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과 불교]

이른 봄, 창가에 앉아 햇살을 받는다. 아무런 생각없이 이른 봄날의 따뜻한 햇살을 즐기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 빛이 수억 킬로미터 너머 태양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생각해 보니, 새삼 나를 둘러싼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나의 몸은 어제 먹은 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쌀은 누군가의 손과 땅과 물과 바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빚어낸 창조물임을 알게 된다. 나는 지금 홀로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셀 수 없는 수 많은 존재들과 연결되어 비로소 존재하고 있다. 붓다는 이 단순하고도 심오한 사실을 이천오백 년 전에 이렇게 설하셨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존재한다. 이것의 발생으로부터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있지 않을 때 저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의 소멸로부터 저것이 사라진다.”(SN.2.22)
4지연기(四支緣起)로 알려진 이 가르침은 연기법의 본질을 가장 간결하게 드러낸다. 어떤 존재도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서로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고, 서로를 의지하여 존재한다. 이 세계는 독립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 그 자체다. 관계의 그물망은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며, 고정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과정’의 산물이다. 말하자면 나를 포함하는 이 우주는 ‘과정’ 그 자체이다. 굳이 화이트 헤드를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그가 말하는 존재의 본질을 ‘되어감(Becoming)’의 과정이라고 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인드라망, 무한한 반영의 세계
힌두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제왕인 인드라(Indra)의 궁전에는 무한히 펼쳐진 그물이 있다. 그물의 매듭마다 보석이 하나씩 달려 있고, 그 보석들은 각자 다른 모든 보석의 모습을 완전하게 담아 비춘다. 그리고 그 반영 속에 또 다른 반영이, 그 안에 또 다른 반영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인드라망(Indra's net)’이다.
화엄사상은 이 이미지를 빌려 세계의 실상(實相)을 설명한다.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 나라는 존재는 단지 하나의 보석이지만, 그 속에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담겨 있다. 나와 무관해 보이는 타인의 고통도, 저 먼 나라의 숲이 사라지는 일도, 실은 나의 존재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가르침은 한때 은유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21세기 이후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인드라망은 비유를 넘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의 사건이 실시간으로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어느 나라의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전 세계의 일상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지역에서의 분쟁이나 전쟁이 나의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체감한다. 말하자면 연기의 가르침이 데이터와 네트워크의 언어로 새롭게 가시화된 것이다.
AI 시대, 연결의 역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의 시대의 문턱을 넘어섰다. 머지않아 인간의 지적 능력 전반을 넘어서는 범용인공지능(AGI)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 한다. AI는 분명 인드라망의 촘촘함을 더욱 정교하게 구현할 것이다.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관계를 발견하고, 패턴을 읽고, 연결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있다. 기술적 연결이 심화될수록,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살아있는 연결은 오히려 희박해질 수 있다. AI가 대화 상대가 되고, 알고리즘이 관계를 중개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 많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더 깊이 고립된다. 화면 너머로 수천 명과 소통하면서도, 옆방에 있는 가족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과의 대화가 더욱 요구되는 사회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다른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연결의 증가가 아니라 관계의 소외다. 연기의 그물망은 더 넓어졌지만, 그 그물에 담긴 것은 점점 더 옅어지고 있다.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근원적인 방식이 무너질 수 있다. AI 시대의 진정한 위기는 기술의 오류가 아니라, 관계의 공동화(空洞化)일지도 모른다.
자(慈)와 비(悲), 인간다움을 향한 수행
붓다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을 때, 두 가지 덕성을 이야기했다. 자(慈, mettā)와 비(悲, karuṇā)다. 자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비는 고통받는 존재를 향한 깊은 공감이다. 이 두 마음은 연기적 통찰에서 자연스럽게 피어오른다. 나와 너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통찰할 때, 네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 되고, 네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마법과도 같은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붓다는 이것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빨리어로 ‘꾸살라 담마(kusala-dhamma)’, 즉 ‘선법(善法)’이라 부르는 이 덕성은 애써 닦아야 하는 것이다. 불선법(不善法)은 방치하면 자연히 내면에 뿌리를 내리지만, 선법은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키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애써 노력하여 키웠다고 하더라도 잠시 한눈을 팔게 되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노력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탐욕[貪]과 분노[瞋]와 어리석음[癡]은 가만히 두어도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자비와 지혜는 수행이 없이는 결코 꽃을 피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불교 실천가 데이비드 로이(David R. Loy)는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책에서 탐진치의 삼독은 베풂과 자애로 변화해야 하고, 공(空)을 자각하되 공에서 나와 적극적인 이타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AI 시대일수록 이러한 이타적 수행의 의미가 더 각별해지는 이유이다.
기계와 AI는 효율을 학습하지만, 인간다움은 결코 효율로 환원되지 않는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이익이 없어도 누군가의 슬픔 앞에 머무는 것, 이것이 자비의 실천이자, 수행이다. 그리고 이런 실천이 반복될 때 비로소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완성해 가게 된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살아있는 관계의 수행이 아닐까 싶다.
‘나’와 ‘너’를 넘어 ‘우리’라는 중도
연기의 가르침은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 아니다. 깊이 있게 사유하고 또 사유해야 한다. 그렇게 사유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라는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착이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끼게 된다. 나는 다른 존재나 세계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비로소 나로서 드러나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인드라망의 보석이 다른 보석들을 반영함으로써 빛을 내듯이, 나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나일 수 있다. 그렇기에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떠난 ‘나’의 존재는 애초 불가능함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나’라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며, ‘나 없음’도 또 다른 극단임을 알아 그것들을 넘어서는 길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너’라는 분리된 타자에 집착하는 것도, ‘너’를 지워버리는 것도 아닌 길. 바로 중도(中道)의 길을 가리키셨다. 중도는 관념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이다. ‘나’와 ‘너’라고 하는 살아있는 긴장과 공명의 그 두 극단을 넘어설 때, ‘우리’라는 더 큰 존재가 중도의 가치로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연기의 실천적 의미이며, 공존의 지혜다.
AI와 AGI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 이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이 가르침 앞에 선다. 세상은 연결되어 있고, 나는 그 연결 속의 존재다. 그 연결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자비의 마음으로 붙드는 것. 그것이 인드라망 속 한 보석으로서 우리가 빛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이필원|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교양융합교육원 부교수, 동 대학 갈등치유연구소 소장, 한국종교교육학회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인도 초기 불교 전공으로, 명상 상담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인생이 묻고 붓다가 답하다』등이 있고, 「자살, 욕망이 지닌 또 다른 얼굴」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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