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와 선(禪)|참선을 말하다


현대 사회와 선(禪)

이덕진
한국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



선이 종래에 보기 드문 융성을 보인다고 해서, 비록 21세기의 대안이라고 회자되기도 하지만, 한국선의 장래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한국선의 과거가 모두 모범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 반대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이 바로 한국선의 가장 큰 위기이자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전통적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현대 사회에 맞는 적응력을 체계적으로 강화하는 일이다.


전통 사회의 선 정체성을 회복


1) 역사적 전환기에 변화의 원동력

육조 혜능의 사유는 ‘자성(自性)의 돈오’를 통해 외재적 신앙을 내재적 종교로 전환시켰다. 중국·한국 모두에서 선은 교학 불교의 한계와 신분 질서를 넘어 민중적 지지를 얻으며 역사적 변곡점마다 변혁의 동력이 되었다. 오늘의 전환기에도 선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2) 영원한 시대정신

‘중생이 곧 부처’라는 명제는 시간과 공간을 일관하는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선적 진리’이자 ‘행동을 담보로 하는 시대정신’이지 과거 불교의 흔적이거나 선언적 명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신을 지금 당장 복원시켜서 중생을 부처처럼, 백성을 하늘처럼 여겨야 한다.


3) 세간성 중시의 전통

선은 일상에서 성취되는 ‘세간의 깨달음’을 중시한다. 혜능·대혜는 세상 한복판을 수행의 장으로 제시했고, 한국의 용성·만해도 생활·현장 중심의 선을 설했다. 선의 목표는 관념적 ‘목적지로서의 깨달음’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깨어 있음’과 동참·동류의 보살행이다.


4) 청정가풍의 복원

한국선의 생명력은 혹독하고도 순수한 수행 가풍에서 왔으나, 오늘의 문제는 ‘청정가풍의 부재’다. 사찰과 수행자는 조계가풍의 청정함과 계율의 엄격성을 삶으로 증명해 세속화 비판을 돌파해야 한다.


5) 대승불교 본래의 정신을 환기

대승은 ‘자타불이’의 동체대비를 통해 이타가 곧 자리가 되게 하는 상호 상승을 지향한다. 특수한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예외를 일반화하지 말고, 선의 정체성을 대승 보살행 안에 재정립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선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대승불교에 있다는 점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선에 알게 모르게 깃들여 있는 ‘정체성의 혼동’이나 ‘특수의 보편화’ 등의 오류를 제거해, 대승불교 본래의 정신을 환기시켜야 한다. 이것은 지금 현대의 한국선이 과거를 반성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 아주 절실하다. 


현대 사회에서의 선 적응력 강화


1) 수요자 중심의 불교로 전환

한국선의 발전을 도모하고 간화선을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선과 교학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잘못 이해한 사교입선 전통으로 인해 체계적 교육이 부정되고 그 결과는 간화선 수행에 많은 혼동과 오류를 주고 있다.

둘째, 선 수행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선 수행의 주인공은 승려라기보다는 오히려 재가 불자다. 따라서 선은 수요자 중심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셋째, 다른 수행 방법의 장점을 포용해야 한다. 현재 존재하는 다른 수행법의 장점을 간화선의 정신에 따라 보다 유연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간화선’이라는 상(相)에 구애되는 것은 간화선의 정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넷째, 수요 당사자의 눈높이에 맞는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지침서를 만들어서 재가 수행자 양성과 지도에 진력해야 한다.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설명서를 만드는 것은 가치 있는 작업이지만, 이러한 천착은 간화선을 걸고 벌이는 도박에 가까울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방법상의 묘수를 찾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섯째, 포교의 방법을 현장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큰 스님을 통해 신도를 확보하는 방법에서,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사부대중을 최대한 동원하고 조직화해 활동에 임해야 한다.


2) 고도 정보화의 기회화

산중 사찰, 고령화, 변화 둔감성은 오늘날 한국 불교계의 약점이지만, 주5일제·여가 확대·유비쿼터스 환경은 원거리·비대면 포교의 기회다. 사찰 종무 전산화, 정보 공유, 보안 체계, 통합정보망 구축, 학제·응용불교의 개방이 요구된다. 

