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 장경호 거사는 어떤 분인가|대원 장경호 거사 50주기 추모

대원 장경호 거사는 

어떤 분인가


유승희

방송작가



이 땅의 유마, 대원 장경호 거사를 추앙하다


한 세기의 굴곡진 시대를 온몸으로 치열하게 관통하며 사업가에서 수행자로, 나아가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로 살다간 참사람. 대원 장경호(大圓 張敬浩, 1899~1975) 거사는 경제 발전과 보살도를 실천한 ‘이 땅의 유마 거사’로 추앙되며 한국 불교 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대원 장경호 거사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은 오늘날에도 동국제강, 대원정사, 대원회, 대한불교진흥원, 불교방송, 대원아카데미로 이어지고 있다. 기업 경영을 통해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교육, 포교, 문화, 장학 사업 등 불교 진흥 활동을 통해 한국 불교의 방향을 바꾸었다. ‘세상을 위한 불교’를 실천한 그의 구도와 수행의 여정은, 초연결·초지능의 AI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생애와 불교와의 인연


대원 장경호 거사는 1899년 9월 7일, 부산 동래의 부유한 농가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량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불심 깊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자주 통도사를 찾았다. 어린 시절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그의 모습은 의젓하고 진지해,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4세에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그는 신학문을 접하며,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훗날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 허정(許政) 선생과 평생의 인연을 맺는다.

1916년 보성고보를 졸업한 그에게 1919년 3.1운동은 그의 삶을 뒤흔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쫓기게 되어 허정은 만주로,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각자의 길에서 ‘독립운동의 뜻’을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청년기의 장경호 거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간절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스무 살 때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인생의 좌표를 찾을 수 없어 방황했다. 구할 수 있는 책은 모두 구해서 읽었다. 사람도 많이 만나며 지혜를 얻고자 했으나 항상 만족치 못했다. 크게 생각되는 바가 있어 불경을 탐독했다. 그러다 문득 길이 열렸다.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사람 노릇은 하겠구나’ 발심했고,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준 것은 ‘일체가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깨달음이었다.

총을 겨누는 자나 신음하는 자, 모두가 불성을 지닌 존엄한 존재임을 마음으로 깨달았고, 순간 어린 시절 동생의 죽음 앞에서 품었던 세상을 향한 무거운 화두가 비로소 풀릴 듯했다.

진정한 독립은 단지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적 자립에서 비롯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경제를 부흥시켜 나라에 힘을 보태야겠다는 신념으로 고향 부산에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세상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불완전했지만, 불교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인간과 세계는 그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비추어주었다. 이후 장경호 거사의 삶은 오롯이 그 길을 향한 걸음이었다.


동국제강 창업 이야기


부산으로 돌아온 장경호 거사는 맏형이 운영하던 목재소에서 일을 시작하며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1929년 초량동 부산중앙시장에 대궁양행(大弓洋行)을 열고, 가마니 유통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0여 년간의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광복동에 종합물산회사 ‘남선물산’을 세우며 사업의 외연을 확장했다. 1935년에는 대규모 정미소 운영에도 나섰다. 

성공한 기업가였지만, 그는 삶 속에서 수행을 놓지 않았다. 통도사에서 한암 스님, 한용운 스님, 동산 스님, 전강 스님, 경봉 스님, 향곡 스님, 효봉 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과 교류하며 법을 듣고 안거에 참여했다. 특히 대각사상을 주창했던 용성 선사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 그들을 핍박할 권한은 없다’는 스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함께 일하는 이들을 존엄한 존재로 대하며 자비의 실천을 이어갔다. 용성 스님과의 인연은 개인 수행을 넘어 불교 대중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대원 장경호 거사는 산 정상에 서 있을 때도 늘 바다 밑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재일동포의 신선기를 인수해 조선선재주식회사를 설립하며 못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고무신을 신고 보퉁이를 멘 채 고철을 모으며 시작한 사업은, 한국전쟁 이후 재건 사업으로 수요가 급증하자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1954년에는 사업 기반을 서울로 옮겨 한국특수제강을 인수하고, 영등포 당산동에 동국제강주식회사를 창립했다.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50톤 규모의 전기로(電氣爐)를 설치하며 한국 철강 산업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동국제강은 국가 기간산업인 철강업을 견인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60세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부인 추명순 여사와 함께 전국의 명승고찰을 참배하며 수행과 불사에 정진했다.


경영인에서 수행자로서의 삶


열일곱 청소년 시절, 대원 장경호 거사는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이치를 절감하고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통도사 구하 스님으로부터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받고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등잔불 아래서 좌선하는 일상을 반복하며, 삶의 활력으로 삼았다. 그에게 수행은 단지 마음의 위안을 얻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부처임을 깨닫는 실천의 길이었다.

1925년 스물일곱, 그는 결제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형님의 목재소 일과 아내와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하안거 전날, 거사는 통도사 일주문을 조용히 들어섰다.

통도사 보광전에서 석 달간 묵언 수행을 마친 뒤, 그는 대웅전 부처님 앞에서 서원했다.

“부처님, 이제 저는 사업을 일으켜 돈을 크게 벌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윤은 모두 국가의 은혜와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데 회향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평생 점심 한 끼 사 먹지 않고 용돈 한 푼 쓰지 않고 돈을 벌고 모았다. 돈을 벌되 집착하지 않았고, 그것을 어떻게 회향할지를 깊이 고민했다. 동국제강그룹 창업자로 결단력과 추진력을 발휘한 경영인이었지만, 수시로 절에 들어가 안거하며 백일 동안 수행하는 등 일반 경영자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생업과 가족, 사회적 책임을 안고 있으면서도 삶 전체를 도량 삼아 정진한 ‘살아 있는 유마 거사’였다. 


여전히 살아 있는 이 땅의 유마 거사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던 대원 장경호 거사, 그의 활동은 대한불교진흥원의 출발점이 되었다. 수많은 불사에 적극 동참했던 그는 청년들을 위한 군 포교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장경호 거사는 마음공부의 길 위에서 사업과 수행, 자비와 실천을 조화롭게 펼친 사람이었다.

“재물은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도심 한복판 남산 자락에 대원정사를 세우고, 누구나 불법을 배울 수 있도록 재가자를 위한 교육기관인 대원불교교양대학을 교계 최초로 설립했다. 수행과 포교, 교육과 나눔이 하나 된 보살행의 실천 모델이었다. 세상 속에서 대중과 함께 부처의 길을 걸었던 ‘이 땅의 유마’, 장경호 거사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질문을 남겼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세상 속에서의 수행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가 남긴 묵직한 물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꺼지지 않는 숨결로 살아 있다. 한 편의 선문답이자 수행 기록이며 앞으로 계승해나가야 할 ‘대원 장경호 거사의 거룩한 정신’은 불교의 지향점이고 실천적 가치가 될 것이다.  


유승희|방송작가. 드라마 <멋진 하루>, <백수와 건달>, 다큐멘터리 <한국의 명찰>, <거사열전>, <KBS 라디오로 여는 세상>, <SBS 러브 FM>, BBS의 <무명을 밝히고>, <차 한잔의 선율>, <백팔가요>, <살며 생각하며>, <신행 365> 등 다수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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