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 불교는? 1
인도 불교를 말하다
최경아
동국대학교 강사
인도의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인도에 침입한 외래인인 아리안족의 산물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이 이룩한 베다 문명의 다신교 전통과 제식 문화를 기반으로 현대까지 이어지는 힌두교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베다 중심의 바라문교(Brahmanism)와 불교를 위시한 자유사상가 그룹이 주도한 사문주의(Shramanism)는 인도의 종교철학을 이끄는 양대 축으로 알려져왔다. 아리안족은 자연의 위대한 힘을 신격화한 다양한 신관을 베다(Veda)를 통해 소개했는데, 신에 대한 찬가로 가득한 『리그베다』에는 무니(muni)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이 묘사되어 있다. 베다의 선인인 르쉬(ṛṣi)나 사제 계급인 브라만과 달리, 깊은 숲속에서 극심한 고행을 하며 홀로 은둔했던 무니라는 존재는 아리안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무니는 현자 또는 수행자를 일컫는 명칭으로 우리가 아는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모니는 이 용어의 한자 음역이다. 아리안족이 인도에 진입해 정착하기 이전부터 인도에는 이와 같은 은둔 고행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7세기 무렵 인도 문명의 중심지는 이미 갠지스강으로 옮겨졌다. 이곳을 근거로 불교와 자이나교가 발흥했고, 바라문교도 융성했다. 사제 계급인 브라만을 매개로 신과의 교섭을 통해 원하는 바를 성취하려는 아리안의 현세적인 세계관과 은둔과 내핍의 고행으로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려는 토착민들의 탈세속적인 세계관은 출발점부터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불교는 슈라마나 전통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행이 현실의 고의 해소에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인도의 불교는 이와 같이 당시 종교 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현실 참여적인 특색을 보여왔다. 부처님의 열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탐진치의 제거를 통한 고의 소멸이라는 초기의 실천적이며 윤리적인 색채가 퇴색하고 불교는 교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기원 무렵부터 5세기경까지 지속되었던 쿠샨왕조 시대에는 주변국과 상업이 활성화되고 교역이 늘면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이질적 요소가 불교에 유입되고, 생계로 인해 수행을 할 수 없던 일반인들 가운데, 죽음 후의 세계를 걱정하고 보장받고 싶어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승단에 전폭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했고, 그 보상으로 내생을 보장받고 싶어 했다. 대승불교의 발흥에 대해선 철학적 또는 사회 변화적, 또는 수행법의 변화 등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자로 재듯이 어느 시대부터 대승불교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의 평지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된 계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외적인 주요 원인은 이슬람의 침입과 그들의 사원 파괴와 불교도 살육이다. 같은 피해를 받았을 바라문교의 타격이 크지 않은 이유는 브라만 사제 계급은 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힌두 사원이 파괴될지언정 그들이 몰살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반면 사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삭발과 가사의 공통된 외관에 절제된 규칙적 생활을 했던 승려들을 이슬람 침입자들은 위협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렇듯 불교는 인도의 문화 중심지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 12세기 말에는 비하르나 벵골의 사원에 국한되어 존속했고, 산악 지대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혹자는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사상이 업보설과 양립하기 어려웠고, 비불교도들에게 충분히 해명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불교가 철학적으로 풍성해지는 계기는 되었지만 불교의 쇠락을 이끈 절대적인 원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도인들은 불교의 쇠멸을 초래했던 현실적인 배경을 불교의 출가주의에서 찾기도 한다. 침입자였지만 인도 문명의 기틀을 닦은 주된 세력은 아리안이었고, 베다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종교 관습은 강력한 가부장의 입지와 가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가계를 잇는 것은 힌두교도로서의 가장 우선적인 의무였다. 불교도들에게는 불법으로 이해되는 다르마(Dharma)가 일반 인도인들에게는 힌두식 사회 규범 곧 카스트의 신분 질서를 지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바로 그 예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안의 기득권은 여전히 인도의 종교 사회에서 유효하다고 볼 수 있으며, 새로운 불교도들은 예전에 그랬듯이 이러한 기득권에 맞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카스트의 차별을 철폐하고자 새롭게 불교를 재해석한 신불교 운동이 그것이다. 불교 부흥기를 이끈 여러 명의 선각자가 있지만 사회적으로 가장 강력한 파장을 일으킨 인물은 바로 암베드카르 박사(1891~1956)다. 일찍이 얼굴색이 아닌 그 사람의 행위로 상대를 대해야 한다고 설한 초기 불교의 가르침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신분 철폐와 관련한 사회운동으로 변모했다.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사회 운동가이자 초대 법무부 장관까지 지낸 그는 1935년에 힌두로 태어났지만 힌두로 죽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1956년에는 중인도의 나그푸르에서 40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불교로 개종했다.
