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三身)의 의미|불교,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

삼신(三身)의 의미

중각 이중표
붓다나라 대표


붓다의 출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싯다르타는 왕위를 버리고 출가해 그 문제를 해결한다. 싯다르타는 우리의 모든 괴로움과 생로병사는 무명, 즉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싯다르타는 우리가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한 싯다르타는 자신을 붓다(Buddha), 즉 무지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인류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운명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왜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가?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인류는 태초부터 이런 문제의 답을 구했다. 그 결과 많은 종교와 사상이 출현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종교에서는 이 문제의 답을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신을 내세워 해결한다. “신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도 신이 창조했다. 우리는 신에게 죄를 지어 그 벌로 죽음의 세계에 내몰렸다. 신에게 속죄하고 신의 용서를 받아 천국에 가면 우리는 영생과 행복을 얻는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명확한 논리인가? 신을 믿기만 하면 인간의 근본 문제가 다 해결된다.

창조론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천지를 창조한 신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론은 그럴듯하지만, 사실의 여부는 판단할 수가 없다. 그래서 창조론은 믿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인류는 새로운 답을 구했다.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각성한 사람들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답을 구했다.

이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 가운데서 이 답을 구했다. 유물론이 등장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설(四大說)이 나타났다. 우리가 딛고 사는 땅[地]과 사방에 널려 있는 물[水]과 항상 사용하고 있는 불[火]과 매 순간 호흡하는 바람[風]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 우리는 이 사대가 모여서 태어났고, 사대가 흩어지면 죽는다. 행복은 사대로 된 몸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는 물질을 향유하는 것이다. 생은 일시적이며,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유물론은 현대의 과학사상으로 발전해 오늘날 인류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상이 되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존재한다. 전생의 업에 의해 이 세상에 와서 이생의 업에 의해 저세상에 간다고 주장하는 종교도 있고, 누구나 태어날 때 각자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므로 우리의 생은 태어날 때 결정된다는 숙명론도 있다. 이렇게 인류는 아직도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2,600년 전에 이 문제의 답을 찾았다. 싯다르타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왜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붓다는 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지, 생명은 육신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등을 묻는 제자에게 그런 질문은 진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그는 12연기를 깨달았다. 싯다르타는 연기법을 깨달아 붓다가 된 것이다. 깨닫기 전의 싯다르타는 붓다가 아니다. 싯다르타는 처음부터 붓다가 아니라, 연기법을 깨달음으로써 붓다가 된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지금은 붓다가 아니지만 연기법을 깨달으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붓다는 어떤 개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다. 누구나 깨달으면 붓다일 뿐, 싯다르타만 붓다인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붓다는 기독교의 구세주인 예수와는 다르다. 예수는 태어날 때 신의 아들로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구세주다. 예수 이외의 그 누구도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다. 그러나 붓다는 누구나 깨달으면 될 수 있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12연기는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의 구조로 되어 있다. 유전문은 무명(無明)을 원인으로 생로병사가 연기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환멸문은 무명이 소멸하면 생로병사의 모든 괴로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싯다르타는 우리가 겪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연기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며[유전문], 연기법을 깨달으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음[환멸문]을 깨달아 붓다가 되었다.

이렇게 세상에 붓다가 출현했다.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그렇다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맛지마니까야』 72. 「악기왓차곳따경」에서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환상과 모든 혼란과 나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잠재(潛在)하는 모든 아만(我慢;māna)을 파괴하고, 소멸하고, 단념하고, 포기하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했다.”

아만(我慢)으로 번역되는 ‘māna’는 ‘나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잠재의식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있다’라는 생각 속에서 살아간다. ‘내가 있다’라는 잠재의식에서 모든 환상과 혼란이 야기된다는 것을 붓다는 깨달았다. 붓다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한 무명(無明)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이다.

