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를 묻는 ‘나’는 누구인가?

― 수행자가 보는 무아와 윤회
[불교의 오래된 질문, 무아와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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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윤회(輪廻, saṃsāra)는 지속되어야 할 축복이라기보다 벗어나야 할 고통의 순환이다. 수행의 궁극적 이상도 더 나은 모습으로 계속 존재하는 데 있지 않고 생과 사의 반복에서 해탈(解脫, vimutti)하는 데 있다. 그런데 오늘날 윤회를 믿고 싶은 마음에는 개인적 생존에 대한 바람과 죽음 이후에라도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이 함께 들어 있어 보인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면 왜 계를 지키고 자비를 실천해야 하느냐”고 묻기도 하고, “악인이 잘사는 세상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고도 한다.

윤회설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지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윤회를 미신이라 치부하는 행위도 과학적 태도는 아니다. 현재의 과학으로 검증되지 않는다는 지적과 허황한 믿음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다르다. 과학이 현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범위는 사후 재생(再生, punabbhava)을 입증할 재현 가능한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데까지다. 실증적 확인과 반증에 기초한 과학적 태도와 과학적 사고를 하나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으로 확대하는 과학주의(scientism)는 구분되어야 한다.

‘윤회는 있다’와 ‘윤회는 없다’라는 불교 내부의 두 주장을 접하면 의문이 생긴다. 양측 모두 확정적인 경험적 증거가 없는데도 왜 각자의 입장을 참이라고 주장하는가.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구도심인가. 지금의 내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갈애인가. 진정한 교리와 전통을 지키려는 불심인가. 아니면 견해에 대한 집착인가.

윤회와 무아(無我, anattā)는 모두 초기경전에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두 교설 사이에는 분명한 긴장이 있다.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핵심 교리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무아다. 그렇다고 초기경전의 재생설을 떼어낼 수도 없다. 현존하는 초기불교 문헌에서 재생은 주변적 잔재가 아니라 업(業, kamma)·정견(正見, sammādiṭṭhi)·수행의 단계와 해탈의 언어를 서로 잇는 중심 교설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있다. 붓다 당대에도 사후의 존속을 부정한 유물론자들이 있었으므로, 재생설을 고대 인도의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결과라고만 보기도 어렵다. 후대 불교가 불변하는 영혼의 이동을 부정하면서도 무아와 재생을 양립시키는 여러 교학적 이론을 발전시켜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아와 재생을 모순 없이 설명하려는 불교의 여러 교리적 윤회설을 통틀어 ‘무아윤회론’이라 부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논리는 흔히 『밀린다팡하(Milindapañha)』의 대화로 설명된다. 밀린다왕은 재생자가 전생자와 동일한지 승려 나가세나에게 묻는다. 나가세나는 “같지도 않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이중부정으로 답한다. 우유가 응유(凝乳)와 버터로 변해가듯 앞선 존재와 뒤의 존재는 동일하지 않지만 무관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가세나의 비유는 우유라는 하나의 물질계 안에서 일어나는 연속적 변화를 보여줄 뿐이다. 생명체의 죽음은 몸과 뇌를 유지하던 조직화가 비가역적으로 해체되는 사건이다. 그 뒤에도 하나의 인과 계열이 다른 생명체로 이어진다는 사후 연속성까지 이 비유가 입증하지는 못한다. “같지도 않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말 역시 재생이 사실임을 입증하지 않는다. 내 눈에는 재생을 이미 전제한 뒤 그 연속을 불변하는 영혼 없이 설명하는 교리적 문법으로 보인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과적 연속 가운데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가장 분명한 사례 중 하나다. 부모의 유전자와 습관, 가치관과 상처가 자녀의 삶을 형성해도 우리는 자녀를 부모의 재생이라 부르지 않는다. 불교 교학은 이를 외적·분기적 인과관계로 보고 사후 재생과 구분한다. 상좌부는 재생연결심(再生連結心, paṭisandhi-citta), 유식불교는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 후대 인도·티베트 불교는 심상속(心相續, citta-santāna)이라는 개념으로 불변하는 ‘나’, 곧 아트만(ātman)을 세우지 않으면서도 행위의 결과가 생사를 넘어 이어진다고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설명은 불변하는 주체 없이도 인과의 연속을 말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아나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와 형식논리상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인과 계열이 실제로 생물학적 죽음을 넘어간다는 사실과, 그 후생을 왜 ‘나의 재생’이라 불러야 하는지는 여전히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재생을 인과 계열의 연속으로 설명한다 해도, 조건에 따라 구성되고 해체되는 두 존재를 하나로 묶을 때 그 연속성을 왜 동일성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인간의 인격적 동일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인 기억은 객관적 사건을 그대로 저장했다가 꺼내는 고정된 기록이 아니다. 지각 단계부터 과거의 체험과 감정, 기대의 영향을 받으며 회상할 때마다 수정되고 재구성된다.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기억 작용은 살아 있는 뇌와 신경계의 생물학적 활동에 의존한다. 뇌의 조직적 기능이 비가역적으로 소멸한 뒤에도 기억이 독립적으로 보존된다는 재현 가능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내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음 생의 존재도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전생자와 후생자를 어떤 의미에서 같은 ‘나’라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의도가 업이 되어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과적 연결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생물학적으로 단절되고 기억과 인격도 다른 두 존재를 과연 전생자와 후생자라 부를 수 있는가.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종교로서의 불교는 이러한 집요한 물음에 초연한 태도로만 일관할 수 없다. 신자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 사후의 안녕을 바라며, 보시가 다음 생에라도 결실을 맺기를 원한다. 무상(無常, anicca)·무아·연기의 교리만 제시한 채 사후 세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로는 중생의 절실함에 대응하기 어렵다. 그래서 ‘윤회’라는 말에는 주체 없는 인과적 재생이라는 교학적 개념과 “죽은 뒤에도 내가 계속된다”는 본능적 기대, 선악의 결과가 다음 생에서라도 구현되기를 바라는 도덕적 소망이 뒤섞인다.

