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작가의 이럴 땐 이 책을! /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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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벤스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만남.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분노에서 귀환으로
인류가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세상이 평온할 때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이기는 법은 배웠지만 사는 법은 잊었을 때, 우리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로 돌아간다. 삼천 년 전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조용히 말한다. 너희의 혼란은 처음이 아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분노했고, 인정받기를 갈망했고, 사랑하는 이를 잃었으며, 무엇보다 집을 그리워했다. 그러니 호메로스를 읽는 일은 과거로의 도피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오래된 거울 앞에 서는 일이다.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刊, 2015년 9월
분노를 멈추게 하는 것은 더 강한 힘이 아니다
"미움은 미움으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미움을 내려놓을 때에만 사라진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법구경』에 나오는 이 짧은 말씀은 이천오백 년이 넘도록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처를 되갚으면 마음이 풀릴 것 같지만, 실은 꺼져가던 불에 장작을 하나 더 던져 넣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붓다는 세상이 욕심과 화와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불로 타오르고 있다고 했다. 이 말씀을 곱씹다 보면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친구를 잃고 슬픔에 미쳐 적의 시신을 끌고 다니던 아킬레우스다. 그의 분노는 더 많은 피를 흘린 뒤에 꺼지지 않았다. 적의 늙은 아버지와 마주 앉아 함께 울던 밤에 비로소 꺼졌다. 미움은 미움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호메로스는 두 사람의 눈물로 보여준 셈이다. 두 세계가 만나는 곳은 그뿐이 아니다. 붓다는 화려한 왕궁을 떠나 진정한 자신을 찾았고, 오디세우스는 영원히 살게 해주겠다는 여신의 섬을 떠나 작고 거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은 집을 떠났고 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둘이 찾은 것은 같았다. 바깥의 영광이 아니라 내 안의 고요, 욕심이 잦아든 자리에서야 겨우 보이는 나 자신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뜻하는 '열반'은 본래 '불이 꺼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호메로스의 두 이야기는 분노의 불길로 시작해 고향 집 부엌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연기로 끝난다. 꺼야 할 불이 있고, 끝까지 지켜야 할 불이 있다. 삼천 년 전의 노래는 그 둘을 알아보는 법을 우리에게 가만히 일러준다.
『일리아스』의 첫 단어는 '전쟁'도 '트로이'도 아닌 '분노'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Μῆνιν ἄειδε θεὰ Πηληϊάδεω Ἀχιλῆος)." 호메로스는 거대한 전쟁을 한 인간의 상처받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아킬레우스가 분노한 것은 단지 아름다운 여인 브리세이스를 빼앗겼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이만큼 싸웠는데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그는 존재 전체가 모욕당했다고 느낀다. 우리는 이 마음을 안다. 회의실에서 공로를 빼앗길 때, 화면 속 타인의 성공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도 아킬레우스가 깨어난다. '좋아요'와 조회 수와 팔로워로 존재를 증명하는 시대에 인정 욕망은 함정을 품고 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나의 삶을 살지 않고,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관리하며 살게 된다. 아킬레우스 앞에는 두 운명이 놓여 있었다. 고향에 돌아가 오래 사는 삶, 혹은 트로이에서 요절하고 불멸의 명예을 얻는 삶. 긴 삶인가, 영원한 이름인가. 이 질문은 삼천 년 뒤의 우리에게도 모양만 바꾼 채 되풀이된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적을 악마로 그리지 않는다. 트로이의 헥토르도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다. 성벽 위에서 아내 안드로마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날,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가 아버지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말총 장식이 흔들리는 청동 투구가 무서웠던 것이다. 헥토르는 웃으며 투구를 벗어 땅에 내려놓고서야 아이를 품에 안는다. 아이를 안으려면 영웅은 투구를 벗어야 한다. 이보다 아름다운 인간학이 또 있을까. 우리도 직함과 경력과 성과와 프로필이라는 투구를 쓰고 산다. 그러나 아이가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의 명성이 아니라 아버지이고,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투구가 아니라 얼굴이다. 얼굴이 지워진 곳에서 폭력은 쉬워지고, 얼굴이 돌아오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킬레우스는 그것을 너무 늦게 배운다. 분노로 전장을 떠나 있는 사이 가장 사랑하는 벗 파트로클로스가 죽고, 명예도 누가 옳았는지도 한순간에 무의미해진다.
아킬레우스, 타인의 슬픔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다
치유되지 않은 슬픔은 광기로 번져, 그는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끈다. 이 피의 서사시를 끝내는 것은 더 강한 무기가 아니라 한 노인이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밤에 홀로 적진에 들어가 아들을 죽인 손에 입을 맞추고 말한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기억하시오(μνῆσαι πατρὸς σοῖο, θεοῖς ἐπιείκελ᾽ Ἀχιλλεῦ)." 그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지 않는다. 상대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당신도 누군가의 아들이 아닌가. 아킬레우스는 늙은 아버지 펠레우스를 떠올리며 울고, 프리아모스는 헥토르를 생각하며 운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그 아들을 죽인 자가 한 막사에서 함께 운다. 폭력을 멈추게 하는 것은 더 큰 폭력이 아니라 기억과 눈물, 그리고 한 문장이다. 논박하는 법은 가르치면서 타인의 슬픔을 상상하는 법은 잊어가는 우리 시대에 이보다 절실한 가르침은 드물다.