붓다는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해 함께 발생한 것, 즉 연기(緣起)한 것임을 깨달았다. 붓다는 이렇게 연기한 것을 ‘법(法;dhamma)’이라고 불렀다. 붓다는 이 세계가 존재(有;bhava)가 모여 있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연기하고 있는 법(法;dhamma)의 세계[法界]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법(法)을 보도록 가르쳤다.

『맛지마니까야』 28. 「큰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法)을 보는 자는 연기(緣起)를 본다.”

연기한 법(法)은 모두 다른 것에 의존해 나타나기 때문에 무상(無常)하고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오온(五蘊), 즉 몸(色), 감정(受), 이성(想), 의지(行), 의식(識)이다. 그런데 이 오온(五蘊)은 시간적 존속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가 아니라 무상하게 연기한 법(法)이며 실체성이 없는 무아(無我)다.

12연기의 유전문은 연기한 법을 보지 못한 중생들이 무아(無我)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내가 있다는 생각(有)’을 일으켜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느끼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12연기의 환멸문은 연기를 깨달아 무아의 진실을 알면 ‘나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이 사라져서 모든 괴로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러한 연기법의 깨달음은 우리가 삶의 주인임을 일깨워준다. 우리의 인생은 신이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우연한 물질의 결합도 아니고, 숙명에 의해 결정된 것도 아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온다. 이 사실은 변치 않는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콩을 원할 때는 콩을 심고, 팥을 원할 때는 팥을 심으면 된다. 콩과 팥이 생기는 것은 신이 주는 은혜도 아니고, 우연히 발생한 사건도 아니며, 전생에서 결정된 사건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해 실행한 결과, 즉 업보이다.

붓다는 이렇게 연기법을 깨달아 우리가 삶의 주체이고 주인임을 가르쳤다. 우리가 생사의 괴로움을 겪는 것은 자신이 괴로움을 만드는 삶을 살기 때문이며, 이를 깨달아서 괴로움을 없애는 삶을 살면 누구나 스스로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붓다가 깨달아 가르친 연기의 가르침이다.

대승불교의 삼신(三身)
대승불교 운동은 아비달마불교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붓다는 우리에게 연기법을 깨달아서 붓다로 살아갈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아비달마불교는, 전생에 수기를 받지 못한 보통사람은 붓다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라한을 수행의 목표로 삼았다. 아비달마불교는 보통의 인간이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아비달마불교를 비판하고, ‘모든 중생은 불성(佛性)이 있다’라고 주장한다.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삼신(三身), 즉 법신(法身;dharma-kāya), 보신(報身;sambhoga-kāya), 화신(化身;nirmāṇa-kāya) 개념은 이러한 대승불교 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붓다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다.

붓다는 연기법을 깨달은 사람이며 법계(法界)를 깨달은 사람이다. 『상윳따니까야』 12.20. 의지하여(緣)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연기(緣起)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생(生)에 의존하여 노사(老死)가 있다오.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실로 그 계(界), 즉 법(法)의 고정성, 법의 순차성, 이 의존성은 상주(常住)한다오. 여래는 그것을 바르게 깨닫고 통달한다오. 그리하여 알려주고, 보여주고, 선언하고, 확립하고, 공개하고, 해석하고, 천명(闡明)한다오. 그리고 ‘보라!’고 말한다오.”

모든 법은 무상(無常)하지만, 법이 연기하는 순서와 의존하는 관계는 고정되어 있다. 즉 법은 무상하게 변하지만, 일정한 법칙에 따라 연기하는 법의 세계[法界]는 변함없이 상주하며, 붓다는 이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법계(法界)라는 개념이 근본불교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법계의 개념과 함께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제45 「마왕품(馬王品)」에는 오분법신(五分法身)이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오분법신(五分法身)은 오온(五蘊)과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계신(戒身), 정신(定身), 혜신(慧身), 해탈신(解脫身),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을 의미한다. 오온은 연기한 법을 욕망으로 취해 자신의 존재로 집착하며 유전문의 삶을 사는 중생들의 거짓된 몸(五蘊幻身)이며, 오분법신은 법계의 실상을 알아서 법계와 하나가 되어 환멸문의 삶을 사는 몸, 즉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해 해탈한 무아의 삶을 사는 몸이다.