‘공간 제약’을 상쇄하는 디지털 접점을 통해 산사 경험을 생활권으로 확장해야 한다. 불교가 진정 사부대중에게 접근하려면 불교의 내용을 현실에 맞게 개발해서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3) 문화 콘텐츠와 브랜드 가치의 제고

불교의 브랜드 가치를 어떻게 높이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전통 사찰을 문화 중심지로 탈바꿈해야 한다. 사찰을 단순히 관광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창조적 미래를 양산하는 터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다면 대중들은 단순히 산사의 정취를 즐기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향상된 문화적 감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단기 출가와 주말 수련회 그리고 산사 체험 프로그램[템플스테이] 등이 있다. 

둘째, 불교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야 한다. 불교문화 콘텐츠 개발을 위해서 현재 죽은 말이 되어버린 한문과 갇혀 있는 불교의 원형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입말로 바꾸는 거대한 이야기 은행의 개발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따라서 사람이 필요하다. 위의 이야기 인프라를 바탕으로 불교의 주제와 소재가 잘 녹아 있는 시나리오를 개발해 대중 곁으로 다가갈 이야기꾼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와 산업, 학문과 현장 사이를 연결할 불교계 내부의 중계자가 필요하다. 기획·제작·법률·마케팅·교육·정책 등 다양한 불교의 문화 정책을 조정할 사람을 긴 안목으로 육성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불교가 세계화할 수 있을 것이다. 


4) 현장 응용 능력의 배양

선의 실용성은 불편함을 자발적 가치로 전환시키는 의미의 혁신과 구체 현장에서의 심층 치유력으로 입증된다. 선 심리 치료는 자아 실체론에 기대는 서양 치료와 달리, 연기·무상에 입각해 ‘문제의 소멸[苦의 無化]’과 인격의 전면적 변화를 지향한다. 심리상담, 중독·교정·호스피스·노인·정신의료·사회복지 현장에서의 응용 가능성이 크다.


5) 선학(禪學)의 새로운 통로 찾기

첫째, 특정 인물이나 주제에 편중된 연구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것처럼 보이는, 특정 인물이나 주제에 접근하는 동종교배나 서로 주고받기의 경향은 한국 선학의 장래를 위해서 치명적일 수 있다.

둘째, 시대에 걸맞은 연구가 필요하다. 선 내부에 한정된 연구가 아니라 현대의 난문제와 함께하는 선, 동서양의 제 학문과 함께하는 선으로, 그 연구 범위가 확대되어야 한다.

셋째, 학제 간 연구와 토론을 활성화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지금까지의 선 연구는 지나치게 철학성이라는 면에만 치중해 있다. 선과 교육, 선과 정신 치료, 선과 상담심리학, 선과 환경, 선과 여성 문제, 선과 인권 문제, 선의 생활에서의 구체적 응용, 위빠사나와 간화선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환기해야 한다.

넷째, 근현대 불교에 관해 연구해야 한다. 우리나라 근현대의 걸출한 승려의 사상과 선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 등에 대해, 더 유실되기 전에, 자료의 정리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선학계의 박사급 전문 인력의 활용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 전체의 인문학 연구자들을 강타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태풍을 선학계의 연구자들은 더 심각하게 겪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없을까? 필자는 그 하나의 대안으로 전국 본사급 사찰에서 연구소를 하나씩 설립하면 어떨지 생각한다. 박사급 연구원들에 대해 일정한 급여를 주며 상근할 수 있는 연구소 등을 설립해서 그들에게 밥 먹고 숨 쉴 정도의 급여와 공간만 마련해준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물들이 그곳에서 생산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주지하듯이 선은 ‘자성청정심’에 의해서 생성되는 진리를 추구하며, 이때 모든 진리는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현장에서 구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상(相)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미망이 되기 때문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삶과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서 그 진리의 양태가 달라지는 것은 선의 필연이다. 하지만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주인이지 손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인간들이 ‘연기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타의 동일성에 입각한 동체대비’의 정신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깨달음이자 진리가 된다. 이것이 ‘전미개오’이다.  



이덕진|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창원문성대 교수, 한국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대표사상가 10인- 지눌』,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지눌』 등이 있고, 「看話禪의 狗子無佛性에 대한 一考察」, 「儒敎와 佛敎의 生死觀에 대한 一考察」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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