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성’과 ‘인정 욕구’는 공존할 수 있을까?|김학진 교수의 인문학 강연

‘이타성’과 ‘인정 욕구’는
공존할 수 있을까?

김학진 교수


이기적이기에 이타성을 추구한다고요?
이타성과 인정 욕구. 이 두 가지는 보통 공존할 수 없는 단어로 받아들여진다. ‘이타성’은 남을 위한 마음, ‘인정 욕구’는 나를 위한 마음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학진 교수는 ‘이타성’과 ‘인정 욕구’를 전혀 다른 두 가지로 해석하기보다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뇌의 역할과 기능을 이야기했다.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가기 전, 김학진 교수는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나온 한 대사,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요”를 언급했다. 김 교수는 “이 문구는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극도의 이기주의자로 살아온 멜빈이 캐롤을 만난 뒤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된 후,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대사”라며 “캐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다. 때문에 관객은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이타적 마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고 운을 뗐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정 욕구와 이타성은 반대말에 가까울 정도로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단어일 겁니다. 그동안 제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는 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뜻을 내보였습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목숨을 던진 영웅들의 순수한 이타성을 어떻게 인정 욕구로 폄훼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죠. 또 어려운 사람을 도왔을 때의 뿌듯함 그리고 즐거움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타성에 비해 인정 욕구를 다소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뇌 과학은 이러한 편견 속에 감춰진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데 도움을 주죠.”

김학진 교수에 따르면 최근의 뇌 과학 연구들은 우리가 지닌 이타성의 기저에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편견을 걷어내고 인정 욕구의 뇌 과학적 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였다. 또 이타성뿐 아니라 인정 욕구가 인정 중독으로 이어질 때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부적응적인 사회적 행동들에 대해 살펴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뇌 과학적 방법들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가치관을 결정짓는 ‘복내측 전전두피질’
인간의 뇌에는 생존을 위한 행동에 필수적으로 관여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측핵’과 ‘편도체’다. 이 중 ‘측핵’은 ‘접근 행동’에, ‘편도체’는 ‘회피 행동’에 관여하는데 여기서 접근 행동이란 맛있는 음식 사진이나 매력적인 이성 사진, 혹은 돈과 같은 보상 자극을 만났을 때 보이는 반응을 일컬으며 회피 행동이란 위험을 감지했을 때 나오는 반응을 일컫는다. 즉 두 영역은 서로 대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보상에 대해 자동적으로 강한 접근 반응을 촉발하는 측핵과 위협적인 자극에 대해 반사적으로 회피 반응을 만들어내는 편도체가 서로 상충하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호감이 가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상황을 떠올려볼까요? 측핵은 상대방에게 다가가서 고백하라고 재촉하지만 혹시라도 불쾌해할 상대방의 반응을 상상하면 선뜻 다가가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갈등 상황을 해결하려 할 때 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부위가 ‘복내측 전전두피질(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입니다.”

김학진 교수에 따르면 복내측 전전두피질은 미간보다 약간 높은 지점의 이마로부터 약 5cm가량 뒤쪽에 위치한다. 이 부위는 접근 반응을 촉발하는 측핵, 회피 반응을 촉발하는 편도체 모두와 강하게 연결돼 있다.

“고통을 유발하는 자극은 신체의 항상성을 불균형 상태로 이끌고 편도체는 다시 균형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복내측 전전두피질로 신호를 보내 회피 반응을 촉발합니다. 항상성을 유지하는 거죠. 이처럼 우리 뇌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신체 항상성 유지를 위해, 복내측 전전두피질을 이용합니다. 측핵과 편도체 모두로부터 끊임없이 재촉받는 복내측 전전두피질은 접근과 회피 간의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서 조심스럽게 줄을 건너가는 마치 외줄 타기 곡예사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생 동안 수많은 크고 작은 접근과 회피의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체득된 접근과 회피의 절묘한 균형적 전략들이 반복되면서 점차 자동화되고, 이는 우리 뇌 속에 저장된다. 이렇게 자동화된 삶의 전략들을 ‘직관’이라고 부르며, 복내측 전전두피질은 바로 이러한 직관들이 저장된 뇌 부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전에 경험했던 갈등 상황과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복내측 전전두피질에 저장된 직관이 활성화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접근과 회피 간의 갈등을 해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습득된 자동화된 직관적 행동 전략들은 우리의 선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러한 직관들을 ‘가치(value)’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두 선택지들 간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이유는 선택된 것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며, 우리가 일상에서 하게 되는 대부분의 선택들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과거의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 뇌 속에 형성되고 각인되어온 직관 혹은 가치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거죠.”

