중 문득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존경할 대상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다. 모든 번뇌를 다 끊고 모든 악을 제거한 지금, 내가 높이 존중할 수 있는 존재는 과연 없는 것일까?’
부처님께서는 일체지의 눈으로 법계를 두루 살펴보셨지만, 세상에는 부처님보다 더 높은 존재도 견줄만한 존재도 없었다. 이를 확인하신 부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존경할 만한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분명 허전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이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범천은 이를 우려하여 재빨리 부처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권청한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을 존중하며 살아가시면 됩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전통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란 무엇일까? 성불 후 첫째 주 부처님의 행적을 보면 그 답은 분명해진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일주일 동안 좌선하시며 깊은 사유에 잠기셨는데, 그 사유의 내용은 바로 ‘연기’였다. 또한 사아승지겁의 수행을 통해 불사의 문을 열며 깨친 결과가 바로 ‘연기’이다.
그렇기에 범천의 첫 번째 권청에서 ‘법’을 존중하며 살아간다는 ‘법’도 바로 ‘연기’이다. 그렇기에 두 번째 권청에서 부처님께서 고민하시는 여래가 깨달으신 ‘법’ 그리고 중생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도 ‘연기’이다. 이 연기법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에 해당한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첫째,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깨치신 후 불사의 길을 완성하셨다.
둘째, 부처님께서는 범천의 첫 번째 권청 이후 이 법을 존중하며 살기로 결정하셨다.
셋째, 법을 존중한다는 기준이 범천의 두 번째 권청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空)과 연기, 보살의 역설을 넘어서는 희망
연기의 의미는 존재가 수없이 많은 조건에 의해서 성립한다는 데 있다. 유식학(有識學)에서는 이를 종자와 현행의 관계로 설명한다. 업에 의해 마음에 깃든 습기로서의 종자(種子)는 단독으로 발아하지 못하고, 다른 조건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현행(現行, 일어나는 현상)한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세계 또한 수많은 개인의 종자가 서로 얽혀 만들어낸 거대한 공업(共業)의 현행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무수한 조건과 만물의 도움에 기대어 비로소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렇기에 나의 선업 종자 하나가 발아하는 일은 단지 개인의 해탈에 그치지 않고, 법계 전체의 공업을 정화하는 강력한 증상연(增上緣)이 된다. 이처럼 상호연결의 진리인 연기의 지혜가 깊어질수록 타인에 대한 자비심이 샘솟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역설이라고 불리는 문제가 있다. 보살은 보리심의 완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보리심은 지혜와 자비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지혜는 존재의 실체 없음, 즉 공(空)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통찰이다. 그런데 공의 지혜가 깊어질수록 환영과 같은 존재에게 자비심을 내기가 쉽지 않게 된다. 반대로 자비심이 깊어질수록 고통받는 존재들은 더욱 실체가 있는 것처럼 경험되어 공성의 지혜는 약화된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두 마음을 동시에 닦아야 한다는 어려움이 바로 보살의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수행이 어느 지점을 넘어설 때 전환을 맞이하는 데 이를 흔히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라고 부른다. 보리심 수행의 중간 단계까지는 지혜와 자비가 서로 장애가 되는 듯 보이지만, 그 지점을 넘어서면 두 측면은 오히려 서로 돕는 관계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공성의 지혜가 향하는 초점이 독립적인 존재의 허상을 밝히는 무아의 측면에서 만물과 상호 연결성을 밝히는 연기의 측면으로 확장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연기’는 자아의 입장에서는 그 존립을 위협하는 통찰이다. 그러나 자비의 입장에서 보면, 자아가 만들어낸 경계가 허물어짐에 따라 만물과 연결되게 하는 확장의 근거가 된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역설적으로 모든 것은 새롭게 연결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희망의 근거가 있다.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께 보살의 역설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혜가 깊어질수록 중생을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기에 여래는 자비와 지혜의 양날개를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완성된 자비심을 지닌 부처님께서 근기가 무르익은 중생들만을 위해 세상에 남으신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권청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다. 범천의 첫 권청에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깨달은 ‘법’, 곧 연기를 존중하며 살아가기로 결정하셨다. 이 연기의 그물이 만물과 연결되어 있고, 그들의 근기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모든 존재와의 연결을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는 부처님께서 과연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연기의 ‘법’을 존중한다면, 불사의 문을 세상에 열지 않은 채 떠난다는 선택은 사실상 성립할 수 없다.
