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동대관음암 - 구정 선사의 설화|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월정사 동대관음암
- 구정 선사의 설화

월정사 동대관음암에 전해오는 구정 선사의 설화는 ‘나’라는 집착을 내려놓고
하심과 인욕심으로 갈등을 극복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치유의 이야기다.

‘불법에 대한 굳은 믿음’과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발심’,
‘인욕바라밀의 실천’의 현장
오대산 월정사(月精寺)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세운 사찰이다. ‘월정’이란 이름은 동대산 만월봉에 떠오른 보름달이 유난히 밝아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율사는 홀로 오대산을 찾아 초암(草庵)을 짓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날씨가 음산해 당나라에서 한 노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은밀히 모시고 하산했다. 이것이 바로 월정사의 시작이다. 동대관음암은 오대 중에 동대산 만월봉 팔부능선에 관음보살을 모신 암자다. 오대산에 있는 사찰 대부분이 자장율사와 관련 있지만 본격적인 출발은 그로부터 160년이 지난 성덕왕 때 보천(寶川)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동대관음암도 마찬가지다. 그 후는 알려진 바가 없고 신라 말 무염(801∼888) 선사가 머물 때 구정 선사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아주 옛날, 비단 행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그는 효심이 지극했다. 어느 날 비단짐을 짊어지고 강원도 대관령을 넘다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다가 이상한 노스님을 한 분 발견했다. 누더기를 입은 노스님은 길옆 풀섶에 서서 한참이 지나도록 꼼짝 않는 것이었다. 청년은 궁금했다.

“왜 저렇게 서 있을까? 소변을 보는 것도 아니고. 거참 이상한 노릇이네.”

한참을 바라보던 청년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노스님 곁으로 다가갔다. “스님! 아까부터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눈을 지그시 감고 서 있는 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청년은 다시 물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서 있는 스님은 청년이 재차 묻자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잠시 중생들에게 공양을 시키고 있는 중이라네.”

저렇게 꼼짝 않고 서 있기만 하는데 중생에게 공양을 시키다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다시 무슨 중생들이냐고 물었다. 청년은 궁금증이 더 커졌다.

“어떤 중생들에게 무슨 공양을 베푸십니까?”

노스님은 “옷 속에 있는 이와 벼룩에게 피를 먹이고 있네”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꼼짝 않고 서 계십니까?”

“내가 움직이면 이나 벼룩이 피를 빨아 먹는데 불편할 것이 아닌가.” 스님의 말을 들은 청년은 크게 감동했다. 청년은 비단장사를 그만두고 스님을 따라가 제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청년의 뇌리에는 집에 계신 홀어머니가 떠올랐다. 청년이 잠시 망설이는 동안 노스님은 발길을 옮겼다. 생각에 잠겼던 청년은 눈앞에 스님이 보이지 않자 비단 보퉁이를 팽개치고 어느새 산길을 오르고 있는 스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스님은 청년이 다가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이윽고 오대산 동대관음암에 도착하자 스님은 청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인 일로 날 따라왔는고?”

“저는 비단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비단장수입니다. 오늘 스님의 인자하신 용모와 자비행을 보고 문득 저도 수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렇게 쫓아왔습니다. 부디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청년은 간곡히 청했다.

“네가 수도승이 되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스님! 무슨 일이든지 시키기만 하십시오. 이 몸 힘닿는 대로 다 할 것입니다.”

청년의 결심이 굳은 것을 확인한 스님은 그의 출가를 허락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매일같이 물 긷고 나무하고 밥하며 스님을 시봉하면서 3년이 흘렀다. 그러나 불법(佛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가르침도 얻지 못했다. 법문 한 구절 가르쳐주지 않자 초조하고 답답해진 청년은 용기를 내서 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다. 스님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니라” 한마디하고 입을 닫았다. 그러나 청년은 일자무식이라 이를 잘못 알아들어 ‘짚신이 짚세기(부처)’라고 알아들었다.

