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팔공산 은해사
은빛 물결
일렁이는
그곳,
고승대덕
요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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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해사는 절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의 풍광이 마치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고 해서 이름 붙은 사찰이다. 신라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과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스님 등 많은 고승을 배출한 고찰이다. |

영천 은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헌덕왕 1년(809년)에 혜철국사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했다.
그 뒤 1270년에 홍진국사가, 1275년에는 원참이 중건했으며 인종 1년(1545년)에는 천교가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해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했다.
부처와 보살, 나한이 늘어선 것처럼 그 절집 주변 풍광이 웅장하고,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와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 낀 풍경이 마치 은빛 바다와 같아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1563년 묘진이 중건했고, 1589년에는 법영이 법당 사방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단청했다. 1651년에는 백흥암을 중건하고 명부전을 신축했으며, 1667년에 다시 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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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 동쪽에 자리한 은해사는 신라 헌강왕 1년,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惠哲) 스님이 창건했다. 현재 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운부암(雲浮庵), 거조암(居祖庵), 기기암(寄寄庵), 백흥암(百興庵) 등 이름난 산내 암자만도 8개를 거느린 큰절이다. |
『사기』에 의하면 백흥암은 은해사를 창건한 혜철국사가 861년에 착공해 873년에 완공했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송지사라 했다고 한다. 그 뒤 1546년에 천교화상이 백흥암으로 개칭했고, 1651년에 중건했으며, 1677년에 중수했다. 1730년에는 보화루를 중건했고, 1858년에 영산전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한때 수백 명이 모여 수도했다고 하며, 규모도 암자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백흥암에는 1531년에 간행된 ‘법화경판’과 이곳을 거쳐 간 24인 고승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비구니 스님의 수행 도량으로, 안거 때에는 수십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다.
은해사는 1714년에는 일대의 땅을 매입해 소나무를 심었으며, 1750년 법당의 아미타 후불탱화를 조성했다. 1759년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761년에는 천왕문을 세웠다. 이후로도 은해사와 암자들의 중창과 중건 등이 계속되었으나 1847년에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 불이 나서 1,000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하지만 그해 사방 아홉 칸의 법당과 향실, 심검당, 설현당, 청풍료 등을 새로 지었다. 이듬해에 옹호문, 안양전, 동별실, 만월당, 향적각 등을 세웠으며, 1849∼1850년에 걸쳐서 보화루를 중수했다. 그해 운부암을 중건해 법전, 설선당, 조실, 영각, 노전 등을 세웠다.
흥미로운 것은 1,000여 칸의 소실이면 엄청난 재난이고 이를 복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화재로 소실된 당해 연도부터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시작해 무려 30여 년간 중건과 중수, 중창을 거듭해 사세의 규모나 위력의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이후로도 1900년에는 운부암의 보화루를 중건했고, 1920년에는 대웅전, 단서각, 계삼당, 보화루를 수선하고, 주지실과 요사 네 동, 대문 둘을 지었다. 또 구재와 신재를 사용해 옛 조실을 하지전으로, 극락전을 응접실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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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개의 은해사 산내 암자 중에서 영화의 주 배경이 된 것으로도 유명한 비구니 스님 사찰인 백흥암이 자리 잡고 있다. 백흥암은 일 년에 하루(초파일)를 제외하고는 산문을 개방하지 않는다. 항상 조용하고 정갈하면서도 언제나 수십 명 이상이 모여 수행과 운력에 여념이 없는 수행 도량이다. |
현재 이 절은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 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다. 1943년까지만 해도 논 46만 4,000여 평(153만 3,884㎡), 밭 2만 8,000여 평(9만 2,561㎡), 임야 920정보(912만 3,966㎡)가 있었고, 2,484평(8,211㎡)에 세워진 건물은 35동 245칸에 이르렀다. 은해사는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지눌이 거조암에서 신행결사를 도모한 이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홍진국사가 머문 뒤에는 선교 양종의 총본산으로서 사격이 고양되었고, 조선 후기의 고승 영파가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을 드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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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은 크게 6개의 하천이 낙지 발처럼 방사형으로 뻗어서 낙동강의 대지류인 금호강(琴湖江)으로 모여든다. 하천 주변으로 형성된 기름진 땅에는 사과, 복숭아, 포도가 많이 재배되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
이 절과 부속 암자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3점의 문화재와 기타 60여 점의 보물이 있고 24동의 건물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중국식 건축 양식을 본뜬 국보 제14호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운부암, 거조암, 기기암, 백흥암, 묘봉암, 중암암, 백련암, 서운암 등이 있다.
이 중 백흥암의 수미단은 높이 1.25m, 너비 4.13m에 5단으로 27등분해 제작한 목조 탁자로, 각 면에 안상(眼象), 봉황, 공작, 학, 용, 동자, 물고기, 개구리, 코끼리, 사자, 사슴 등이 조각되어 있어, 우리나라 조각미술의 원조라고 할 만큼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미단은 백흥암의 백미로 꼽힌다.
글|이민(자유기고가)
사진|신병문(다큐멘터리항공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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