대승불교인들은 이러한 근본불교의 법계(法界)와 오분법신(五分法身)에 주목해 법신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연기하는 법계는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기 전부터 상주한다. 이 법계를 깨달은 사람이 붓다다. 그렇다면 법계는 붓다의 근원이다. 법계가 없다면 붓다는 출현할 수 없다. 연기하는 법계야말로 모든 붓다의 근본인 진정한 부처의 몸이다. 이를 깨달아 세상에 출현한 붓다는 이 근본 붓다의 화신(化身)이다.

이렇게 붓다 개념은 이제 언제나 변함없는 법신과 그 법신을 깨달아 실현한 화신으로 나뉘게 된다. 이 세상에 나타나 법계를 깨닫고 중생을 교화한 후에 열반에 든 석가모니 붓다는 화신불(化身佛)이고, 변함없이 상주하는 법계는 법신불(法身佛)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연기법을 깨달아 무아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자아로 취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연기를 깨달아 무아를 실현한 여래(如來)는 어떤 모습이나 개념으로 보거나 이해할 수 없다. 『맛지마니까야』 72. 「악기왓차곳따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왓차여, 이와 같이 여래를 형색[色]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하여 묘사한다면, 여래에게 그 (개념으로 규정된) 형색은 제거되고 근절되고 단절되고 없어진, 미래에는 발생하지 않는 법(法)이라오. 왓차여, 여래는 형색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났기[rūpasaṅkhāvimutta]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렵다오. (…) 느낌[受], 생각[想], 행위[行], 분별의식[識]도 마찬가지라오.”

이와 같이 연기법을 깨달은 붓다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한 싯다르타를 의미하지 않는다. 연기법을 깨달은 붓다, 즉 여래는 깨달으면 누구나 될 수 있는 열려 있는 존재인 동시에 모든 분별을 벗어났기 때문에 어떤 개념이나 형태로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이러한 붓다의 모습을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보신(報身)이라고 불렀다. 석가모니 붓다는 오랜 수행을 통해 연기한 법계의 실상을 깨달아서 무아를 실현했다. 그래서 붓다는 어떤 모습도 자아라고 취하지 않는다. 이렇게 수행이라는 업의 과보로서 출현한 무아를 실현한 붓다, 이것이 보신불(報身佛)인 것이다.

이렇게 삼신불 개념이 형성됨으로써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천지 만물 가운데 연기하지 않은 법은 하나도 없다. 꽃 피고 새 우는 것이 모두 연기법의 현현(顯現)이다. 산하대지는 서로 의지해 함께 나타난 법들, 즉 법계(法界)이며, 항상 존재하는 부처님의 몸, 즉 법신이다.

우리는 이 법계, 즉 법신과 하나가 되어 살기 때문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괴로운 삶이 연기한다. 이런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래 법신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본래 법신과 한 몸이기 때문에 누구나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다. 모든 중생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으므로 붓다가 되려는 원을 세워 보살행을 실천하면 법신(法身)을 자신의 몸으로 수용(受用)할 수 있다. 누구나 붓다가 되려는 원을 세우고 보살행을 닦으면, 그 업의 과보로서 붓다를 이룬다. 이렇게 보살행의 과보로서 성취되는 붓다가 보신불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신불이 구체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역사 속에 출현한 것이 화신불이다.


이중표|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불교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동 대학 철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호남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범한철학회 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불교 신행 단체인 ‘붓다나라’를 설립해 포교와 교육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 『정선 디가 니까야』, 『정선 맛지마 니까야』, 『정선 쌍윳따 니까야』, 『정선 앙굿따라 니까야』, 『붓다의 철학』,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불경』 등이 있으며, 『불교와 양자역학』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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