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개고(一切皆苦), 괴로움의 뿌리를 찾는다|재가자의 바라밀다

일체개고(一切皆苦),
괴로움의 뿌리를 찾는다

남시중 미국 변호사


불교에서 번뇌라 부르는 괴로움은 진화한 신피질이 낳은 부작용
모든 생명은 죽음 직전까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진화 과정에서 각인된 생존 본능 때문이다. 죽음을 회피하지 못하는 생물은 생존하거나 번식할 수 없기에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은, 거짓이거나, 무의식 속 본능을 인지하지 못한 순진한 생각이거나, 혹은 깨달은 도인의 말일 것이다. 동물은 위협을 감지했을 때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며, 그 반응은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 같은 화학 성분의 기계적 작용 덕분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 역시 동일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의 산물이며, 인간 역시 뇌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서 다른 동물들과 놀라운 공통성을 지닌다.

인간의 뇌는 진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생물학적 박물관이다. 본능적 기능은 뇌간과 기저핵으로 이루어진 ‘파충류의 뇌’가, 감정과 기억은 ‘포유류의 뇌’인 변연계가, 언어와 판단, 상상력 등 고등 인지는 신피질, 즉 ‘영장류의 뇌’가 담당한다. 뇌는 원시적 구조 위에 새로운 기능이 덧붙는 방식으로 진화해왔으며, 각 층위는 그 기능과 구조가 특정 동물의 뇌와 유사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영장류 중에서도 오직 인간만이 비대하게 발달한 신피질을 지닌다. 전체 뇌의 약 76%를 차지하는 이 구조는 약 20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 시기, 불의 사용과 조리된 음식 섭취로 급격히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인간은 추상 언어를 구사하고, 뇌 안에서 가상 모델을 구성하는 ‘상상(simulation)’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 능력은 문명과 윤리, 종교와 예술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불안과 죄책감, 후회 같은 심리적 괴로움도 야기했다. 불교에서 번뇌(煩惱, kilesa)라 부르는 이러한 괴로움은 진화한 신피질이 낳은 부작용으로, 인간은 과거의 상처를 되새기고 미래의 위험을 미리 체험하며 괴로움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은 외부 세계의 실체 아니라
뇌가 구성한 시뮬레이션일 뿐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지만,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는 뇌에서 가공되어 하나의 내부 모델로 재구성된다. 예를 들어 시각 정보는 전기 신호로 전환되어 후두엽 등 시각 처리 영역에서 분석되고, 거리·형태·색채·움직임 등 요소들이 통합되어 뇌 안의 입체적 시각 모델로 완성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은 외부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뇌가 구성한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독일의 뇌과학자 토마스 메칭거(Thomas Metzinger)는 “우리는 뇌라는 어두운 터널 안에서 전기 신호로 가공된 모형만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자아도 뇌가 만들어낸 가상 모델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것을 실체라고 믿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고 주장했다. 불교의 무아설(無我說)과 깊은 울림을 공유한다.

현대 생물학과 뇌과학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인식은 뇌 안에서 구성된 가상 현실이며, 실재(實在, reality)는 직접적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불교는 이미 2,500년 전 이와 유사한 통찰에 도달했다. 붓다는 현상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緣, paṭicca)으로 형성되고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법칙 아래 끊임없이 흘러가는 하나의 ‘과정(process)’일 뿐이라고 보았다. 현대 양자 물리학도 마찬가지로, 물리적 대상은 독립적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직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내고 변하며 사라진다고 말한다.

“무명이 있으면 ‘행’이 생기고, 무명이 사라지면 행도 사라진다.”

붓다의 제자들은 그가 왜 사후 세계나 우주의 실체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침묵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붓다는 분명히 밝혔다. “과거에도 지금도, 나는 오직 고(苦, dukkha)와 고의 소멸만을 말할 뿐이다”(『사유경(蛇喩經, Alagaddūpama Sutta)』). 그는 “우주의 끝이 있는가?,”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일관되게 무기(無記, avyākata), 즉 침묵으로 대응했다. 이는 회피가 아니라, 그 질문들이 실상(實相, yathābhūta)을 보지 못한 무명(無明, avijjā)에서 비롯된 망상(妄想)이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의 밑바탕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진정한 답은 그 공포 자체의 소멸이며, 새로운 말은 망상을 더 무겁게 할 뿐이다.

양자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물리적 세계는 제각기 독립된 어떤 형태나 속성을 가진 그 어떤 본질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가 드러나고 그 양태도 그 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변화한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는 각기 홀로 존재하는 물질적 대상으로 나누어질 수 없으며 우리 인간이 편의상 단지 그렇게 (시뮬레이션해) 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나가르주나(龍樹, Nāgārjuna)의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사하다는 지적에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나가르주나와 양자역학의 공명은 즉각적이었다”고 말했다.

붓다는 “무명(無明, avijjā)이 있으면 ‘행(行, saṅkhāra)’이 생기고, 무명이 사라지면 행도 사라진다”고 말했다(『연기분별경(緣起分別經, Paṭiccasamuppāda-vibhaṅga Sutta)』). 이는 연기의 이치를 보지 못할 때 행이 발생하고, 그 원리를 꿰뚫어 보면 행이 소멸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명’이란, 이 세계가 연기적으로 구성된 시뮬레이션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현실과 자아를 고정된 본질을 지닌 자성(自性, inherent existence)이나 독립적인 실체로 착각하는 중생의 인식 상태를 말한다. ‘행’은 팔리어 ‘상카라(saṅkhāra)’의 의역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그 ‘행’과 같다. 문자 그대로는 ‘함께 형성된 것들’을 뜻하며, 이 문맥에서 ‘행이 생긴다’는 말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라는 현상계의 속성을 보지 못하고, 세계를 고정불변하고 독립된, 내재적 본질(inherent nature)을 지닌 실체로 오인하는 인식 상태를 말한다. 고대 중국의 번역가들이 ‘사람과 사물이 모여 움직이는 거리’를 뜻하는 한자 ‘行’을 선택한 것도, 상카라가 지닌 ‘일시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흐름’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불교는 실체를 상정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조건 지어진 현상(conditioned phenomena)’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를 통찰한다(과학은 이제야 다가가고 있을 뿐이다). 붓다는 “행이 사라지면(즉 무명을 걷어내고 실상을 보면)… 집착이 사라지고, 마침내 모든 인간의 (심리적) 괴로움이 소멸한다”고 설명했다(『대갈애멸경(大渴愛滅經, Mahātaṇhāsaṅkhaya Sutta)』). 붓다의 법문 곳곳에는, ‘존재가 법(法, dhamma)과 어긋나면 괴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통찰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괴로움의 본질도, 그 뿌리도 모두 무명이다. 이 무명을 걷어내고 모든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 바로 열반(涅槃, nibbāna)이다. 붓다는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 dhamma)을 보고 나를 본다”고 말했다(『대상족유경(大象足喩經, Mahāhatthipadopama Sutta)』). 그러나 인간은 진화생물학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뇌가 자신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고, 자아와 세계가 자신이 구축한 가상 모델에 불과함을 직관하며, 그 실상을 관조해가는 명상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남시중|시카고에 거주하며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저널리즘 석사(MSJ)를,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개를 위한 변명-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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