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사무량심 수행 | 자비 3

 자비 3


자비와 사무량심 수행 

– 공감과 연민, 이성과 감성 통합으로서의 자비


윤희조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사무량심, 순차적으로 보기

사무량심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말한다. 자비희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서 해석의 중점이 달라질 수 있다. 자비희사에 반대되는 마음을 자비희사로 대치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대치적 해석, 자비희사를 순서적으로 수행이 진행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순차적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본고는 이 가운데 순차적 해석을 중심으로 자비희사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사무량심의 또 다른 이름인 사범주에 대해서 이해해보고자 한다. 내용은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기능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심(慈心), 즉 메타(mettā)는 어원적으로 친구를 의미하는 미트라(mitra)에서 출발한다. 모든 존재를 친구로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할 때 단순하게 사(loving, 愛)이라고 하지 않고 자애(loving-kindness)라고 한다. 카인드니스(kindness)가 추가된다. 친구 간의 평등한 우정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우정은 상대방 또는 모든 존재를 나와 같은 존재로 대한다는 의미다. 높낮이 없이, 계급 없이 모든 존재를 고르게 그리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를 나와 같이 대하는 마음이 또한 자심이다. 또한 나의 유익을 구하는 만큼 모든 존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곧 자심이다. 자심에는 평등과 유익의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그들이 괴로워할 때는 그것을 없애주려고 하고, 그들이 즐거워할 때는 함께 즐거워하고, 그들을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도록 한다. 또한 평등은 사무량심의 마지막인 사심과 함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토대가 된다. 이처럼 자심은 나머지 세 가지 무량심의 바탕이 된다.

비심(悲心)은 친구 또는 모든 존재가 괴로워할 때 그의 괴로움을 위로해주고, 제거해주고, 함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이 또한 모든 존재를 나와 같이 평등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상대방 내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괴로움이 나의 괴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곧 괴로움을 함께하는 것이고, 괴로움을 없애주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마음, 즉 희심(喜心)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친구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함께하고자 한다. 즉 비심과 희심이 짝을 이루는 것이다.

사심(捨心)의 원어인 우뻬카(upekkhā)는 ‘가까이서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 평(equanimity)으로 번역된다. 평정은 평등하게 보는 것이면서 비심과 희심의 균형을 잡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사(捨)의 한역에서 볼 수 있듯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심은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이로부터 출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사심(捨心)은 사선정과 연관해서 설명할 수 있다. 사심은 사선정의 제사선에서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는 형태로 전면에 드러난다. 이때의 사(捨)는 그 이전의 선정의 요소인 희(喜)나 낙(樂)이 사라진 상태이다. 희락없이 평정하고 평등하게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한 사심(捨心)은 칠각지에서 사각지(捨覺支)로도 등장한다. 칠각지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일곱 요소들을 계발하는 수행을 말한다. 그 가운데 가장 마지막 요소로 등장하는 사각지는 마음을 평정하게 하면서 나머지 요소들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모든 존재에 대한 평등한 시각, 즉 자심(慈心)이 전제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연민과 공감이 가능하게 된다.

자심의 바탕을 굳건하게 할 때 진정한 연민과 공감이 가능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해탈과 명지로 이어지는 토대가 된다


선정이 지혜로 나아가는 토대가 되고, 칠각지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요소라는 점에서 보면, 사심은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요소가 된다. 선정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여전히 사심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깨달음의 요소에서도 사심은 마지막 각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보면 사심은 평정하고 균형을 잡는 것, 즉 평등한 것을 의미하고, 지혜와 깨달음의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평등의 의미는 자심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비희(悲喜)가 괴로움을 제거하고 즐거움을 함께한다는 측면에서 연민하고 공감한다면, 자사(慈捨)는 평등하게 유익하게 하고 평등을 바탕으로 지혜로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비희가 ‘함께’에 초점을 맞춘다면, 자사는 ‘평등’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慈)에서 모든 존재들에게 평등하게 유익을 준다는 전체에서 출발해, 비희를 통해서 모든 존재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하고, 마침내 사(捨)에서 자신과 타인들이 평등을 통해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전체적인 과정을 보게 된다. 평등에서 평등으로 자사가 수미쌍관하고, 비희가 그 사이에 다양한 역할을 한다. 자의 유익은 나머지 비희사 모두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는 나머지 전체의 토대가 된다. 사선정에서 사(捨)는 선정의 궁극을 말한다. 칠각지에서 사(捨)는 도, 즉 깨달음을 돕는 일곱 요소 가운데 마지막 요소다. 이처럼 사는 사선정과 칠각지 모두에서 마지막에 위치한다. 또한 사무량심에서도 마지막에 위치한다. 각각에 대해서 이전 것을 다 수행하고 난 이후의 마지막 관문과 같은 것이다. 이는 바로 불교의 궁극 목표인 명지(明智, 깨달음)와 해탈로 이어진다. 사무량심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사심은 해탈과 명지로 나아가는 역할을 한다. 결국에는 명지와 해탈로 나아가는 출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과정으로 사무량심을 순차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이름, 사범주

