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왜 존재하는가
– 진화적 관점
전중환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유튜브에는 1990년대 옛날 뉴스를 편집한 영상도 있다. 분명히 내가 살아온 시절인데 낯설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그 당시에는 대걸레, 당구 큐대, 심지어 하키채마저 교사가 학생들을 훈육하는 ‘사랑의 매’로 둔갑하곤 했다. KLAB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보면 1998년에 한 중학생이 병원에 입원한 채로 방송국과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 아이들이 떠들어서 제가 대표로 책상에 올라가서 하키 채로 여러 번 계속 맞았어요. 그땐 억울하단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맞았어요.” 때린 교사의 항변(?)을 들어보자. “때리는데… 걔가 날 확 째려봤어요. 그런 상황이 딱 닥치면 멈출 수가 없어요.” 요즘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 교육부 장관이 당장 옷을 벗어도 모자랄 것이다.
물론 폭력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옥죈다. 체벌, 성희롱, 강간, 구타, 아동 학대, 인종 차별, 살인, 테러, 집단 학살, 전쟁 등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쓰는 일상 언어만 들여다봐도 폭력이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코로나와의 전쟁’, ‘한국 여자 배구가 터키를 물리쳤다.’ ‘대선 후보를 검증할 저격수’, ‘항공기로 약제를 뿌려 비구름을 격퇴한다’ 등이 그 예다.
왜 사람들은 폭력을 저지를까? 전통적인 사회과학자들은 폭력은 사회 문화적으로 학습된 일종의 질병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천성은 원래 평화롭다. 그러나 가난, 불평등, 자본주의, 마초적인 가부장제, 비뚤어진 가정환경, 막 나가는 대중매체 등의 외부 요인이 깨끗한 본바탕을 더럽히고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자녀가 파워레인저 장난감 총이나 잔혹한 비디오게임에 물들까 봐 노심초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설명은, 틀렸다. 놀라지 마시라. 폭력은 진화한 인간 본성의 일부다. 아니, 뭐라고요? 많은 사람이 폭력성은 오래된 진화의 산물이라는 말만 들어도 내심 뜨악해한다. 폭력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서 유래한다면, 폭력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굴레다. 따라서 강간, 살인, 전쟁을 줄이려는 노력은 다 헛수고일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무시무시한 망언을 글쓴이는 이제 늘어놓으려는 참인가?
걱정은 접어두길 바란다. 진화적 시각을 따르면, 폭력이 그냥 막무가내로 생기는 병리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기능을 잘 수행하게끔 정교하게 조절되는 심리적 적응에서 유래한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폭력을 일으키는 심적 장치에 달린 수많은 조절 버튼과 스위치들이 각각 어떤 임무를 맡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어’ 있는지 알아낸다면, 폭력을 줄이고 평화를 일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폭력은 정교하게 설계된 심리적 적응에서 나온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본래 이성적이고 평화를 추구하지만, 이따금 ‘뚜껑이 확 열려서’ 일종의 병리 현상인 폭력을 아무렇게나 행사하게 된다는 기존의 설명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인간을 포함한 어느 동물에서나 음식물, 영토, 짝짓기 기회, 사회적 지위 등 유・무형의 한정된 자원을 놓고 개체들끼리 경쟁을 펼친다. 경쟁에서 이기는 좋은 방책 중의 하나는 폭력이다. 힘을 동원해서 다른 개체를 윽박지르거나 흠씬 두들겨줌으로써 자원을 몽땅 차지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개체도 되받아칠 수 있다는 점이다. 개체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남에게 신체적 상해를 입혀서 자원을 독차지하는 전략이 유리하다고 하자. 이때 폭력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개체에서 수지맞는 장사다. 즉 폭력이 유리한 상황에서는 어느 한 개체뿐만 아니라 동종에 속한 모든 개체에서 일제히 폭력적인 성향이 진화하기 마련이다. 내가 누군가를 때리려고 다가간다면, 그 즉시 상대방은 나보다 먼저 주먹을 날려서 나를 때려눕히려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화근을 없애기 위해 아예 적을 한 방에 죽이면 그만이지 않을까? 그래도 적이 남긴 피붙이들은 나를 죽여서 평생의 원한을 풀려는 목표를 갖게 된다.
이처럼 폭력은 폭력을 행사한 당사자에게도 심각한 부상, 신체 장애, 죽음 등 매우 높은 비용을 청구하는 전략이다. 그러므로 평화 대신 폭력이라는 수단을 택하는 의사 결정은 아주 치밀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지게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공들여 ‘설계했을’ 것이다(자연선택은 어떠한 의도도 계획도 없는 기계적인 과정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마치 의도가 있는 양 의인화했다). 수백만 년 전 소규모의 수렵 채집 사회에서 정말로 생각 없이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두른 사람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일찌감치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번식에 도움이 되게끔 주먹을 요령 있게 휘두른 사람만 자연선택되어 우리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폭력을 담당하는 심리적 적응에는 자신과 상대방의 성, 연령, 몸집, 지위에 대한 정보, 제삼자의 참관 여부 등등 구체적인 외부 조건에 따라 어떤 폭력을 얼마나 휘두를지 섬세하게 조절하는 각종 버튼과 스위치들이 빼곡히 달려 있다. 폭력에 대한 진화적 시각은 살인이나 아동 학대 같은 폭력이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 주장하기는커녕,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 발생 빈도를 크게 낮출 수 있는 사회현상임을 암시한다.
