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과 윤회는 우리의 일상 생활기록부다|업(業)은 숙명이 아니다

업과 윤회는
일상을 사는 힘

허남결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업과 윤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기시감(Déjà vu, 데자뷔)이 혹시 전생의 기억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정확하게 두 번쯤 데자뷔를 경험했던 것 같다. 한 번은 영주 부석사의 일주문을 들어서기 직전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던 일이고, 다른 한 번은 논문 자료를 찾으러 영국을 방문했을 때 어디를 가도 전혀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당황스러울 정도로 놀랐을 때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과 윤회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을 만큼 독특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는 종교적 신념이다. 특히 현대인의 윤리적 삶과 관련해 업과 윤회는 서구인에게도 커다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행위 이론인 ‘업’과 이에 따른 직간접적인 ‘과보’를 뜻하는 ‘윤회’란 도덕적 사고방식이 단순 명료하면서도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드는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 나의 삶이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전생에 저질렀던 나의 잘못, 즉 내가 지은 나쁜 업 때문이며(반성하고 참회해야 할 부분), 반대로 오늘 내가 향유하는 행복은 과거에 지은 좋은 업 때문이라고(자기 자신을 더욱 되돌아봐야 할 부분) 여긴다면, 우리의 윤리적 정당화나 태도의 변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공식은 미래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곧 업과 윤회의 도덕적인 함의다. 업과 윤회란 믿음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적이면서도 정서적인 설득력 덕분이었다.

업과 윤회는 선악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누구나 살면서 이런 물음을 던지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왜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가?”, “왜 착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데 반해, 사악한 사람들은 떵떵거리고 잘사는가?”, “세상은 왜 더 나아지거나 정의로운 곳이 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그 모양 그 꼴인가?”, “이 세상에는 왜 고통과 죽음이 존재하는가?” 등과 같은, 꼭 묻고 싶었던 질문들 말이다. 업과 윤회는 이러한 실존적 물음들에 대한 불교적 답변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다른 종교들처럼 불교도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짓는 선하거나 악한 삶은 어느 시점에선가 반드시 그것에 합당한 도덕적 보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종교적 약속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마음씨 좋은 사람들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자가 되기도 하고, 불치병을 얻어 너무 일찍 죽는가 하면, 못된 심성을 가지고 정의롭지 않게 살았거나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의 삶이 당장 불행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목격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의 이치가 우리에게 놀랍지 않다는 것은 결국 선행과 보상 사이의 논리적 필연성에 대한 종교적 설명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크게 다치거나 몹쓸 병을 얻어 불행해지는 것을 본다면,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은 도무지 세상에는 도덕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지 않을까?

업과 윤회를 증명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만일 전생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때의 일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현상을 일반화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경험을 실체적 진실로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전생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불행을 업과 윤회의 관점에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이전에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은 당신이 지은 과거의 업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도덕적 설득력이 떨어지긴 마찬가지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업과 윤회는 불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도덕교육 이론으로서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개연성도 없지 않다. 아울러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불행이 전생에서 자기가 저지른 악업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설사 업과 윤회의 교의를 인정하더라도 어떤 사람의 현재를 있게 한 최초의 원인을 어디까지 소급할 것인가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원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업과 윤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논리적인 구조가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무게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전생이나 내생에 대해서는 어떤 궁금증도 품지 않아야 할까? 아니면 업과 윤회는 보이지 않는 우주의 원리로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어제처럼 오늘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침묵의 그림자와 같은 그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두 가지 물음 모두 선뜻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진지한 종교적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감히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업과 윤회가 함축하고 있는 비유적 메시지를 부담스럽지 않은 일상생활 속의 소박한 윤리적 가르침으로 읽어낼 수 있는 종교적 용기를 가져보자는 제안이다. 시시각각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나의 모든 행위는 틀림없이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도덕원리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내세가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즉시 과보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옷깃을 여며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업과 윤회는 우리의 일상 생활기록부다
불교의 업과 윤회는 무엇보다도 목적 지향적인 자기 변화의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내가 행한 만큼 과실을 얻을 수 있다는 도덕적 기대감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현대인에게도 얼마든지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보이지 않는 업의 에너지가 언제나 내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도덕적인 사고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한번 더 강조하지만, 업과 윤회에 바탕을 둔 불교적 행위 전략은 과거 반성적 숙명론이 아니라 미래지향적 윤리성을 함축하고 있는, 일상의 생생한 도덕적 에너지로 얼마든지 재해석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비유 하나를 통해 업과 윤회의 상징적 가르침을 곱씹어보기로 한다. 어제저녁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맛있게 먹은 치킨과 삼겹살이 십수 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는 가까운 친인척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윤회의 흔적이라고 한번 상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고약한 고기 냄새로 뒤범벅이 된 자신의 볼썽사나운 모습에 하루 내내 기분이 우울할 것이다. 이는 업과 윤회가 던지는 윤리적 메시지의 한 사례에 불과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우리 주변의 온갖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현재 삶이 누가 보더라도 만족스럽다면 죽음의 문제는 이미 극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죽음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일상의 생활기록부이자 종합성적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삶을 살았다면 우리는 이미 불보살의 삶을 산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때쯤이면 업과 윤회에 대한 종교적 회의도 찾아볼 수 없지 않을까 싶다.

허남결
동국대학교 국민윤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 박사).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불교윤리와 공리주의의 접점 모색에 관심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공리주의 윤리문화 연구』가 있고, 번역서로는 『불교와 생명윤리학』, 『자비 결과주의』, 『불교응용윤리학 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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