무량심(無量心)은 무량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마음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마음 가운데 하나가 알아차림이고, 알아차림 이외에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는 마음이 사무량심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런 마음을 많이 낼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말도 된다. 이 마음을 지속적으로 많이 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무량심을 많이 내는 것이 하나의 수행이 된다. 이는 또한 마음을 내야 한다면 이러한 마음을 내라고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마음을 내라’고 하는 것을 초기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 마음을 내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업을 만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면 이런 식의 마음 냄, 마음씀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내면 마음이 정화된다. 즉 업으로 인한 장애를 지속적으로 청정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업은 마음으로 인해서 짓게 되는데, 이러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내면 기존의 장애가 약해지게 되고, 비록 업이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업의 결과를 가볍게 받게 된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안의 업, 모든 존재의 업을 정화하는 훌륭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나의 업과 모든 존재의 업을 함께 정화할 수 있는 것은 자심, 즉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보고 유익을 바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무량심은 또한 사범주(四梵住)로 불린다. 범천이 머무는 네 가지 곳이다. 범천은 색계와 무색계에 머무는 비물질적 존재이기에 마음의 형태, 즉 의식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이 곧 범천이 머무는 곳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범천으로 ‘범천권청’에 나오는 사함빠띠이다. 사함빠띠가 붓다에게 설법을 권하는 것은 자신들조차도 여전히 삼계에 머물면서 윤회하는 존재이며, 삼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붓다의 법문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범천권청으로 인해서 인간들에게도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범천을 비롯한 천신들에게도 그러한 길이 열리게 된다. 여기에서 사범주의 마지막에 사심이 나오는 것을 다시 한번 이해하게 된다. 사심은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깨달음 또는 해탈의 상태는 아닌 것이다. 이는 신의 마음이 여전히 육도(六道)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범천도 붓다의 설법으로 인해서 명지와 해탈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사범주는 인간으로서 네 가지 마음을 내는 수행을 지속하게 되면 범천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도 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은 신의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을 꾸준히 낼 때 범천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범천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이 네 가지 마음으로 볼 수 있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내는 자가 범천이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는 말이 있다. 보시와 지계는 천신으로 태어나게 이끈다. 천신은 이른바 육욕천이라고 불리는 욕계의 존재이다. 범천은 선정의 마음에 머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둘은 구분되는 존재다. 둘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네 가지 마음 가운데 사심(捨心)이다. 사심은 해탈과 명지로 이끄는 칠각지의 하나인 동시에 사선정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정의 마음 가운데 사심에 머물면서, 해탈과 명지로 나아갈 수 있는 사각지에 머물기도 한다. 이처럼 사심은 선정에 머물면서 해탈과 명지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한다.

자비희사의 네 가지 마음은 무량심(無量心), 범주(梵住)라는 용어에 따라서 그 기능을 달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네 가지 자체만을 보자면, 비희는 현대적 용어로 연민과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마음을 함께하는 것은 공감이다. 함께하는 것이 괴로움일 수도 있고, 즐거움일 수도 있다. 공감 안에 함께 괴로워하는 연민 또는 동고(同苦)도 있고, 함께 즐거워하는 동락(同樂)도 있다. 모든 존재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 공감할 수 있다. 이는 모든 존재에 대한 평등한 시각, 즉 자심(慈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보는 것이 전제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연민과 공감이 가능하게 된다. 자심이 없으면 안도하는 연민, 시기하는 공감이 될 수 있다. 자심의 바탕을 굳건하게 할 때 진정한 연민과 공감이 가능하게 된다. 나아가서는 해탈과 명지로 이어지는 토대가 된다. 서구의 심리학에서 알아차림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심리 치료 방법론이 이제는 사무량심을 토대로 하는 심리 치료 방법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서구의 심리치료가 처음 알아차림을 도입했을 때는 알아차림의 이론적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고 도입했다. 나름의 이유는 있었겠지만, 그로 인해서 알아차림이 가지고 있는 치유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 점은 아쉬운 감이 있다. 사무량심의 경우도 이러한 이론적 토대를 제대로 알고 심리 치료에 적용할 수 있다면 보다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윤희조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서울불교대학원대 불교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불교와심리연구원 원장, 한국불교상담학회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와 번역서로 『불교의 언어관』, 『불교심리학사전』, 『불교상담학개론』, 『심리치료와 행복 추구』,『붓다와 프로이트』(공역), 『자비와 공』(공역), 『붓다와 영적돌봄』(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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