바로 여기서 신앙공동체로서의 불교와 수행자인 내가 법을 대하는 방식이 갈라진다. 종교는 사후에 관한 답을 요구받지만, 나는 수행자로서 그 답을 절박하게 요구하는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볼 뿐이다. 아무리 정교한 이론이라도 논리적 정합성이 경험적 증거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수행자의 눈으로 본 무아

나는 무아를 ‘나’라는 존재가 있다거나 없다는 식의 존재론적 명제로 이해하지 않는다. ‘나’와 ‘나의 것’이 생겨나고 멸하는 과정을 단지 과정으로 보라는 수행 지침으로 받아들인다. 몸의 감각에 느낌이 일고 그 느낌에 판단이 붙어 “내가 상처받았다”는 서사로 발전하는 과정을 사띠(念, sati)로 살피면, 감각 자체보다 그것을 ‘나의 일’로 붙드는 자아 서사 (self narrative)가 고(苦, dukkha)를 크게 증폭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뇌가 구성한 서사는 현실이 아니어도 실제 위협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정서적·생리적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감각에 자아 서사가 덧붙어 고를 증폭시킨다는 수행자의 관찰은 현대 뇌과학의 설명과도 맞닿아 있다.

니까야와 아함에는 경전 속 붓다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선처나 악처에 태어난다고 명시적으로 설하는 대목이 곳곳에 나타난다. 따라서 경전에 그려진 붓다가 사후 문제에 일관되게 침묵만 했다고 말할 수 없다. 동시에 경전에는 “여래는 사후에도 존속하는가”, “세계는 영원한가”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질문이 고의 소멸에 도움이 되는지를 되묻는 붓다도 나타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실존한 붓다의 친설이 무엇이었는지 문헌학적 연구와 해석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나 역시 나의 관점을 벗어나 경전을 읽고 해석할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깊이 와닿는 경전 구절을 꼽으라면, 『사유경(蛇喩經, Alagaddūpama Sutta)』에서 “과거에도 지금도 나는 고와 고의 소멸만을 말한다”고 설하는 붓다의 법문이다.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에서 확인해 온 불법의 방향과 가장 정확하게 공명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은 역사적 붓다의 육성을 그대로 녹음한 기록이 아니다. 오랜 구전과 편집, 공동체의 창조적 재구성을 거쳐 전승된 집단적 기억에 가깝다. 그 안에 서로 다른 강조점과 긴장, 때로는 모순되어 보이는 표현이 나타나도 내 눈에는 결코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나의 해석과 맞지 않는 부분은 모두 후대의 삽입이나 편집으로 돌리고, 내가 원하는 붓다상만 내세워 그것이 역사적 붓다라고 고집할 수 없다. 동시에 경전의 모든 문장을 하나의 완결된 존재론으로 재조립하려는 시도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어떤 말이 지금 나를 괴롭히는 고의 발생을 보게 하고 고를 쉬게 하는지를 우선 묻고 싶다. 설령 역사적 붓다의 친설로 인정되는 말이라 해도,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고를 소멸시키는 데 어떻게 작용하는지 다시 묻지 않는다면 수행자의 법문이 아니라 교학의 대상으로만 남는다.

