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위대함을 탐색했던
재가 수행자, 대원 거사
박원자 불교 전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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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대원불교교양대학 제1회 졸업식에 참석한 대원 장경호 거사(앞줄 왼쪽 세번째) |
지속적인 수행과 대중교화의 실천으로 일관한 장경호 거사의 삶
대원 장경호 거사의 삶에서 가장 특출한 부분은 지속적인 수행과 대중교화의 실천이었다 할 수 있다. 그처럼 불법에의 확신과 철저한 수행으로 삶을 다듬고 기업을 성공적으로 일구어 자신이 가진 힘을 세상으로 회향한 기업인은 한국 불교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사업을 한 기업인이었지만 수행자와 다름없는 삶을 산 사람이다.
대원 거사가 처음 불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열일곱 살, 사 형제 가운데 막내인 동생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해 깊이 사유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수행을 시작한 것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인생의 지표를 찾을 수 없어 방황하면서 불면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통도사에서 구하 스님의 ‘인간의 참 존재는 육신이 아닌 불성’이라는 법문을 듣고 불경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철학과 종교, 문학과 사회과학 등 독서를 깊이 했던 그가 불경을 통해서 발견한 것은 ‘나’라는 존재의 참모습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인간의 존엄성과 일체의 모든 존재는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두 성불해 있다는 생명의 평등사상이었다. 진정한 나(참사람)의 발견만이 삶의 고통과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발견은 평생 그의 좌우명이 되었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때를 두고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사람 노릇하고 살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술과 담배,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본격적인 참선 수행에 접어든 것은 이십대 중반 구하 스님에게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의 화두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그 화두 하나에 몰두해보게. 대자유인의 삶을 살게 되는 지름길이요, 부처가 되는 길이라네.”
처자식을 거느리며 목재소 일과 가마니업을 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그는 불교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벽암록』, 『전등록』, 『선가귀감』, 『나옹록』 등 많은 선어록을 읽으며 깊이 발심했다. 특히 『나옹록』은 그가 참선 공부를 하는 데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각기 뜻을 세웠거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면서 용맹정진하는 중에도 더욱더 용맹정진하라. 그러면 갑자기 탁 터져 백천 가지 일을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사람을 만나보아야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20년이고 30년이고 물가나 나무 밑에서 부처의 씨앗(聖胎)을 길러야 한다.”
『나옹록』에 있는 참선에 대한 법문은 홀로 참선 수행하는 그에게 더없이 훌륭한 지침서가 되었고 발심해서 선방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이십대 중반에 그는 이미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집에서 좌선하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을 정도로 참선 수행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수행의 결실로 일군 동국제강과 평생의 서원
그는 스물일곱 살이던 해, 하안거 결제에 들어 석 달 동안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석 달 동안이나 산사로 들어가 수행을 한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그의 발심이 얼마나 깊었으며 참선 수행으로 인한 효능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통도사에는 구하 스님이 조실로 있으면서 법문과 함께 참선을 지도하고 있었다. 구하 스님은 평생 참선과 염불 정진에 매진한 선지식으로 통도사는 물론 한국 불교의 승풍 진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분이다. 불교 정화에도 적극 나섰고,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지성적인 승려로 이름이 났던 수행자다. 그는 평생 구하 스님을 찾아뵙고 참선 공부를 물었으며, 구하 스님 또한 입적할 때까지 그를 아끼며 지도했다.
오십대 중반의 구하 스님은 신심 깊은 스물일곱 살의 청년인 그에게 말했다.
“수행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완전성을 회복하는 일이지. 쉽지 않은 시간을 내었을 터이니 부디 용맹정진하게.”
일제의 압제에서 독립할 수 있는 일도, 인간이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그 힘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었던 그는 3개월 동안 용맹정진하리라 다짐했고 또 그 결심을 한 치 오차 없이 실천했다. 그리고 해제 날, 통도사 적멸보궁에 무릎을 꿇고 뜨겁게 서원했다.
“부처님! 이제 저는 사업을 해서 돈을 크게 벌겠습니다. 사업을 해서 얻은 이윤은 모두 국가와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데 바치겠습니다.”
그가 평소 가까운 지인들에게 첫 안거 이후 부처님의 가피로 살아왔다고 말해온 것처럼, 통도사 법당에서의 서원은 그로 하여금 사업에 최선을 다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이 땅의 민간 철강 제일의 철강 회사인 동국제강을 창업해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승적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었다.
불도의 정진에서 내일을 내다보는 혜안이 열리고 시운이 따랐다는 그의 말처럼 정진이 깊어갈수록 그의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롭게 흘러갔다. 광복 직전에 못 공장을 인수해 부산에 조선선재를 설립하고 나서 한국전쟁이 일어나 집을 짓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못을 생산하며 가마니에 돈을 쓸어 담던 시절에도 조금도 동요 없이 그는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수행을 통해 시의적절한 판단과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얻고 있던 그만이 선택할 수 있었던 지혜로움이었을 것이다.
막대한 경제적인 부를 눈앞에 맞고 있으면서도 더 욕심을 부리거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았던 걸 보면 그는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어떤 길을 가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꿰뚫은 사람이었다. 1.4후퇴로 부산이 초만원이 되며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을 때 그는 금정사를 찾았다. 해인사 가야총의 초대방장으로 총림을 이끌고 있다가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와서 금정사에 머물며 정진하고 있던 효봉 스님을 찾아간 것이다. 그가 쉰셋일 때였다. 그는 자주 아침에 금정사로 가 저녁 늦게까지 정진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이어갔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묶은 채 행선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원 거사가 효봉 스님에게 물었다고 한다.