충동적 이타성에서 합리적 이타성으로
하지만 이러한 복내측 전전두피질이 균형을 잃게 되면 많은 부작용이 생겨난다. 김학진 교수는 100년 전 미국에 살았던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라는 뇌 손상 환자의 사례를 들었다. 철로 작업 노동자였던 게이지는 어느 날 사고로 쇠막대기가 뇌를 관통하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사고 직후 그는 바로 응급실로 이송됐고, 다행히도 뇌의 인지 기능 대부분이 거의 정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결과를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사람들은 게이지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게 됐다. 사고 전에는 따뜻한 성품으로 동료들로부터 존경받았지만, 사고 이후 그는 폭력적이고 무례한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복내측 전전두피질의 물리적 손상에 의해서만 사회적 행동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접근 행동과 회피 행동 간의 균형점을 유지하는 복내측 전전두피질 기능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접근 혹은 회피 중 한쪽 방향으로 편향된 반응을 초래하는 가치 계산 불균형에 의해서도 사회적 행동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부적응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보이는 사회적 행동들은 바로 이러한 접근-회피 간 불균형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 있죠.”

접근 편향이 두드러질 경우 대개는 과도한 인정 욕구를 받고자 하며, 회피 편향이 두드러질 경우 강한 내집단 문화가 만들어지곤 한다. 예를 들어 내집단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외부에 공공의 적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더 심할 경우 왕따 문화 등이 발생할 수 있으며, 사회적 규범을 어기면서까지 내집단을 감싸고 타 집단을 비난하는 비윤리적 집단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혹자는 이타성의 기저에 인정 욕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 이타성 뒤에 숨은 이기심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높아지고, 불의에 항거하는 이타주의자들이 출현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나치게 순수한 선의를 강조하는 문화가 오히려 이타적인 행동을 찾아보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봐요. 오히려 순수한 선의를 강조하는 주장은 마치 인간의 생리작용과 대사작용을 이해하면 식욕이 사라질 것이라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우에 불과하다고 봐요. 인간의 생존과 적응에 필수적인 인정 욕구가 자연스럽게 확장돼 나타난 건강한 도덕적, 이타적 행동은 그 이면의 동기를 이해한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어요.”

자신의 신체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면 건강에 해로운 습관을 피하기 쉬워지는 것처럼, 이타성이라는 포장 뒤에 숨은 인정 욕구를 인식하고 점검하는 과정은 인정 욕구가 자신을 포함한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형태로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학진 교수는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적 압력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되고 감정적 및 충동적 이타주의로부터 벗어나 좀 더 성숙한 형태의 합리적 이타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행복감과 불행함의 대부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기저에는 항상 인정 욕구가 있게 마련이죠. 매 순간 나의 생각과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인정 욕구를 끊임없이 점검함으로써 균형 잡힌 가치를 지향하는 삶이야말로 뇌 과학이 제안하는 행복한 삶 아닐까요? 생존 확률을 극대화하고자 노력하는 우리 뇌의 궁극적 목표는 이타적인 삶이며 이러한 삶의 가장 큰 수혜자 역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김학진 교수의 ‘이타주의를 추구하는 이기적인 뇌’ 강연 내용을 취재해 정리한 것이다.


취재·글|황정은(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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