주체를 녹인 무조건적인 사랑, 무연자비(無緣慈悲)와 공업(共業)
부처님의 자비심은 어떠한 차별이나 조건없이 베푸어지는 ‘무연자비(無緣慈悲)’라고 한다. 이 ‘무연자비’는 보살이 수행을 통해 닦는 ‘법연자비(法緣慈悲)’가 완성된 모습이다. 부처님께서 사아승지겁을 넘는 긴 세월 동안 이 ‘법연자비’를 닦아 오셨다. 그래서 그 자비심은 중생이 호불호에 의해 일으키는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와는 그 결이 전혀 다르다.
‘법연자비’를 훈련한다는 것은 ‘나’와 ‘너’라는 주어에 대한 차별을 내려놓고, 동사로서의 ‘자비’ 자체를 훈련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개성을 지닌 ‘너’에 대한 호불호와 관계가 없다. 좋아하는 존재에게만이 아니라 싫어하는 존재에게도 자비롭게 대하는 태도를 익히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과의 관계 이전에 수행자 자신의 태도를 닦는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법연자비’는 법을 원동력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의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법연자비’를 꾸준히 훈련하면 자비심은 하나의 깊은 습관으로 형성된다. 그렇게 완성된 ‘무연자비’의 마음은 분별과 탐욕, 그리고 혐오의 마음으로 상대를 대한다는 것은 매우 오히려 어려운 일이 된다. 이미 ‘무연’ 즉,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는 것이 숨 쉬듯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마음 밑바탕에는 ‘나’와 ‘너’를 넘어 ‘나’와 만물의 상호연결성, 즉 ‘연기’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을 일체지(一切智)라고 하고, 이러한 통찰에서 나오는 자비의 상태를 대연민삼매(大憐愍三昧)라고 한다.
만물의 연결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연기의 지혜를 완성하신 부처님께서 매일 두 번씩 대연민삼매에 들어 세상을 살피신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근기가 성숙한 중생을 발견하면 직접 찾아가 그를 제도하시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내’가 ‘너’를 돕는 행위라기보다, ‘나’와 ‘너’라는 주체를 떠난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실현해 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의 진리에 대한 충분한 문사수(聞思修)없이 행하는 자비심은 그저 ‘중생연자비’의 행만 늘어나는 것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비의 원동력을 중생연이 아니라 법연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자비수행은 보살의 법으로 도약하게 된다.
이 길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길이라기보다 ‘모두와 연결’되는 길이다. 나와 만물이 연기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 하나하나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공업(共業)이 된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자신을 닦는 수행은 단순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우리 공동의 업을 맑히는 책임 있는 실천이 된다.
나를 닦아 세상을 돕다, 세상을 위한 불교
“나를 닦아 세상을 돕다.”
이 문장은 붓다스쿨과 인연을 맺은 사부대중에게 전한 2026년 공통 수행 주제이다. 연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세상을 돕는 일과 나를 닦는 수행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 중생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하던 수행을 내려놓고 급히 수행처를 떠날 필요도 없고, 세상을 위한 일은 접어둔 채 명상에만 몰두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나를 닦는 수행이 곧 중생을 돕는 일이며, 세상을 돕는 실천이 곧 나를 닦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연기의 지혜로 주체를 내려놓은 보살에게는 더 이상 자리와 이타의 분별이 남지 않다. 다만 번뇌에 사로잡힌 마음을 구제해야 하는 실천만이 남는다. 누구든지 차별 없이 인연이 닿는 모든 존재의 번뇌를 덜어 주려는 마음,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무연자비’이다. 그리고 이 ‘무연자비’의 마음은 연기에 대한 깊은 통찰이 완성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위한 불교의 참모습이며, 희망과 자비를 향한 공과 연기의 실천이다.
원빈 스님|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행복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산청에 있는 송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저서에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굿바이, 분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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