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주왕산을 법향으로 물들이다
- 청송 대전사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요사채 등이 있다.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내·외2출목의 다포식 건축이며,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이익공 양식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사찰은 그 터가 부선형이라 배가 떠서 항해하는 형세 였는데, 절 앞뜰에 우물을 파서 사용하자 불이 나서 절이 타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청송 대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12년(672) 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고려 태조 2년(919)에 보조국사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 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절이 불타는 바람에 오래된 건물은 별로 남 아 있지 않다. 경내가 그리 넓지 않아 매우 호젓하다. 보광전이 중심 전각이며 명부전과 나한전, 산령 각, 가학루 등이 있고, 그 밖에는 요사채들이다. 산내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과 주왕암이 있다.
이 중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며, 옛날에는 이 암자에 큰 종이 걸려 있어 아침저녁으 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하나 지금은 걸려 있지 않다. 주왕암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나 오는 주방사로 추정된다.
보광전 앞의 석탑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 맞춘 것이고 보광전 동쪽으로 자잘한 돌들을 차곡차곡 쌓은 탑도 이채롭다. 진안 마이산 갑사(탑사)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돌탑 뒤쪽으로 조 선시대 부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도밭도 있다.
청송은 가을이면 늘 붐빈다. 그 중심에 주왕산이 있다. 좋은 산은 사철 아름답지만 청송 주왕산은 단풍 때가 특히 좋다. 면적이 그다지 넓지도, 썩 높은 봉우리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주왕산이 국립공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이한 풍광이 많아서일 것이다.
『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 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 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했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또 신라의 주원왕(周元王) 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에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해 오늘에 이른다.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이 절에서는 부처 님에게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했다. 이를 귀찮게 여긴 스님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 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길어서 청수(淸水)로 사용했다. 그러나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뒷날 한 도사가 이 절의 지세는 배가 바다에 떠서 다니는 부선형(浮船形)인데 우물을 판 것은 마치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것과 같아 절이 망할 운세라고 했고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이 다시 우물을 메웠다 한다.
글|이민(자유기고가), 사진|신병문(다큐멘터리 항공사진작가)
경상북도 청송 대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12년(672) 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고려 태조 2년(919)에 보조국사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 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절이 불타는 바람에 오래된 건물은 별로 남 아 있지 않다. 경내가 그리 넓지 않아 매우 호젓하다. 보광전이 중심 전각이며 명부전과 나한전, 산령 각, 가학루 등이 있고, 그 밖에는 요사채들이다. 산내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과 주왕암이 있다.
이 중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며, 옛날에는 이 암자에 큰 종이 걸려 있어 아침저녁으 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하나 지금은 걸려 있지 않다. 주왕암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나 오는 주방사로 추정된다.
보광전 앞의 석탑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 맞춘 것이고 보광전 동쪽으로 자잘한 돌들을 차곡차곡 쌓은 탑도 이채롭다. 진안 마이산 갑사(탑사)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돌탑 뒤쪽으로 조 선시대 부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도밭도 있다.
청송은 가을이면 늘 붐빈다. 그 중심에 주왕산이 있다. 좋은 산은 사철 아름답지만 청송 주왕산은 단풍 때가 특히 좋다. 면적이 그다지 넓지도, 썩 높은 봉우리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주왕산이 국립공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이한 풍광이 많아서일 것이다.
『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 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 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했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또 신라의 주원왕(周元王) 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에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해 오늘에 이른다.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이 절에서는 부처 님에게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했다. 이를 귀찮게 여긴 스님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 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길어서 청수(淸水)로 사용했다. 그러나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뒷날 한 도사가 이 절의 지세는 배가 바다에 떠서 다니는 부선형(浮船形)인데 우물을 판 것은 마치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것과 같아 절이 망할 운세라고 했고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이 다시 우물을 메웠다 한다.
글|이민(자유기고가), 사진|신병문(다큐멘터리 항공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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