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 없이 세상을 바꾼 것들이 있다

남효창 박사의 나무 이야기



작지만 완전한 생명, 씨앗의 전략

씨앗은 작지만, 숲을 만든다. 그 멋짐은 크거나 화려해서가 아니라, 끝까지 자기 리듬을 지키는 데서 온다. 그리고 그 리듬 속에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오래된 방식이 있다. 숲은 그것을 알고, 우리에게도 가르쳐준다. 이제 나는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무와 씨앗이 어떻게 소리 내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지를.

소리를 남기지 않는 말

나무는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침묵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바람이 불면 가지를 피하는 방식, 비를 맞으면서도 잎을 오므리는 순간의 결정, 햇빛을 좇아 매일 조금씩 각도를 바꾸는 인내. 그 조용한 행동들은 숲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다. 아무도 들을 수 없지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언어.

씨앗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소리 없이 껍질을 열었고,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뿌리를 내렸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것이 생명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기다림이 차오르면 움직였고, 감각이 맞으면 열렸다.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내 삶의 어떤 순간이 떠올렸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였던 때. 확신이 없어도 몸이 먼저 움직였고, 설명이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전해졌던 때. 그때 깨달았다. 말은 빠르지만, 실행은 땅처럼 느리다는 것을. 말은 방향을 흔들지만, 실행은 중심을 만든다는 것을.

숲은 언제나 이렇게 가르쳐준다. 진짜 말은 침묵 속에 있고, 진짜 대화는 움직임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은 기억되지 않아도 행동은 흔적으로 남는다. 말은 바람에 사라져도, 실행은 땅에 스며든다.

이따금 나는 상상한다. 늦은 오후, 황금빛 햇살이 사라져가는 어느 언덕. 누군가가 조용히 작은 씨앗 하나를 심고 돌아선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허리를 펴고,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천천히 걸어간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손뼉 치지 않지만, 그 순간 땅속에는 작은 생명의 가능성이 숨결처럼 번지고 있다.

그의 뒷모습은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오래 남는다. 마치 그곳에 한 그루 나무가 이미 서 있는 것처럼. 어쩌면 삶이란,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도 남기는 일인지 모른다. 나무처럼, 씨앗처럼, 침묵처럼.

나무 한 그루가 감당하는 광합성의 무게

아까시나무 열매를 열어보았다. 씨앗 하나하나가 가지런히 태좌에 앉아 있었다. 그 단단한 자리마다, 어미 나무가 흘려보낸 시간과 에너지가 고요히 스며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씨앗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가 한 생애를 걸어 빚어낸 농축된 결정체다."


아까시 열매안의 씨앗들. 꼬투리란 주머니 안, 작은 생명들이 줄지어 누워 있다. 아직 세상 바람을 모르는 채,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자라는 시간이다.


빛으로 생명을 짓는 기술

씨앗 안의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핵산, 호르몬—이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어미 나무는 매 순간 광합성을 해야 한다. 잎사귀 속 엽록체에서 작은 기적이 반복된다. 햇빛은 물을 쪼개는 칼날이 되고, 그 과정에서 산소가 풀려난다. 남은 전자와 양성자는 ATP와 NADPH라는 특별한 운반꾼의 손에 쥐어진다. 이 에너지가 대기에서 내려온 이산화탄소와 결합해 포도당이 된다. 그 포도당은 뿌리로, 줄기로, 그리고 무엇보다 씨앗 속으로 흘러든다. 한 알 한 알이 여물 때까지, 나무는 매일 빛을 모으고, 물을 끌어 올리고, 보이지 않는 부엌에서 생명을 조리한다.

빛을 향한 몸부림

나는 이제 안다. 어미 아까시나무가 왜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었는지, 왜 잎들을 겹치지 않게 배열했는지, 왜 뿌리를 깊고 멀리 뻗었는지. 그 모든 건, 단 1제곱센티미터라도 더 빛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 빛으로 씨앗 하나라도 더 여물게 하려는, 조용하지만 치열한 계산이었다. 태좌는 자리를 부여하지만, 그 자리를 가능하게 하는 건 언제나 빛이다.

매일 반복된 기도

어미 나무는 자신의 몸을 태워 그 빛을 받아내고, 그 빛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하나씩 앉혀 놓는다. 씨앗을 키운다는 것은, 곧 자신의 광합성으로 다른 생명을 준비하는 일이다. 나는 아까시나무의 씨앗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미 나무의 잎을 떠올렸다. 그 잎 한 장 한 장이 어쩌면 기도였을지도 모른다.

"햇빛을 향한, 씨앗을 위한, 아무도 모르게 매일 반복된 기도." 그것이 광합성이었다.
 

남효창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숲 식생학 석사, 자연환경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산림환경정책학과 연구원 및 서울대 임업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숲 연구소이자 실내 치유 정원인 ‘마인바움’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나무와 숲』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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