『일리아스』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라고 묻는다면, 『오디세이아』는 "당신은 어디로 돌아가는가"라고 묻는다. 분노에서 귀환으로, 명성에서 귀향으로. "들려주소서, 무사여, 수많은 길을 떠돈 그 사람을." 첫 서사시가 '분노'로 시작했다면 두 번째 서사시는 '사람'으로 시작한다. 그 사람은 폴뤼트로포스(πολύτροπος), 여러 방향으로 굽이치는 사람이다. 오디세우스는 가장 강한 전사가 아니다. 그의 힘은 꺾이지 않는 데 있지 않고, 꺾여도 다른 방향으로 흐를 줄 아는 데 있다.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 문명을 만들었다. 지도는 가장 빠른 길을, 알고리즘은 우리가 다음에 좋아할 것을, AI는 여행의 모든 일정을 알려준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방향을 잃었다고 느낄까. 내비게이션은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지만 목적지를 정해주지는 않는다. AI는 길을 알지만, 오디세우스는 집을 안다. 어쩌면 우리가 잃은 것은 길이 아니라 집인지도 모른다. 여신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삶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바닷가에 앉아 운다. 아테나는 그 마음을 이렇게 전한다. "제 땅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이라도 보기를 갈망하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모험가가 그리워한 것은 궁전도 황금도 아닌 연기였다. 누군가 밥을 짓고 있다는 신호,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증거. 그가 돌아가려는 이타카는 스스로 "험하지만 젊은이를 잘 길러내는 땅"이라 부른 척박한 섬이다.
그가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왜 이타카였을까
완벽해서가 아니라 자기 것이기에 그곳은 집이다. 삶은 거대한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끝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오래 쓴 찻잔, 오후의 빛, 낯익은 발소리 같은 작은 것들이다. 귀향길의 사이렌은 배를 부수지 않는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이 스스로 다가오게 만든다. 오늘의 사이렌은 우리를 바다가 아니라 끝없는 피드 속으로 끌고 가 주의력과 시간과 끝내 자기 자신까지 앗아간다. 오디세우스가 위대한 것은 유혹 없는 삶을 꿈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흔들릴 존재임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돛대에 묶는다. 우리에게도 돛대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 매일의 산책, 한 권의 책처럼 우리를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려보내는 무언가가. 로터스를 먹는 이들의 섬에는 괴물이 없다. 다만 그 열매를 먹으면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잊는다. 오디세우스의 가장 큰 적은 죽음이 아니라 망각이었다.
이십 년 만에 거지 차림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거름더미 위에 버려진 늙은 개 아르고스만이 그를 알아본다. 꼬리를 흔들고 귀를 늘어뜨리지만 다가갈 힘이 없는 그 개는, 주인을 본 그 순간 숨을 거둔다. 사랑이란 어쩌면 알아보는 능력이다. 세월이 바꾼 얼굴, 실패가 바꾼 모습 속에서도 그 사람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페넬로페가 있다. 낮에 짠 수의를 밤마다 풀며 이십 년을 버틴 그녀의 기다림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그녀는 판단하고, 속이고, 견딘다. 떠나는 이의 용기가 모험이라면 남은 이의 용기는 지속이다. 누군가 이타카를 지켰기에 귀환은 가능했다. 두 서사시를 함께 읽어야 할 결정적인 이유는 『오디세이아』 11권에 있다. 저승에 내려간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를 만나, 당신은 죽어서도 망자들을 다스리는 위대한 자라며 그를 위로한다. 영원한 이름을 위해 짧은 삶을 택했던 영웅이 대답한다. "죽음을 두고 나를 위로하려 하지 마시오, 빛나는 오디세우스여." 모든 죽은 자의 왕이 되느니 차라리 살아서 땅 한 뙈기 없는 가난한 이의 품팔이가 되겠다는 것이다. 『일리아스』에서 가장 높은 가치였던 영광이 여기서 뒤집힌다. 호메로스는 두 작품에 걸쳐 "어떻게 위대해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어떻게 살아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놓는다.
어쩌면 한 사람의 생애는 이 두 서사시 사이를 건너가는 일이다. 젊은 날 우리는 『일리아스』를 산다. 싸우고, 증명하고, 상처받고, 분노한다. 그러다 어느 날 삶은 우리를 『오디세이아』로 데려간다. 이 모든 싸움 뒤에 무엇이 남는가. 누가 나를 기다리는가. 성숙이란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두 이야기가 모두 있음을 아는 일이다. 우리는 때로 아킬레우스이고, 헥토르이고, 프리아모스이고, 페넬로페다. 그러나 대부분의 날 우리는 오디세우스다. 집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참혹한 밤이 지나도 눈부신 새벽은 온다. 그는 모든 일이 잘될 거라 말하지 않는다. 많은 이가 죽고, 많은 이가 돌아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새벽은 온다. 희망은 확신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감각이다.
우리는 저마다 너무 멀리 떠나 있다. 성공이라는 섬에, 욕망이라는 섬에, 상처라는 섬에. 그리고 어느 날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할 것이다. 집에 가고 싶다. 그때 우리를 살리는 것은 더 빠른 배도, 더 정확한 지도도 아닐 것이다. 하나의 기억일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것, 나를 기다린 사람, 내가 가장 나다웠던 자리,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오르던 작은 연기. 『일리아스』의 끝에서 가장 강한 전사는 울고, 『오디세이아』의 끝에서 가장 먼 길을 떠돈 사람은 집으로 돌아온다. 그 두 장면 사이에 인간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있다. 그 노래가 삼천 년의 바다를 건너온 것은 어쩌면 단 한 가지를 말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살아 있으라. 사랑하라. 기억하라. 그리고 끝내, 돌아가라.
정여울
작가, 『데미안 프로젝트』, 『내가 사랑한 유럽top10』의 저자. KBS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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