“세상을 위해 뜻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거사님이 한국 불교를 위해 일을 좀 하세요. 나라가 성장하려면 불교가 발전해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이는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좀 조용해지거들랑 거사님이 힘써주시오.”
장경호 대원 거사의 삶을 돌아보면, 그것은 한 명의 기업인이 아니라,
한 명의 위대한 재가불자의 삶이었다. 그는 불법을 단상에서 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장 속에서 실천하고 증명한 불심의 지도자였다.
일체유심조를 바탕으로 삶과 기업을 경영
장경호 거사가 평생 품고 실천했던 것은 ‘일체유심조’, 즉 마음의 위대한 힘이었다. 그 마음이 부처와 다름 아니고, 상대와 내가 둘이 아님을 믿었고, 인과가 필연적임을 믿어 그 믿음을 바탕으로 삶과 기업을 경영했다.
참선 수행을 깊이 하다 보면 직관력이 발달해서 사물의 본질이 읽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업인이었던 그가 미래의 경영이나 기술이 어떻게 변화할지 수(手)를 읽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동국제강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공기업을 빼고는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많은 불교 학자들을 만나고 종파를 가리지 않고 스님들을 만나면서 대중교화를 실천하기 위한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1961년, 양산 천성산 법수원에서 성수 스님(후에 총무원장 역임)과 함께 정진하면서 의기투합해 종합수도원 설립을 기획했다. 100만 평의 땅에 수도원을 만들어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우고 차츰 방송사, 신문사, 잡지사, 병원, 복지 기관 등을 만들어 청정국토를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이 원대한 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되었으나 대중불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불서보급사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중 포교당인 대원정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한 ‘자아를 발견해 지상에 낙원을 이룩한다’는 구호를 내세운 범불교 신행단체인 대원회를 설립해 대중불교운동의 시발점을 삼았다.
1973년 5월, 대원정사가 완공되면서 5층 1,200평의 불교식 현대 회관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한국 불교 1,600년 역사상 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 포교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대중교화를 위한 노력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불교계 최초로 2년제 불교 전문 교양대학인 대원불교대학을 설립해 개원했고, 시민선방을 개원해 산사에서만 행해지던 수행 정진을 도심으로 이끌어내는 포문을 열었다.
그의 불교 중흥과 대중교화에의 원력은 예측하지 못했던 죽음을 맞기 전까지 끝이 없어 보였다. 종로에 중앙포교당을 내려고 건물을 보러 다녔고 불교방송국의 허가를 받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러던 중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죽음을 예감한 그는 타계하기 두 달 전, 자신의 전 재산 30억 6,300만 원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 불교 중흥과 발전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했다. 재벌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 통치자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불교 중흥을 위해 써달라고 용처를 밝힌 것은 그의 불교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앞날을 내다보는 수행력을 느끼게 한다.
그가 타계하기 20일 전, 문화공보부로부터 재단 설립의 허가를 받으면서 대한불교진흥원이 첫발을 내디뎠다.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회향의 대한불교진흥원은 불교방송국 설립 등 한국 불교의 성장과 발전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현재진행형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는 타계하기 전 병문안을 온 한 스님에게 수행에 더 전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다음 생에 다시 마음 닦는 공부를 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출가수행자 못지않게 정진했던 그의 겸손한 고백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입적하기 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쓴 글을 보면 그의 수행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4여 일 될까.
1차 사망 그러나 생전이나 다름없다.
우주 만유는 현상계뿐이다.
변만법계(遍萬法界) 중에 일부분이다.
자타가 분별없는 진법계에서 분쟁하는 것은 하루살이와 같다.
나는 이십대에서부터 그 신념은 확고하였으나 아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수련을 하여 체득하여야 진인(眞人)이 되는 것이다.
심조만유(心造萬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타외재(一歸他外在)
신(信) 각(覺) 체득일치(體得一致)
그를 두고 세상은 동국제강의 창업주로 성공한 기업가였다고도 하고, 불이사상을 실천했던 한국의 유마 거사라고 한다. 현대 대중불교운동의 단초를 마련한 선각자이며 불교 중흥을 위해 왔다 간 보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장경호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것은 ‘심조만유 일체유심조’라는 진리를 믿고 묵묵히 수행하며 그 마음의 위대한 힘을 세상에 고스란히 회향한 구도자 아니었을까. 그는 오랜 생을 두고 마음을 닦아온 수행자였을 것이다. 그가 세상에 회향한 불교 발전을 위한 발자국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박원자|불교 전문 작가. 숙명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 불교에 입문한 뒤 마음공부를 최상의 가치로 삼고 정진하며 글을 쓰고 있다. 동국대 역경위원을 역임했으며 지난 30여 년 동안 출가수행자들의 생애와 수행에 대한 글을 썼다. 주요 저서로는 『길 찾아 길 떠나다』, 『경산 스님의 삶과 가르침』, 『내 인생을 바꾼 108배』, 『스님의 첫 마음』, 『인생을 낭비한 죄』, 『나의 행자시절 1·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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