인도의 불교 부흥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리랑카 출신의 불교신지학회의 대표적 인물 안아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를 언급해야 한다. 그는 1891년에 최초의 설법지와 성도지인 사르나트와 보드가야를 방문하고, 방치된 상태의 성지를 재건할 것을 결심하고 마하보디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스리랑카로부터 10명의 승려를 초빙해 인도에서의 불교 중흥에 헌신했다. 인도인 학자 출신인 코삼비(1876~1947)는 스리랑카에서 출가하고 인도로 다시 돌아와 대학에서 불교와 팔리어를 가르쳤고, 불교 경전의 영역에 헌신했으며, 『바그완 붓다』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다르마팔라, 코삼비, 암베드카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 계몽적인 움직임은 인도 불교의 부흥과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재가불교의 활성화, 카스트 철폐 운동으로 이어져 인도 근대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재가 수행자인 고엔카(1924~2013)는 미얀마 출신의 인도인으로서 그곳에서 전수한 위빠사나 명상법을 인도에서 보급함으로써 불교 수행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된다. 인도뿐 아니라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종교와 관계없이 불교 명상을 쉽게 보급함으로써, 불교를 하층민의 종교로 간주했던 인도인들에게 이를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술(Art of Living)로서 받아들이게 했다. 인도 정부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1935~ )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대거 유입된 티베트 불교도들로 인한 티베트 불교의 확산 또한 현대 인도 불교의 주요한 면모가 되었다. 특히 달라이 라마의 영적 감화력은 티베트 불교의 입지를 한층 끌어올려 서구인들에게는 불교를 대표하는 종파로 각인되고 있다. 인도 불교의 현재 모습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그 특징이 정리된다. 첫째, 신불교의 모습은 인도에서 불교가 처음 일어났을 당시와 크게 차이가 없다. 여전히 카스트의 차별은 유효하며, 인도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신분 철폐를 위해 투쟁했지만 오히려 불가촉천민의 종교로 낙인찍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둘째, 스리랑카, 미얀마, 티베트 등에 전파된 불교가 역으로 다시 인도에 유입되어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이끌고 있다. 셋째, 불교 발생국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불교 회복 운동은 학술적 수행적 측면에서도 파급 효과가 있을 때 효과적이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인도의 불교도 인구는 전체 인도인 가운데 0.7%로 840만 명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전통적 의미의 불교도는 13%가 채 안 되고, 87%가 암베드카르가 이끄는 신불교를 추종한다. 신불교도의 최대 밀집지는 마하라슈트라주로서 전체 불교도 가운데 77%에 해당한다. 그 외에 서벵골, 마드야프라데시, 우타르프라데시에 각기 20만 이상의 불교도들이 있다. 주 전체 인구 가운데 불교도 인구가 많은 상위 5개의 주로 라닥(39.7%)과 시킴(27.4%), 아루나찰프라데시(11.8%) 등이 티베트 불교 계열로서 히말라야에 인접한 산악 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미얀마와 근접한 미조람(8.5%), 신불교의 중심지인 마하라슈트라(5.8%)가 있다.
2012년에는 국제불교연합(International Buddhist Confederation)과 같은 인도에 센터를 둔 불교 단체도 설립되는 등 그동안 관심을 두지 못했던 국제 사회에서 불교 종주국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최경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인도 푸네대에서 철학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상대 인문학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현재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강사로 있다. 「자아(self)와 개인(person)에 대한 정의 고찰 -초기 불교를 중심으로-」, 「인도 불교에서 개아론자의 출현과 의미」, 「인도 초기 대승의 수행문화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기원과 전개」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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