짚신이란 짚을 꼬아 만든 신발이다.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짚신이라고 대답했는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청년은 무조건 스님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생각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짚신이 부처라고?’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스님을 지극히 존경하고 있었기에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고는 자기 짚신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늘 생각했다. ‘어째서 스님은 짚신이 부처라고 하셨을까?’ ‘짚신아 어째서 네가 부처냐? 짚신아 어째서…’ 짚신이 부처라는 화두를 가지고 선을 행한 것이다. 도를 닦은 것이다. 시간이 나면 좌선대에서 참선을 하며, 짚신이 부처라는 화두로 생각에 빠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참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나무를 한 짐 지고 산쪽 산벼랑을 내려오면서 그 질문만 반복하던 그는 짚신의 끈이 뚝 끊어지는 순간 마침내 크게 깨달았다. 깨닫고 보니 짚신이 부처가 아니라 ‘즉심시불(卽心是佛)’이었던 것이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한걸음에 달려가 스님께 말씀드렸다. ‘즉심시불’이라고 말하자 스님은 아무 말없이 “오늘 중으로 부엌에 저 큰 가마솥을 옮겨 새로 걸도록 해라”라고 말했다. 청년은 흙을 파다 짚을 섞어 반죽한 후 솥을 새로 걸었다. 한낮이 기울어서야 일이 끝났다.

“스님, 솥 거는 일을 다 마쳤습니다.”

“오냐, 알았다.” 스님은 점검을 하시려는 듯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이리저리 살펴보신 스님은 “걸긴 잘 걸었다만 이 아궁이엔 이 솥이 너무 커서 별로 필요치 않을 것 같으니 저쪽 아궁이로 옮겨 걸도록 해라”라고 이르고는 나갔다.

청년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스님의 뜻을 어길 수 없었다. 한마디 불평도 없이 스님이 시킨 대로 솥을 떼어 옆 아궁이에 다시 걸기 시작했다. 솥을 다 걸고 부뚜막을 곱게 맥질하고 있는데 스님이 기척도 없이 불쑥 부엌에 나타나셨다.

“이놈아, 이걸 솥이라고 걸어놓은 거냐. 한쪽으로 틀어졌으니 다시 걸도록 하여라.” 스님은 짚고 있던 석장으로 솥을 밀어 내려 앉혀버렸다. 청년이 보기엔 전혀 틀어진 곳이 없었지만 스님의 다시 하라는 분부를 받았으므로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새로 솥을 걸었다. 그렇게 솥을 옮겨 걸고 허물어 다시 걸기를 아홉 번 반복했다. 스님은 솥을 아홉 번이나 걸고 나서야 드디어 청년의 구도심과 깨달음을 인가했다. 그리고는 솥을 아홉 번 고쳐 걸었다는 뜻에서 구정(九鼎)이란 법명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은 무염 선사라고 밝혔다고 한다. 무염 선사는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충남 보령시 성주사에서 개창한 산문)을 일으켰다. 동대관음에서는 구정 선사를 일명 ‘짚신 부처’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구정 선사의 수행은 오늘에도 입산 출가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동대관음암 뒷산인 만월봉 옆에는 구정 선사가 나무하던 구정봉이 있다. 구정봉을 오르다 보면 솥을 걸기 위해 흙을 팠던 ‘흙구덩이 터’가 있고 조금 위에는 도를 깨쳤다는 ‘좌선대’가 있다. 무염 선사는 제자가 득도한 것을 보고도 그 자리에서 인정해주지 않은 것은 득도해 기분이 들떠 있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정신이 나갈 수 있어 진정시키기 위해서 솥을 걸라고 한 것이다. ‘인욕보살’로 불리는 구정 선사의 수행 정신은 요즘도 출가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구정 선사의 설화가 주는 메시지는 ‘불법에 대한 굳은 믿음’과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발심’, 그리고 ‘인욕바라밀의 실천’이다. 만일 스님이 제자를 딱하게 여겨 ‘부처는 이런 것이다’ 하며 온정을 베풀었다면 구정 선사는 큰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아홉 번이나 솥을 옮겨 걸게 한 스님의 참뜻은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방편이었다. 세상살이에서 갈등의 주된 원인은 모두 나, 나의 것, 나의 생각에 집착해 이기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구정 선사의 설화는 ‘나’라는 집착을 내려놓고 하심과 인욕심으로 갈등을 극복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치유의 설화다.


기고__백원기|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2025년 별세.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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