명예 또는 체면을 지키기 위한 우세 폭력
폭력은 외부의 환경 조건에 따라 정교하게 조절되는 심리적 적응에서 나옴을 잘 보여주는 예를 하나 살펴보자. 바로 ‘우세(dominance)’에 의한 폭력이다. 은행을 습격하는 무장강도, 월척을 낚는 낚시꾼, 여성을 해치는 성폭행범 등은 모두 돈, 오락거리, 성관계처럼 구체적인 자원을 얻고자 폭력이라는 수단을 고른 가해자들이다. 반면에 세상에는 진심으로 정신 나간(?) 것처럼 막무가내로 터져 나오는 폭력도 있다. 깜빡이를 안 켜고 내 차선에 끼어들었거나, 버스 안에서 어깨를 살짝 부딪쳤다거나,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다는 사소한 이유로 상대방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공격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물론 이들은 대개 남성, 그것도 젊은 남성이다). 서두에서 우리는 체벌을 가하던 와중에 학생이 자신을 째려봤다는 별것 아닌 이유로 학생을 하키 채로 미친 듯이 때린 교사를 만나본 바 있다.
왜 사람들은 그 어떤 뚜렷한 이득도 얻을 수 없을 듯한 상황에서 욕설, 깔보는 듯한 미소, 가벼운 신체 접촉 등 소소한 시비가 붙으면 심각한 폭행이나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를까? 주점에서 즐겁게 떠드는데 옆자리에서 “거 좀 조용히 얘기합시다”라고 말했다고 순식간에 발끈하는 사람은 무척이나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이다. 우리가 진화한 먼 과거의 수렵 채집 사회에서 112만 누르면 경찰이 곧바로 달려오는 공공 치안 서비스는 없었다. 이처럼 자기 몸은 자기가 스스로 지켜야 했던 사회에서, “날 건드리면 재미없다”며 지위 서열 내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를 지키고자 하는 의향과 능력이 넘침을 남들에게 똑똑히 각인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즉 남성들은 종종 별로 큰 이득도 없는데 주먹다짐을 한다고 조롱을 받지만, 진화적인 관점에서 실은 아주 중대한 이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다. 명예 혹은 체면에 해당한다. 누가 더 높은 위치인지 불투명할 때 상대방과 언쟁이 붙었다고 하자.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푹 숙이면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공개적으로 땅에 떨어지게 된다. 먼 과거 환경에서 지위가 추락한 남성은 커다란 번식상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두 경쟁자의 지위가 비슷하고 서로 자신이 이기리라고 확신하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작은 도발에도 발끈해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우세 폭력이 벌어질 가능성이 특히나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로에서 운전자들끼리 차선 변경을 놓고 시비가 붙는 경우다. 반면에 두 경쟁자 가운데 누가 더 우위인지 둘 다 잘 아는 상황이라면, 우세 경쟁에 의한 폭력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회장님이 눈을 한번 치켜뜨면 부하 직원은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기 바쁘다. 물론 하급자가 상급자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듯하면 엄청난 폭력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도로 위의 보복 운전을 줄이는 효과적인 정책 중의 하나는 무례한 상대방 운전자를 대뜸 공격하는 행동은 명예를 중시하는 진짜 사나이의 기개는커녕 어리석고 미숙한 동네 양아치의 폭주에 불과함을 널리 반복적으로 홍보하는 것이다. 폭력 범죄를 촉발하는 ‘정당한’ 분노는 허상이다
폭력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자연선택이 빚어낸 심리적 적응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폭력은 불가피하며 도덕적으로 정당할까? 버릇없이 행동하는 학생에게 격해져 마구 발길질을 한 선생님은 인간 본성을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니 죄를 물을 수 없을까?
그렇지 않다! 폭력이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된 까닭은 어디까지나 폭력적인 성향이 진화적 과거에 그저 조상들의 번식 성공률을 높이는 데 ‘우연히’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먼 과거의 수렵 채집 환경에서 조상들이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더 많이 남기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 자연선택은 개체의 건강, 행복, 복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감정을 따르는 편이 결과적으로 개체의 행복이나 건강을 높이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샤워할 때 느끼는 쾌감은 개체를 건강하게 한다. 그러나 이는 자연선택의 관심사가 아니다. 개체를 괴롭히는 어떤 감정이 석기시대의 환경에서 개체의 번식에 도움이 되었다면, 자연선택은 주저 없이 쓸모 있는 부정적 감정을 진화시킨다. 예컨대 후회는 괴롭지만 우리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럽고 정당한’ 분노는 허상이다. 오직 석기시대의 환경에서 유전자의 전달에 도움이 되게끔 설계되었을 뿐, 오늘날 현대인의 장기적인 건강이나 행복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분노는 미망이고 허상이다. 21세기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가 과학과 이성을 통해 폭력적인 본성을 적절하게 제어한다고 해서 눈살을 찌푸릴 조물주나 초월적인 섭리는 없다.
전중환
서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행동생태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대학교(오스틴) 심리학과에서 진화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텍사스대(오스틴) 방문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국제캠퍼스) 교수로 있다(진화심리학). 주요 저서로 『진화한 마음』, 『본성이 답이다』, 『오래된 연장통』이 있고, 역서로 『욕망의 진화』(데이비드 버스), 『적응과 자연선택』(조지 윌리엄스), 『종의 기원』(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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