중도, 존재론에서 발생과 소멸의 관찰로

『가전연경(迦旃延經, Kaccānagotta Sutta)』에서 붓다는 “모든 것이 있다”와 “모든 것이 없다”는 두 극단을 피하고 연기를 설한다. 내가 읽기에 이 양극은 ‘나’라는 자아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붓다 당대의 상견(常見, sassatavāda)은 불변하는 자아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견해였고, 단견(斷見, ucchedavāda)은 그런 자아가 죽음과 함께 완전히 파괴된다는 견해였다. 정반대 논리처럼 보이지만 양쪽 모두 영속하거나 소멸할 ‘나’라는 실체를 먼저 세운다. 나는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를 그 사이에 제3의 존재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질문이 어떤 전제 위에서 생겨나는지를 먼저 보라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읽는다.

내가 이해하는 중도는 ‘있다’와 ‘없다’를 절반씩 섞은 절충이나,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이중부정으로 형이상학적 난점을 피해 가는 존재론적 논리가 아니다. 존재의 유무를 확정하는 대신 조건에 따라 경험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으로 시선을 돌리라는 수행 우선의 가르침이다. 현대 철학의 용어를 굳이 빌리자면 존재론적 판단을 괄호 안에 넣고, 경험이 어떻게 경험으로 드러나는지 그 과정 자체를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는 현상학적 태도에 가깝다.

중생은 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은 ‘있다’고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없다’고 판단하는 존재론적 이분법에 익숙하다. 내가 이해하는 붓다의 무명(無明, avijjā)은 바로 이 존재론적 분별에 가려 경험의 발생과 소멸을 보지 못하는 상태다. 명상과 사띠 수행은 이 기본 설정에서 한 걸음 물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외부 현실의 단순한 복사본이 아니라 감각정보를 바탕으로 뇌가 구성한 하나의 세계모델(world model)임을 직접 살피게 한다. 이를 홀로그램(hologram)에 비유할 수는 있지만, 세계 자체가 실제로 홀로그램이라는 뜻은 아니다. 수행자는 여기서 “세상은 환각이다”라는 새로운 존재론적 판단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경험이 어떻게 구성되고 그 과정이 어떻게 고를 일으키는지 본 뒤 거기에서 멈춘다. 내가 보기에 그 관찰을 다시 존재론적 해명으로 밀고 나가지 않는 일이 수행에서 가장 어렵다.

나는 사후 세계의 실재 여부를 지금 여기서 확인할 수 없다. 대신 사후의 나를 묻는 바로 그 ‘나’가 어떻게 생겨나며 그 의문이 어떤 조건에서 절박해지는지는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 관찰되는 고의 반복을 경전이 말하는 사후 윤회의 실질적 의미로 치환하지 않는다. 수행자로서 내게 급한 과제는 윤회의 유무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매는 일이 아니라, 지금 끝없이 반복되는 고를 여기서 당장 멈추는 일이다.

붓다의 핵심 설법은 수행의 동기를 일으키고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을 가리킨다. 불법은 세계 밖에 또 하나의 초월적 실체를 세우지 않는다. 내가 읽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공을 현상과 분리된 또 하나의 실체로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말로 설명하거나 개념으로 붙잡을 수 없는 불법의 초월이 있다면, 존재론적 답 하나를 더 얻는 데 있지 않고 그런 답을 요구하는 분별이 쉬는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사후 세계에 대한 정답을 알지 못한다. 죽음 이후의 답을 찾는 길과 그 답을 요구하는 마음의 조건을 보는 길은 전혀 다르다. 내가 보는 불교 수행자의 길은 후자다. 죽음 이후를 묻는 ‘나’가 다시 일어난다면, 그 ‘나’가 어떻게 생멸하는지를 그냥 지켜볼 뿐이다.

 

남시중|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저널리즘 석사(MSJ)를,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개를 위한 변명-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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